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원래 인생은…… 줄을 잘 서야 하는 법이다.
한국에서든 이곳에서든 리벨은 그 사실을 아주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리벨 자신은 이번 생에, 리벨 폰 디란타로서 아주, 줄을 잘 선 케이스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제국 황가와 연이 있는 것도 모자라 최고의 남편감에, 제국을 손아귀로 뒤흔드는 황태후 리엔의 비호까지.
단언컨대 이 제국에서 그녀만큼의 뒷배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고 했던가?
줄 서는 데에 그리도 관심이 많던 롤란드 디엘렌은 썩은 동아줄을 잡아서 절벽에서 똑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의전원에 그렇게 전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리벨이 슬그머니 물었다. 설마 바로 쓱싹하는 건 아니죠?
의전원에 황태후 리엔의 손이 닿아 있는 걸 아는 그녀는 당연히 그 가능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에 시스테인은 리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불쑥 그녀를 불렀다.
“리벨.”
“네?”
리벨의 답에 그가 다시 한번 리벨의 이름을 불렀다.
“리벨 폰 디란타.”
디란타 대공비. 그가 재차 입을 떼었다.
“이게 리벨의 위치입니다. 리벨을 욕보인 자들은 그에 걸맞은 대가를 받게 될 겁니다.”
그의 서늘한 시선이 크라이베리 신문 위로 향했다. 마치 대결 구도처럼 가운데에 대각선을 두고 베니카 알레로와 롤란드 디엘렌의 사진이 박혀 있었다.
그의 시선이 두 사람의 사진을 보다가, 리벨에게로 향했다.
“―리벨의 뜻에 따라서요.”
그 말에 리벨의 불길함이 한층 심화되었다.
“주주죽는 건 아니죠?”
물론 죽여 버리고야 싶었지만 현대 한국의 기억이 있는 탓인지 이 동네에서 사람이 픽픽 죽어 나가는 거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리벨의 목소리에 시스테인은 가볍게 답했다.
“원하신다면 사고사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되는 거냐고! 리벨이 홱홱 고개를 저었다.
“저어어어는 그,”
물론 죽여 버리고 싶지만! 콱 뒈져 버렸으면 좋겠지만! 그게 내가 죽이라고 명령하는 꼴이라고 생각하니까 좀……!
리벨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그러다가 한 가닥의 구원의 실타래를 잡아냈다.
이때다, 황태후 폐하의 파멸론!
“그 사람들이 빨리 죽길 원하지 않아요. 좀 더…….”
More…….
“더, 힘들었으면 좋겠거든요.”
그 말에 시스테인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댁은 또 뭘 이해해???
“아, 그러시다면.”
그는 짧게 답까지 하고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아무리 현 황가에서 가장 온화한(?) 성정을 타고났다고 알려져 있어도, 리엔 아래에서 폭군 카리스와 함께 자란 사람이었다.
아내를 욕보였던 적의 목숨을 빼앗는 것에 거부감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리벨이 그들에게 더한 공포를 심어 주고 싶으시다면.
그는 리벨의 생각을 이해한다는 뜻으로 다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리벨은 그런 그를 살피면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뭘 이해해서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거죠? 지금 경의 머릿속에서 어떤 살벌한 계획이 굴러가고 있나요?
취조하듯 묻고 싶었지만 기자 의심을 받을까 싶어 리벨은 눈만 굴렸다.
그러다가 크라이베리 신문 한쪽 구석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어?”
리벨은 하던 생각도 말고 덥석 신문을 집어 들었다.
[디엘렌 가의 불법 세금 징수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리벨이 본 건 신문 기사였다.
[귀족가와 상업계는 연일 디엘렌 가의 불법 세금 징수 문제로 뜨겁다.
특히 디엘렌 가가 시장에서 불량배들을 섭외해, 뒤로 돈을 갈취했다는 익명의 증언들이 이어져…….]
내용이야 물론 다 아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기사를 올린 기자의 이름이 걸작이었다.
[슈 기자]
리벨은 심각한 생각을 했던 것도 잊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사이 안 좋네.”
이야, 팀킬 끝내준다! 더티하게 논다!
무릎을 치고 웃으려던 리벨은 시스테인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아는 기자입니까?”
시스테인의 질문에 리벨은 입이 딱 달라붙어 버렸다.
안다면 알고 모른다면 모르는 것이……, 아니, 무엇보다 귀족 영애가 기자를 개인적으로 아는 것 자체가 이상해!
리벨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아아아뇨, 개인적으론 모르고요. 당연히 모르고요.”
리벨은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부인했다. 그리고 슈의 기사를 가리켰다.
“그, 이 기자 기사는 다 챙겨 보거든요. 워낙 그, 눈에 띄어 가지고.”
“아.”
시스테인은 이해한다는 얼굴로 말을 받았다.
“제게 벨 기자가 그런 것처럼, 말씀이십니까?”
“쿨럭!”
기습의 효과는 굉장했다! 리벨은 좀 전에 먹은 식사가 넘어올 것 같았다.
“그그렇다고 할 수 있죠! 넵.”
내 기사 이렇게 관심 있게 보세요? 혹시 나처럼 이렇게 감정 담아서 보세요?
아니, 감정 담으실 만하지…….
리벨은 정말 울고 싶었다.
그러니까 사람은 한 치 앞도 모르는 미래를 위해서라도 착하게 살아야 하는 법이다.
양심에 찔리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군요.”
시스테인이 다시 말을 받았을 때였다.
“마님, 나인입니다.”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리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인 경? 들어와.”
리벨은 의아한 얼굴로 답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시스테인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이벨라 자작가엔 기사라 할 자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자작가 사람들인 것처럼 데려온 자들은 모두 황태후 리엔의 그림자들일 터였다.
그 사실을 아는 그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자에게는, 이름이 없을 텐데?
하지만 나인이라 불린 자는 자연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와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뭘 가져왔다는…… 아!”
리벨은 눈을 크게 떴다. 나인이 들고 있는 편지지를 보고서였다.
시스테인이 보기엔 평범하기 그지없는 편지지였다.
“그거! 그거 왔구나!”
하지만 리벨이 보기에는 확실히 크라이베리 신문사를 통해 전해진 제보였다.
벨 기자에게 전해진 제보. 저 편지지에 저 익숙한 사인이라면 한 곳밖에 없다.
크라이베리 편집부.
“앗, 잠시.”
근데 이걸 뭐라고 설명하지? 리벨은 시스테인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반기는 편지지가 무엇인지, 시스테인은 궁금해하는 기색이었다.
그렇다고 귀족가 편지지라고 거짓말할 수도 없고.
이럴 땐 역시…… 95%의 진실과 5%의 거짓말!
“제 취미…… 그 직업하고 관련된 편지예요.”
정확히는 제보지만. 리벨은 뒷말은 당연히 삼켰다.
“아.”
시스테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리벨은 그를 살폈다.
“잠시 보고 와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시스테인은 가볍게 답했다. 부부라고 해서 개인의 취미에까지 관여할 권리는 없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럼 잠시 다녀올게요.”
휴, 뭘 안 캐묻는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다행이고…… 좀 많이 양심에 찔렸다. 리벨은 슬그머니 눈을 굴리다가 헬리아를 보고 정신을 차렸다.
“아, 헬리아. 혹시 오늘 내 일정이 어떻지? 오후 일정이 따로 있던가?”
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일정은 오전 일정만 종료하신다면 없습니다.”
“그럼 오전 일정을 오후로 미뤄 줘.”
리벨이 얼굴에 화색을 띠며 말했다. 그때 시스테인이 불쑥 물었다.
“바깥으로 나오라는, 편지입니까?”
뭔 편지인지는 몰라도 나오라는 말에는 민감하다니, 이상한 사람이네!
리벨은 울 것 같은 표정을 감추며 말했다.
“아, 아마도 그럴 거 같아요.”
제보받으러 그럼 기자가 뛰어가야지 사람이 찾아올 리가. 리벨이 반쯤 우는 얼굴을 감추고 있을 때였다.
시스테인이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대공비를 감히 불러내는 자가 있다는 말이군요.”
서늘하게 가라앉은 말에 리벨은 기겁했다.
잘하다가 내일 크라이베리 신문사가 없어지게 생겼다!
“아, 제가 밖에서 하는 그, 일이 제가 신분을 감추고 하는 거거든요.”
리벨이 슬그머니 웃었다. 굳이 대공비 아니라도 귀족이라면 일단 직업을 갖기가 힘든 게 사실이었다.
대부분 이런 ‘활동적인 취미’를 가진 귀족 영애들이 가명을 쓰기도 한다는 건, 귀족가에서 한때 유행이었으니 시스테인도 이상하게 여기진 않을 터였다.
“……이전에 자작가에 계실 때 하시던 일 말씀이시군요.”
시스테인이 가볍게 말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생업이 있었다고 했다.
이벨라 자작, 그 한심한 자에게 돈이 다 들어가고 말았지만.
“네.”
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스테인은 그 얼굴을 보며 기묘하게 마력이 들끓는 것을 느꼈다.
이건 그녀와 접촉해서가 아니었다. 제가, 조용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 열기의 출처는 관심이었다.
이전에는 그녀가 무슨 일을 하든 별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물론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지만 조금 더……, 관심이 갔다.
“자작가에 계실 때부터 아예 귀족임을 감추신 겁니까.”
자작 영애인 것은 밝힌 건지, 아니면 평민으로 활동하는 건지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 말에 리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모셔지면서 일을 어떻게 하겠어요.”
그녀가 눈을 찡긋했다. 귀족가에서야 자작가는 하급 귀족이지만 평민들과 함께하는 일자리에서는 달랐다.
“…….”
시스테인은 그녀의 말에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리벨이 디란타 대공비로서 영지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그녀는 결혼 전에 이미 취미가 있다고 했었다.
당연히 그의 입장에서 걸리적거릴 일은 없었다.
하지만 자꾸 마음에 뭔가 걸렸다. 자꾸 캐묻는 것 같은 자신을 느끼면서도, 결국 그가 물었다.
“무슨 일을 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리벨이 우뚝 굳었다.
뻐끔…… 뻐끔…… 오늘따라 금붕어가 친구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기자라고 솔직히 깐다면?
리벨은 순간 갈등이 들었다. 자꾸 거짓말하는 것도 양심에 찔리던 참이었다.
물론 기자일 순 있다. 하지만 꼬리가 더 밟혀서 벨이란 게 만약 밝혀져 버린다면?
구구구굳이 벨이라는 재앙으로 향하는 힌트를 이 사람에게, 줘야 할까?
그건 결혼 생활 파탄의 지름길이 아닐까요? 결혼 생활 유지를 위해서 비밀을 밝히는 게 아니라 결혼 생활 파탄을 위해서 밝히는 꼴이 되는 게 아닐까요?
팽팽 머리를 돌린 끝에 리벨이 웃었다.
“그…….”
“그?”
시스테인은 답을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리벨은 슬그머니 말했다.
“좀 많이 돌아다니고, 나쁜 사람은 신고하는 그런 직업이죠.”
이게 대체 뭔 설명이냐? 리벨은 제 머리를 붙잡고 흔들고 싶었다.
급하면 아무 말이나 튀어나오는 이놈의 입! 입을 그냥 확! 제 입도 때리고 싶었다.
“돌아다니면서 나쁜 사람을……?”
시스테인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멈칫했다.
순간 침묵이 흘렀다.
그래, 아무리 이 사람이 무덤덤하기로서니 너무 수상한 설명 아니었을까? 리벨이 뭐라고 입을 우물거리려는 순간이었다.
“그럼 더 묻지 않겠습니다.”
어? 리벨은 의외의 상황에 눈을 깜빡거렸다.
시스테인은 그녀에게 살짝 묵례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러더니 그는, 그녀를 아주 쿨하게 보내 주었다.
“다, 다녀올게요……?”
아니 감사하긴 한데 뭔가 찜찜한데? 리벨은 눈을 굴리다가, 일단 재빨리 자리를 빠져나갔다.
뭐지? 대체 뭐지? 설마 기자인 거 들킨 거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