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리벨이 나간 후, 시스테인은 한참 후에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어머니께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황태후의 그림자 중 하나가 그의 앞에 소리 없이 나타났다.
“하명하십시오.”
역시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스테인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의전원에서, 디엘렌 가와 알레로 가 건에 대해 어머니께 의견을 구한다고 들었는데.”
시스테인은 리벨이 나간 자리를 보면서 말했다.
“리벨이, 두 가문 모두 곤란해지길 원하신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그림자는 바로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떴다.
시스테인은 가만히 리벨이 나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리벨은 아직 자신이 어떤 위치를 가지게 됐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 자들에게 긴장하실 필요 없는데.”
그가 뇌까렸다.
연회장에서 마력이 들끓었던 것이 떠올라,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제 마력을 가라앉혀 주는 신기한 능력을 지닌 사람.
대체 왜인지는 그도 몰랐다. 여러 가지 체질을 타고나는 사람이 있고, 자신이 마력을 타고났듯 그 반대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우연히 만날 줄은 몰랐다.
어쨌든 만난 이상, 놓칠 생각은 없다.
시스테인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그냥 좀 많이 돌아다니고, 나쁜 사람은 신고하는 그런 직업이죠.’
리벨의 그 말.
시스테인은 그녀의 직업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가 아는 직업 중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리벨에게 더 묻지 않았다.
―쿵쿵.
그가 다시 책상을 두드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대공가의 기사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정확히는 대공가의 기사라는 위치만 가진 자가 아니라, 시스테인 휘하의 또 다른 ‘기사단’ 소속의 기사였다.
신분을 감춰야 하기에 대공가에 소속되어 있을 뿐.
“부르셨습니까?”
낮은 목소리로 들려오는 말에, 시스테인은 그를 돌아보았다.
“……리벨이 혹시,”
그는 조심스럽게 제가 짐작한 정체를 입 밖으로 뱉어 냈다.
“감찰기사단의 조력자였나?”
그 말에 대공가의 기사, 아니, 감찰기사단 기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찾아볼까요?”
그의 표정이 심각해지는 건 당연했다.
감찰기사단의 조력자와 감찰기사단장이 결혼을?
이게 사실이라면 우연도 그런 우연이 없었다.
물론 상대가 제 정체를 밝히기 전에는 서로가 정체를 모르는 게 맞았다.
게다가 감찰기사단에게 정보를 전해 주는 전국 각지의 ‘조력자’들도 감찰기사단장의 얼굴은 당연히 몰랐다.
조력자가 감찰기사단에서 아는 얼굴이라고 해 봐야 평단원 한두 명의 얼굴만 아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건 감찰기사단과 조력자 양쪽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그들은 때로는 권세 높은 귀족가의 뒤를 캐어 정보를 전달해 주기도 하니까.
시스테인은 찾아볼까요, 하는 기사의 말에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녀가 감춘다면 굳이 알아보는 건 감찰기사단장과 조력자 사이에서도,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도 예의는 아닐 터였다.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롤란드 디엘렌…….”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롤란드 디엘렌의 기사가 떴던 것이 불쑥 그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때도 리벨은 바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고 했다. 아마 그녀의 ‘일’을 하기 위해서였겠지…….
“너무 비약인가.”
그가 뇌까렸다.
분명 롤란드 디엘렌의 불법 세금 징수에 대해 처음 기사를 쓴 건 벨 기자였다.
그 기사에는 분명히 출처가 명시되어 있었다.
[외부 제보에 의하면…….]
그 출처가 진짜인지는 알아봐야겠지만, 만일 그 제보를 리벨이 해 줬다면?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감찰기사단에 롤란드 디엘렌에 대한 정보를 전해 준 것도 익명의 조력자였다.
만일 리벨이 감찰기사단에 정보를 전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벨 기자에게도 제보했다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정보가 아님에야 감찰이 아닌 다른 곳에도 정보를 전하는 건 조력자의 마음이니, 그렇다면 벨 기자가 갑작스럽게 롤란드 디엘렌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는 게 말이 된다.
“그렇다면.”
시스테인이 고개를 기울였다. 리벨이 조력자일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신경 쓰였지만, 그녀가 정말 감찰기사단의 조력자라면…….
리벨은, 벨 기자의 얼굴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시스테인은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 * *
시스테인이 생각에 빠진 사이, 리벨은 양심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직업을…… 그냥 깔까?”
그녀는 제게도 간신히 들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고개를 홱홱 저었다.
“아니지.”
깠다간 내 머리도 까이게 생겼다! 리벨은 머리를 싸맸다.
하지만 사기 결혼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내가 황태후 폐하의 부탁(?)으로 결혼을 승낙했다지만, 그건 리엔 폐하와의 문제고 시스테인과는 별개의 문제잖아!
으아아악! 으아아악!
리벨은 머리를 싸맸다가 고개를 다시 흔들었다.
“그거나 보자.”
고뇌하는 사이 방에 도착한 리벨이 나인을 돌아보았다. 나인은 머리를 볶아 대는 그녀를 보면서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였다.
“크라이베리 제보 장소에 있었던 거, 맞지?”
리벨은 확인하듯 물었다. 나인이 ‘그 장소’라고 언급할 장소라고 해 봐야 한 곳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그곳을 통해 크라이베리에 기사를 기고한 후, 리벨은 나인에게 그곳이 제 기고 공간임과 동시에 크라이베리 편집부 측에서 그녀에게 말을 전달하는 통로란 걸 알려 주었다.
그 후 나인이 그곳을 틈틈이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예. 상자 위에 올려져 있었습니다.”
나인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제보가 확실하다. 리벨은 그에게 편지를 건네받아 열어 보았다.
[안녕하세요, 벨 기자님. 저는……]
인사로 시작되는 예의 바른 편지는 확실히 제보가 맞았다. 게다가 밑에 크라이베리 편집부가 먼저 검토했다는 인장이 찍혀 있었다.
흔히 말하는 ‘거물급’ 기자들과 다수 거래를 트고 있는 크라이베리 편집부는 이렇게 기자를 지정한 제보도 대리해서 받아 주고 있었다.
제보가 필요한 사람이 크라이베리에 편지를 전달하면, 내용을 확인 후 적절하다 판단될 시 해당 기자에게 편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물론 그 제보를 받은 기자가 취재를 나가느냐는 기자의 마음이었다.
“흐음.”
리벨은 편지를 훑어보면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편지를 읽을수록 그녀의 얼굴은 서서히 구겨지고 있었다.
“내가 별의별 제보를 다 받아 봤는데…….”
그녀는 편지를 다 읽고 결론 내렸다.
“이건 아주 베이직하게 구린 케이스네.”
그녀가 편지를 재차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격 담합?”
그녀의 중얼거림에 나인의 시선이 살짝 편지에 닿았다 떨어졌다.
리벨은 봐도 된다는 뜻으로 그에게 편지를 들어 보였다.
어차피 황태후 폐하의 기사인 데다 같이 취재도 나갈 것 같은데, 내용을 모르면 안 되지.
나인의 시선이 편지를 향했다.
[……처음에는 소금값만 오르는 듯했는데, 아시다시피 소금값이 오르면 음식값도 오르지 않나요? 그럼 당연히 사람을 쓰는 데에도 영향이 가서…….]
제보의 내용은 요컨대 소금 가격을 담합해 버린 근처 거대 상단 때문에 일대의 물가가 오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자금이 제대로 뒷받침되지 못하는 상가는 벌써 문을 닫고 있는 실정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소금값이 많이 오르는 게 기분 탓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상인들도 다 알고 있는 데다 멀리 떨어진 지역의 소금값은 그대로더군요.
저도 이 지역 토박이로서 30년 넘게 장사를 해 왔으니 소금값이 유동적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유가 있어야 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번 소금값 급등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이건 직접 가서 이야기해 봐야겠는데.”
리벨은 편지를 흔들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방 한쪽으로 걸어가 지도를 펼쳤다.
제국령이 모두 표시되어 있는 지도였다.
이건 가문의 안주인으로서도, 귀족으로서도 가지고 있는 게 당연한 물건이었다.
물론 리벨은 기자로서 더 많이 쓰는 물건이었지만.
“투라 영지가 어디에 있더라.”
문제의 편지를 보내온 사람은 투라 영지의 상인이었다.
지도를 살펴보던 리벨은 마침 디란타 대공저와 멀지 않은 거리에 투라 영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정도 거리면 당일치기 가능하지 않을까?”
리벨이 대공저의 위치와 투라 영지를 번갈아 가리키며 물었다. 나인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충분히 가능한 거리입니다. 준비할까요?”
“지금 바로?”
리벨의 말에 나인이 고개를 숙였다.
“원하신다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면 좋기야 좋은데……. 리벨은 편지를 훑어보았다.
편지 내용에 따르면 투라 영지는 7일장이 열리고, 이 편지가 온 건 5일 전이었다.
상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장이 서는 날짜에 맞춰서 가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바로 나가면 너무 수상하잖아!
리벨은 시스테인을 생각하면서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적당히 내일모레쯤 나가자.”
그때쯤 나가면 장도 서고, 이 일 때문에 나간다는 인상도 흐려질 테니까.
“그때로 준비하겠습니다.”
“좋아.”
리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했다.
이번에는 무슨 모습으로 변신하지? 아니, 그 전에 변신해서 나가는 게 편할까?
대공저에서 나가게 될 테니 대공저 사람들의 눈도 신경 써야 했다.
이벨라 자작저는 지켜보는 사람이 없었으니 마음대로 안팎을 오갈 수 있었지만 이곳, 디란타 대공저는 호락호락하지 않을 터였다.
“……다른 모습으로 나가다가 걸리면 수상한 사람으로 찍힐 것 같은데.”
리벨은 결국 조심스러운 결론을 내렸다.
차라리 당당하게 그냥 나가는 게 낫겠다.
어차피 가문의 안주인이 자리를 비웠는데 대공저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정공법뿐이다!
그렇게 이틀 후는 빠르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