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이틀 후.
리벨이 준비한 건 일단 넓은 챙의 밀짚모자였다. 그리고 적당한 가격의 외출용 드레스를 하나 준비했다.
드레스야 리엔 덕에 평생 사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많았지만 이번에는 그런 비싼 드레스를 입어서는 곤란했다.
“그럼, ‘취미’ 좀 즐기고 올게.”
리벨은 당당하게도 대공저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마차로 향했다.
신분을 숨긴 채 직업을 가졌다고 했으니 당연히 아무 무늬도 없는 나무 마차였다.
“호위 인력 없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집사 헬리아가 물었지만 리벨은 나인을 가리켰다. 나인은 기사답지 않게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미 평민 버전 ON 상태였다.
“원래 이쪽이 호위해 주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알겠습니다. 그럼 어디로 가는지만 알려 주실 수 있으신지…….”
“이 옆 영지. 아실라로 갈 거야.”
그녀의 말에, 헬리아는 조금 걱정스러운 시선이었지만 물러났다.
무슨 생각이신지 몰라도 ‘대공비가 일을 하러 나간다 하면 터치하지 말라’는 대공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리벨은 슬그머니 마차를 타고 나섰다.
헬리아, 거짓말해서 미안해!
하지만 사실대로 투라 영지라고 말할 순 없었다. 얼마 후에 투라 영지에 대해 기사가 뜰 거고, 벨 기자의 이름으로 기사가 뜨니 당연히 시스테인도 볼 테니까.
그리고 기억력 좋은 그가 얼마 전 리벨이 투라 영지를 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
리벨은 벨로 의심받을 상황을 절대 만들고 싶지 않았다.
―덜컹!
그리고 흔들리는 마차에 무사히 올라탄 리벨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들켰겠지?”
다행히 대공저 쪽에서 이상하게 여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나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리벨이 아실라 영지를 향한다고 이야기할 때부터 대공가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본능이 위험을 알렸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따라붙을 것이다.
이미 대공은 대공비 전하의 직업에 관심을 가졌으니까.
놀랍게도, 리벨은 그 무신경한 대공의 관심을 이끌어 낸 것이다.
물론 리벨에게 그건 별로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인의 주인인 황태후 리엔에게는 아주 좋은 일일 터였다.
“…….”
문제는 주인께서, 대공비 전하의 직업을 대공 전하께도 감추라 지시하셨다는 점이다.
나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대공비 전하의 정체를 지켜 내야 한다.
“…….”
나인은 경솔했던 자신을 꾸짖고 있었다.
아무리 대공비 전하께서 ‘제보가 있으면 무슨 상황이든 곧바로 전해 달라’는 명령을 하셨다지만, 대공 앞에서 전한 건 역시 너무 경솔했다.
그는 주인의 명령을 우선해야 한다는 그림자의 가르침에 따랐으면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원래대로라면 가르침에 따라 움직이는 것에 의심을 가지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나인은 기묘하게도 그런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처음 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던 건, 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대공비 전하께서 그의 입에 다짜고짜 빵을 물려 주고, ‘나인’이라는 이름을 줬을 때부터였다.
정해진 대로 살아왔던 삶에 변화가 생긴 것은.
“…….”
나인은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혔다.
대공가에서 사람을 붙인다면, 대공비 전하의 직업을 감추기 위해 무력행사를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의 모든 감각이 바짝 날을 세웠다.
“……?”
하지만 그가 긴장을 몇 시간 동안 해도, 뒤따라오는 자들은 없었다.
리벨이 창문을 연 채 마차 밖의 풍경을 보는 사이에도 나인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져 갔다.
설마, 내가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로 수준이 높은 자가 따라붙은 것인가?
“휴.”
그때 리벨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도 안 쫓아오는 것 같지?”
같은 걱정을 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직까지는…… 제 능력이 닿는 한 쫓아오는 자를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리벨은 그 말에 얼굴을 폈다.
“어쩌다 내가 이 일을 해서.”
그러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인은 문득 그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기자.
확실히 가십의 중심이 되는 귀족이 가지기에는 신기한 직업이긴 했지만 부끄러운 직업은 아니었다.
“……?”
그런데 왜 감추시려는 거지?
디란타 대공이 귀족가의 여인들이란 자고로 정숙해야 한다느니 하는 꼰대 같은 생각을 가진 자도 아닐 텐데.
투라 영지에 도착할 때까지도 나인의 의문은 풀릴 줄을 몰랐다.
하필 그는 리벨을 담당해 조사했던 그림자가 아닌 탓이었다.
게다가 그는 명령이 없으면 그림자들이 머무는 숙소에서 하루 종일 수련만 하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벨 기자가 무슨 기사를 썼는지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한마디로, 그가 머리를 아무리 굴려 봐야 리벨이 왜 직업을 감추는지는 절대 알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것도 모른 채 나인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덜컹!
시스테인은 청력도 좋고 감도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오전부터 저택을 떠나는 마차를 주시했다. 무늬 하나 없는 마차였다.
“……일을 나가시는군.”
정말 조력자이신가? 나름 비밀스럽게 나가시는 걸 보니 확신은 더해져 갔다.
“출근하십니까?”
그런다고 시스테인이 저택에서 그녀만 기다릴 틈은 없었다.
그에게는 ‘감찰기사단장’이라는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직함 외에도, 제도기사단이라는 엄연한 외부 직함이 있었으니까.
시스테인은 헬리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지.”
그렇게 한동안 오전마다, 디란타 가에서는 마차 두 대가 시간 차를 두고 저택을 나섰다.
시스테인은 리벨이 거의 매일 나간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의 ‘취미’에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밝히길 원한다면 밝힐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엇보다 그녀가 정말 조력자라면, 감찰기사단장으로서 그녀의 정체를 드러내게 하는 것 자체가 조력자와의 신뢰를 잃게 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저 자신도 감찰기사단장이라는 자리를 숨기고 결혼했으니, 리벨이 제 직업을 감춘다 한들 그 역시 당당하지 못했다.
……굳이 숨길 생각이었다기보다는 직업 특성상,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에 가까웠지만.
그렇게 며칠이나 지났을까.
“주인님, 주인님 앞으로 사진 몇 장을 보내온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리벨보다 일찍 퇴근해 저택에 돌아온 시스테인 앞으로, 의문의 사진 몇 장이 도착했다.
심각한 얼굴의 헬리아가 건넨 사진을 보며, 시스테인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건…….”
그건 다름 아닌, 리벨의 사진이었다.
주변을 살피며 마차에 올라타는 그녀의 모습.
한적한 밤거리를 오가는 모습이나, 어떤 평민의 집 안에 들어가는 모습.
그녀가 조력자라면 이상한 모습도 아니었다.
시스테인이 헬리아를 쳐다보았다.
“달리 동봉된 편지는 없었나?”
“없었습니다.”
헬리아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시스테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녀의 ‘취미 생활’을 찍었는지는 몰라도, 보낸 의도가 좋은 의도로 보낸 건 아닐 터였다.
“보낸 자가 누구인지도 쓰여 있지 않았고?”
“예. 그냥 저택의 경계 근처에 놓여 있었습니다.”
“…….”
시스테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리벨이 나가 있을 어두운 바깥을 내다보았다.
안전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사진이 몇 번이나 찍힐 정도면 이미 황태후의 그림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테니.
아마 사진을 찍은 자가 아직 살아 있다면, 무슨 목적으로 사진을 찍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살려 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시스테인은 그림자들의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안전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기묘하게 마력이 들끓는 것을 느꼈다. 이건 분명 제 감정에 의한 것이었다.
불쾌해.
그가 저도 모르게 속으로 뇌까렸다. 그러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부정적인 감정, 특히 분노 같은 것들은 마력을 제어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눈을 감은 채 숨을 몇 번 들이마시고 내쉬며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하지만 마력을 가라앉히다가도, 불쾌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눈을 뜬 그가 헬리아에게 손짓했다.
“감히 대공비 뒤를 쫓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봐.”
하지만 안전 문제와는 별개로, 신경 쓰이는 것은 처리해야 했다.
불쾌함을 없앨 수 없다면, 불쾌하게 만든 주체를 없앨 수밖에.
“알겠습니다.”
헬리아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 * *
리벨은 잠도 못 잘 정도로 열심히 투라 영지를 오가야 했다.
다행히도 시스테인은 그녀의 취미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았다.
“……기자인 건 이미 들키지 않았을까?”
이렇게 뻔질나게 다른 곳을 오가는 직업이 달리 또 있겠어?
리벨은 볼을 긁적였다.
벨, 벨인 것만 들키지 말자! 그녀의 목표는 슬그머니 조정되고 있었다.
정말 이러다가 들키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불안해하는 사이에도, 리벨은 소금값 담합 사건에 대한 조사는 차질 없이 해내고 있었다.
“가격 담합이면 뻔하지, 뭐.”
이래 봬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온 몸이다.
PC방 5개가 동네에 우후죽순 생기더니 가격 경쟁을 하다가 시간당 100원이 되고 나서 다 함께 망하는 것도 봤다.
하지만 반대로, PC방 몇 개가 가격을 담합해서 시간당 1800원까지 가격을 올리는 꼴도 봤다.
그 근처에 있는 PC방이라고는 거기들뿐이라 눈물을 흘리며 이용했었지.
한국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리벨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가격 담합은 일단 해당 영역에서 어떤 물건을 독점하다시피 한 집단이 있어야 가능해진다.
그건 귀족이란 게 존재하는 이 세계라면 어렵지는 않을 터였다.
그녀가 며칠간 발 빠지게 뛰어다닌 결과, 그녀의 생각은 정확히 맞아들어 갔다.
“틸라 상단하고 니아 상단에, 뒤를 봐주는 귀족까지 있단 말이지.”
투라 영지의 소금값 인상은 거대 상단과 그 상단들이 본거지로 두고 있는 거대 영지의 주인이 손을 잡고 벌인 일이었다.
세금을 불법 징수하는 건 너무 1차원적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소금값을 슬그머니 올려서 물건 시세를 높이고, 미리 구해 놓은 물건을 파는 형식으로 그들은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전문가의 솜씨였다.
“뒤를 봐주는 귀족만 알아보면 되는데…….”
문제는 여기가 귀족 사회인 만큼 귀족이 뭘 감추기 시작하면 알아보기가 쉽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중노동이다, 진짜.”
게다가 평소 같았으면 투라 영지에서 며칠이고 묵으면서 빠르게 조사할 수 있었을 텐데, 마차로 출퇴근하다시피 하니 피로는 빠르게 쌓여 갔다.
―덜컹!
그녀가 늘어져 있는 마차가 흔들렸다. 나인이 고개를 숙였다.
“저희 쪽에서도 알아보고 있으니 곧 꼬리가 잡힐 겁니다.”
하지만 권력에는 더한 권력으로 대항하는 법!
리벨은 나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반드시 알아 와.”
며칠 동안 사람을 고생시킨 놈들이 누구인지 샅샅이 파헤쳐 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 맺힌 시선을 무심코, 디란타 저택의 화원에 돌린 순간이었다.
“어?”
리벨이 입을 떠억 벌렸다.
화원은 그야말로 난리가 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