제38화
“당신과 나의 처음처럼.”
으으으악!
리벨의 얼굴이 사정없이 빨개졌다.
그러면서 첫날의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을 경고도 없이 강타했다.
땀에 젖어 살짝 흐트러진 금발,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조금 창백하게 빛나던 그의 얼굴.
열기가 느껴지던 그의 시선…….
“……?”
그때를 회상하던 리벨은 당황했다.
그…… 얼굴이 떠오르는 건 좋은데 왜 내가 시스테인을 내려다보고 있었지?
리벨이 멈칫했다.
그날 밤의 기억을 가리던 베일이 조금씩 걷히는 기분이었다.
그날 왠지…… 내가 이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기분 탓인가?
아니었다.
온통 흔들리는 세상에서 그는 분명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세상을 뒤흔드는 건 그가 아니라…….
리벨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달아올랐다. 그녀가 기억을 지우려고 고개를 홱홱 저을 때였다.
그녀의 답을 기다리고 있던 시스테인이 불쑥 말했다.
“필요 없으시다면.”
뭐, 뭐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린 리벨은 그대로 그에게 기습당했다.
―쪽.
이마에 닿은 부드러운 감촉이 무엇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농밀한 입맞춤이 입술 위로 쏟아져 내렸다.
“……!”
비틀거리는 리벨을, 시스테인의 단단한 팔이 받쳐 안았다.
그건 두 사람이 저택에 막 들어왔을 때였다.
그리고 저택 계단을 채 올라가기도 전에.
“꺅,”
하는 리벨의 작은 목소리는 맞닿은 입술 사이로 묻혀 버렸다.
―툭.
푹신한 카펫 위로 신부의 새하얀 구두가 흩어지듯 벗겨져 굴렀다.
그리고 새하얀 스타킹과 가터벨트가 시스테인의 손 아래에 놓였다.
“……!”
그보다 몇 계단 위에 걸터 앉혀진 리벨은, 선 채 저를 마주 보는 시스테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새하얀 예식용 장갑을 이로 물어 벗은 그가, 검을 오래 잡아 단단한 손끝을 그녀의 새하얀 무릎 위에 살짝 얹었다.
하얗고 연약한 다리와 힘 있는 손이 닿은 순간.
그의 팔이 완전히 리벨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아……!”
리벨이 계단에 등이 닿겠다 싶은 순간, 단단한 팔이 그녀의 등에 닿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완전히 가까워졌다.
* * *
‘내 이름은 리벨 이벨라예요.’
‘리-벨-이-벨-라.’
리벨은 언젠가 제가 말했던 것이 왜 지금 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문득 눈앞에 보이는 건 시스테인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이번엔 올려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 있었던 듯했다.
벽에 기대어져 있는 그의 어깨 옆에 떡하니 대어진 팔도 보였다.
창백한 달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는 건…….
―리벨 자신의 팔이었다.
“오오오오우.”
리벨은 눈을 번쩍 떴다.
꿈을 꿔도 이상한 걸 꾸네! 하하하하하!
진땀이 쫙 빠지는 기분이었다. 왜 이렇게 생생하냐. 마치 진짜 있었던 일처럼.
“아,”
저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키려던 리벨은 짧게 신음했다.
온몸의 근육이 땅기는 것 같았다.
특히…… 긴장했던 허리가.
“읏.”
이번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보려는 때였다.
허리에 감긴 뜨거운 온기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
서서설마?
슬쩍 리벨이 뒤를 돌아보니, 시스테인은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가벼운 슈미즈 차림이었지만, 그는 제대로 갖춰 입은 셔츠 차림이었다.
“…….”
아니, 나만 벗고 옆에서는 그렇게 정갈하게 차려입고 계시면 난 뭐가 됩니까?
어안이 벙벙해진 리벨이 입을 뻐끔거렸다.
물론 시스테인은 밤을 보낸 후에도 정갈하게 몸을 정리하고 출근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긴 했다.
하지만 옆에서 보자니……
“……아.”
리벨은 그를 보다가 살짝 벌어진 셔츠 틈새를 발견했다.
이불에 덮여 있어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불과 셔츠 사이로 탄탄하게 근육이 갖추어진 가슴이 보였다.
시선을 잡아 가두는 모습이었다.
멍하니 리벨이 시선을 주고 있을 때였다.
“신경 쓰이십니까.”
불쑥 목소리가 울렸다.
“으아아앗!”
화들짝 놀란 리벨이 제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아니, 튀어 오르려다가 허리를 붙잡고 제자리에 엎어졌다.
“…….”
그사이 시스테인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새파란 눈동자는 조금 잠기운이 묻어 있었지만, 취한 것처럼 흐릿하진 않았다.
이벨라 자작이 매일 취해 저택에 들어왔던 탓에 리벨은 그것만큼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제가.”
리벨이 재차 허리를 부여잡는 사이, 시스테인의 그림자가 그녀를 덮었다.
암막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만 아니었다면, 밤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어두운 방.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
리벨이 슬그머니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위에 올라오자 그의 셔츠 안이 온전히 눈에 담겼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눈을 돌리고 있을 때, 시스테인이 물었다.
“이번엔, 어젯밤이 기억나십니까.”
리벨의 얼굴이 조용히 타올랐다.
기억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신혼 방은 따로 있는데 저택 전체는 왜 비우나 했지.
그랬더니 계단에서…….
계단에서…… 하게 될 줄은 몰랐지!
리벨의 머릿속에 비명 삼중창이 울려 퍼졌다.
시스테인은 힘 좋은 사람이었다. 여러모로.
“…….”
리벨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열기에 눈을 뜨기 힘들었던 어젯밤이었지만 분명히 기억나는 건 있었다.
일단 그녀는 이 4층 침실까지 걸어 들어오지 않았다.
애초에 복도 바닥에 발조차 닿지 않은 듯했다.
지나온 곳에는 옷가지만 있었을 뿐이었다.
……물론 그건 지금쯤 치워졌겠지만.
“네…….”
리벨은 결국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주 선명하게 기억났다.
시스테인은 얼굴이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에게 물었다.
“어떠셨습니까.”
이제 리벨은 얼굴에 피가 몰려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걸 물어봐요?
간밤에 가까워져서 그럴까, 마음의 거리도 훨씬 가까워진 듯했다.
무엇보다……. 열기에 달아올랐던 그의 얼굴과 밭은 숨결이 지금도 떠올랐다.
“…….”
지금도 그렇고 어젯밤도 그렇고, 단둘이 있을 때에는 묘하게 표정이 부드러워지는 느낌이란 말이야.
착각일까?
리벨이 답도 잊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시스테인의 단정한 얼굴은, 들숨과 날숨이 아니었다면 시간이 멈춘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미동이 없었다.
그는 그저 그녀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람은 정말……, 무슨 마음으로 나와 결혼까지 한 걸까.
리벨은 그의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제 정말 물릴 수도 없는데.
“……시스.”
리벨이 입을 열었다.
“네.”
바로 답이 돌아왔다.
리벨은 잠시 고민했다. 신혼 첫날 아침부터 물어보긴 뭐한 말이지만, 지금 말고는 물어볼 기회도 없을 것 같다.
결론을 내린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저하고 결혼하셨어요?”
세이프티 바에서의 일이야 없는 일인 척할 수 있었을 텐데.
질문을 들은 시스테인은 그녀를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불쑥 물었다.
“로맨틱한 신혼 아침을 원하십니까?”
“……?”
리벨이 그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해 눈을 깜빡일 때였다.
시스테인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말하겠습니다. 첫눈에 반했다고.”
저기, 영혼이 없는데요?
“…….”
“…….”
침묵 사이로 시선만 오갔다. 결국 시스테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당신을 이용하는 겁니다.”
또 이용한다고 한다. 리벨은 눈을 가늘게 떴다.
대체 디란타 대공씩이나 되는 사람이 나를 이용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뭐라고, 이용한다고 할까?
리벨이 눈썹을 치켜올렸을 때, 시스테인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대가 없는 거래는 없으니.”
그가 리벨에게 몸을 기울였다.
귓가에 야릇한 숨결이 쏟아졌다.
“얼마든지, 원하는 걸 말하세요. 내가 원하는 건 당신밖에 줄 수 없으니.”
“……그게 뭔데요?”
묘한 긴장감과 찌르르하게 올라오는 야릇함에, 리벨의 답은 한 박자 늦게 튀어나왔다.
시스테인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건 비밀입니다.”
가까이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저 벽안이 대체 무슨 생각을 담고 있는지 모르겠다.
리벨은 저를 담고 있는 눈동자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대신 무엇이든 말하세요. 원하는 걸.”
시스테인은 그런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게 권력이든, 명예든, 복수든, 아니면,”
그의 손이 리벨의 머리 위를 부드럽게 감쌌다.
“……!”
리벨은 닿아 오는 열기에 아랫배가 저릿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젯밤이 떠오르는 열기였다.
시스테인의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제와 같은 밤이든, 뭐든 내어 드릴 테니.”
리벨이 눈을 크게 뜨는 순간, 그가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춰 왔다.
* * *
깊은 밤 같은 오전을 보내고, 눈을 뜬 리벨은 위기를 느꼈다.
아무래도 문제의 고자 기사를 쓴 게 나인 걸 들키면 안 될 것 같다.
물론 전에도 들키면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지만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이 사람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으니까!
그녀는 그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그녀가 쓴 기사는…… 아주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
리벨은 저를 가두고 있는 단단한 팔을 내려다보며 필사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벨이란 이름을 차라리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아냐, 오히려 갑자기 버리면 의심받지 않을까?
리벨 이벨라, 아니, 리벨 폰 디란타가 결혼하자마자 갑자기 사라진 귀족가의 폭풍!
벌써 수상하잖아!
역시 좀 있다가 없애는 게……. 리벨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언제든 어쨌든 간에 없어져야 돼!
자신이 벨인 건 절대, 절대 비밀로 유지해야 했다. 무덤에도 못 쓸 비밀이었다.
하루가 넘도록 시달린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아.’
……물론 시달렸다고만 표현하기에는, 너무 좋았다.
그런 기사를 쓴 게, 정말 너무 미안할 정도로. 원래도 미안했지만 더더욱…… 미안할 정도로!
‘부부의 의무를, 이행할 뿐입니다.’
그리고 시스테인 역시도 그렇게 말하면서도, 달뜬 얼굴로 그녀를 안았다.
그 역시 그 시간을 즐겼다는 뜻이리라.
긴 밤, 그는 아주 살짝 웃기도 했고 입술을 깨물기도 했으며, 짧은 숨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 숨은 인내이기도 했고, 달뜬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
리벨은 간밤의 그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역시 그는 감정을 극도로 감추는 것일 뿐이다. 대체 왜 그러는지는 몰라도.
그리고 밤에는 그 자물쇠가 아슬아슬하게 풀려, 문틈으로 그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쇠사슬이 걸려 아직은 제대로 열리지도 않는 문틈으로, 작은 빛이 새어 들어가 윤곽이 보이는 듯했다.
“…….”
리벨은 가만히 시스테인을 올려다보았다.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더욱 의문이 들었다.
내내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것 같은 낮의 모습과는 달리,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은 생각보다 평온해 보였다.
대체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내가 살짝 엿본 문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
처음에는 리엔 황태후의 강요 아닌 강요에 휩쓸려 알아내려고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슬슬 정말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함께 보낸 밤뿐만 아니라 같이 있을 때마다 틈틈이 보이는 그의 모습은 얼음 같다는 세간의 평가와는 많이 달랐다.
은근한 배려가 묻어나는 그의 손길은 생각보다 온기 있고 따뜻했다.
그걸 본인이 감추려 할 뿐이지.
그가 걸어 잠그고 있는 문 안에는, 얼어붙은 맹수가 아니라 생각보다 따뜻한 무언가가 잠들어 있을지도 몰랐다.
대체 뭘까.
대체 무엇을, 왜 감추고 있는 걸까. 리벨은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
아직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