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하지만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마주해야 하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디란타 대공비의 사교계 데뷔.
그건 이미 사교계에서도 뜨거운 화제가 되고 있을 터였다.
디란타 대공비가 데뷔 무대를 어디로 선택할 것인가?
지금까지 연회를 단 한 번도 연 적이 없던 디란타 대공가에서 연회를 직접 주최할 것인가?
“으으!”
사교계에 취재 한두 번 간 것도 아니고, 무슨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지 짐작이 가니 리벨은 더 돌아 버릴 노릇이었다.
“사교계 데뷔는 해야지, 그래.”
그런데 거기서 하하 호호 하는 거 진짜 안 맞는데!
“아니야…….”
리벨은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가야 하는 거라면 마음 편하게 가면 좋잖아?
그래, 특정 잡으러 가는 취재 현장이라고 생각하자!
지금까지는 시종 같은 걸로 잠입해서 들어가야 했다면, 이제는 완벽하게 손님으로 참여할 수 있지 않은가?
완전 이득이지!
―불끈!
주먹을 쥐었던 리벨은 곧 어깨를 늘어뜨렸다.
“……가기 싫다.”
그래도 가기 싫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신혼부부들처럼 달콤한 신혼 생활을 보낼 수 없다더니, 시스테인은 생각보다 그녀와 오래 붙어 있었다.
게다가 그는 신혼을 위해 며칠 동안 휴가를 내기까지 했다.
“가주님께서 혼인 전에 바쁘게 일하신 이유가 이 휴가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리벨은 그 휴가가 끝난 날에 그 소식을 들었다.
“……그랬구나.”
아니, 어쩐지 사람이 피곤해 보이더라.
리벨은 볼을 긁적였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애를 썼으면 좀 생색도 내면 좋을 텐데.
남 좋은 일만 열심히 해 주고 가는 게 어디 있어?
리벨은 조금 차게 식은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그의 어머니, 리엔 황태후가 원하는 것이 이런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의 말대로 원하는 게 있으면 원한다고 말하고…… 물론 갖지 못하는 건 없을 디란타 대공이지만.
사람을 위해서 마음을 썼으면 돌아오길 기대해 보기도 하고.
그런 사소한 것들을 원하셨던 게 아닐까.
리벨은 리엔의 마음을 조금쯤 알 것 같았다.
“보통 귀족가의 별장은 말 그대로 별장의 의미를 지닙니다만, 이 디란타 별저는 조금 특별합니다.”
그러는 사이 집사 헬리아는 디란타 대공가의 일에 대해 천천히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대공령의 본저만큼 규모가 있는 저택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가주님께서 오래 머무시는 장소이니만큼…….”
결혼 전 며칠 동안 시간을 내기 위해 애쓰고, 시간을 내고서도 생색 한번 안 낸 남편 덕에 리벨은 마음이 좀 시렸다.
그래도 고맙다는 한마디는 안 듣고 싶은가?
그 덕에 헬리아의 말은 반쯤 그녀의 머리에 닿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쯤이었다.
“마님,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이벨라 자작저에서 그녀를 따라온 것들이 있다면, 나인을 포함한 황태후의 그림자들이었다.
그들은 이벨라 자작저의 하인과 하녀들로 위장해서 들어왔지만, 시스테인이 그들의 정체를 모를 것 같진 않았다.
리벨은 나인이 내민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
“아직 초대는 받고 싶―”
[내 사랑스러운 아가에게.
-리엔]
리벨은 발신인을 보자마자 하던 말을 바꾸었다.
“―었지. 때마침 초대가 필요했지, 응.”
아니, 갑자기 초대하시는 게 어딨어요?
리벨은 재빨리 초대장을 열어 보았다.
[시간이 난다면 황성에 들르지 않을래? 시스와 함께 온다면 더 좋겠구나.]
혹시 안 가면 제 상여가 황성에 들르게 되는 건가요?
리벨은 거절할 수 없는 초대장을 슬그머니 접었다.
* * *
“어머, 신혼인데 괜찮아? 무시해도 괜찮았는데.”
리엔은 그날 오후 바로 달려온 시스테인과 리벨 부부를 아주 반가워했다.
리벨은 그녀의 호들갑에 가까운 안내를 받으며 중얼거렸다.
“무시했다간 제 장례식이 열릴 것 같아 가지고…….”
그러다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허어업! 정신이 빠졌어! 무슨 말을!
“…….”
시스테인은 그런 말을 하는 제 아내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엔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아가가 내가 많이 편해진 모양이야. 그렇지, 시스?”
그녀의 말에 시스테인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하지만 리벨은 손을 내저었다.
“아아아닙니다.”
왠지 전생에서 ‘내가 많이 편해졌나 봐? 응?’ 하면서 굴리던 선배 기자들이 생각나는 살벌한 말이었다.
하지만 리엔의 눈은 왠지 모르게 순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가 예쁘게 웃었다.
“내 아들의 아내인데, 그럼 내 딸이나 다름없지. 난 내가 아가에게도 어렵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 아들에게 그렇듯이.”
그녀가 시스테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두 사람은 리엔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응접실로 향했다.
푹신한 소파에 앉힌 후 쿠션까지 손수 안겨 준 리엔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 어때, 신혼 생활은?”
그 말에 시스테인이 리벨을 돌아보았다.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저는 왜요? 설마 저더러 답하라고?
리벨이 입을 뻐끔거릴 때였다. 시스테인이 신중한 얼굴로 말했다.
“……리벨이 만족스러워하시는 것 같아 기쁩니다.”
그 말에 리엔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녀는 시스테인을 보면서 웃고 있었다.
하긴, 장족의 발전이었다.
보고서 제출 안 한다고 한 게 어디야!
리벨이 속으로 머리를 싸맬 때, 황후의 화사한 미소가 리벨을 향했다.
“어머, 세상에. 우리 아가.”
그녀의 손끝이 리벨의 볼을 매만졌다.
거듭 이어진 향유 마사지와 최고급 피부 관리로 이전과는 달라진 피부였다.
리엔이 빙그레 웃었다.
“밤이 아주 긴가 보구나.”
“으아앗!”
리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그런 거 대놓고 물어보지 말라고요!
더 민망한 건 시스테인은 옆에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찻잔을 들었다는 점이었다.
아니, 범인(?)은 시스 당신이잖아!
리벨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을 때였다.
“아가?”
리엔은 의아한 얼굴로 리벨을 살폈다.
“혹시 시스가, 괴롭히기라도 하는 건 아니지?”
그 말에 리벨은 입을 뻐끔거렸다.
지금 이 순간 금붕어하고도 교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리벨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답했다.
“그럴 리가요.”
그게 괴롭힌다면 괴롭히는 거고, 아니라면 아닌데, 아니 괴롭진 않으니까 괴롭힌다고 할 순 없는…….
리벨이 속으로 민망한 말을 주워섬길 때였다.
리엔 황태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대공비 생활에 불만은 없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이번 초대의 의도는 저 질문이었던 모양이었다.
리벨의 표정이 조금 폈다.
“당연히 불만은 없죠!”
“있으십니다.”
그런데 그녀와 동시에 답한 시스테인은 그녀와 다른 답을 내놓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리엔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
“어떤?”
“어어없는데요?”
없는데? 진짜 없는데요?
리벨의 간절한 시선이 시스테인을 향했다.
시스테인이 입을 열었다.
* * *
“……아하, 그런 문제였구나. 나는 또 대공저가 불편해서 그런 줄 알았지.”
시스테인의 이야기를 들은 리엔 황태후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간신히 웃음을 찾은 건 리벨도 마찬가지였다.
“사교계 초대장이 좀 많이 올 거라곤 생각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저, 저도요.”
리벨이 진땀을 뺐다.
아니, 사교계 초대장이 온 게 불만은 아니었거든요?
나란히 앉아서 장작으로 썼으면서! 그걸 불만이라고 지금 이 순간 이렇게 말씀하시면 오해가!
하지만 리벨은 그런 말을 해 주는 시스테인이 고맙기는 했다.
그다운 말이기도 했다.
……표현하지는 않을 뿐, 사람을 세심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보다 대하기 편한 사람들로 바뀐 사용인들도 그렇고, 휴가 문제도 그렇고, 이런 초대장 문제까지.
조금 마음이 달콤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리벨은 잠시 시스테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무튼 어느 사교계 파티에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리벨은 그 얼굴에 신경을 빼앗겨, 말할 타이밍을 놓칠 뻔했다.
정신을 차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번이 디란타 대공비로서 처음 참여하는 연회가 될 테니까요. 아무 곳에나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갈 수는 없고…….”
리벨의 말에 리엔이 여유롭게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그건 내가 골라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녀의 얼굴에 순식간에 즐거움이 깃들었다.
“가져온 초대장은 있니?”
그 말에 시스테인이 곧바로 답했다.
“모두 태웠습니다.”
아니, 그걸 그렇게 이실직고하시면! 리벨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아니나 다를까, 리엔 황태후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사교계에서는 회신하는 것을 매너라 할 텐데. 원래는 회신하지 않았니?”
원래 회신하셨다고? 리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래 다 장작으로 쓰신 거 아니었어?
하지만 아니었던 듯했다. 시스테인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리벨이 회신하길 부담스러워했습니다.”
그걸 알고…… 일부러 그러신 거라고? 리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엔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어머나, 그럼 아가 때문에 너도 회신을 안 한 거구나, 그렇지? 응?”
기대에 찬 시선이 시스테인을 향했다. 옆에 있는 리벨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그러자 시스테인의 표정이 거짓말같이 굳어 버렸다.
“…….”
그는 답하는 대신 찻잔을 다시 드는 쪽을 택했다.
“아가 부담스럽지 말라고 태운 거야. 그렇지?”
리엔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미소 지었다.
“우리 아들이 이렇게 딱딱해 보여도, 생각보다 딱딱하지만은 않아.”
리엔의 말에, 시스테인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그러는 사이 리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그 말에는 시스테인의 시선이 리벨에게로 향했다.
“휴가도 일부러 내주셨다고 들었거든요.”
“들어?”
“네. 집사한테요.”
리엔이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찻잔을 들고 있는 것도 잊었는지 재차 물었다.
“시스가 결혼 몇 주 전부터 신혼 휴가를 내야 한다고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는데. 그걸 네게 말을 안 했다고?”
“……어머니.”
시스테인이 그녀의 말을 막듯이 리엔을 불렀다.
하지만 리엔은 그에게 손을 펴 보였다.
“이런 건 생색을 내야지.”
“……굳이 생색내려 한 일이 아닙니다.”
“생색내려 한 일이 아니라도 고맙다는 말은 듣고 싶었던 거 아니니?”
리엔의 반짝이는 눈이 시스테인을 향했다. 시스테인은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리벨은 며칠 동안 저택에서 봤던, 그의 조금쯤 풀어졌던 것 같은 얼굴이 더 딱딱하게 굳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굳은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