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리벨이 본의 아니게 남의 저택을 닦아 주면서 올라간 곳은 틸라 상단주 리카스의 방이었다.
다른 곳은 모두 뒤져 봤지만 별달리 뭔가 숨겨져 있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정답은 하나뿐이지.”
리벨은 슬그머니 방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리카스는 내일 두 가면을 접대할 준비를 하느라 식당에서 침까지 튀겨 가며 사용인들을 닦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방에 있을 리가 없다는 말이다.
―달칵.
문을 닫은 리벨은 본격적으로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서랍 같은 데에 있을 린 없고…….”
아무리 등잔 밑이 어둡기로서니 숨길 노력은 했지 않겠어?
방의 이곳저곳을 뒤지던 리벨은 문득 거대한 책장과 마주했다.
“음…….”
다른 것들과 유독 이질적인 적갈색의 나무. 게다가 책이 꽂혀 있는 것도 정돈되지 못한 그대로였다.
적어도 하인들이 이 책장을 정리했다면 이렇게 식물학 책과 소설책이 나란히 꽂혀 있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제 주인이 책 위치를 다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짜증 나서 경을 칠 테니까.
“……아니면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 수도 있지.”
리벨은 책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어?”
그리고 이내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일부 책 위에만 먼지가 덜어진 흔적이 있었다.
“그럼 그렇지.”
리벨은 누군가 건드린 흔적이 있는 책만 모조리 뽑아 버렸다.
―탁.
그리고 그 마지막 책을 옆에 내려놓는 순간.
―……!
소리 없이 책장이 옆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리벨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거다!
리벨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통로로 들어섰다. 그런데 그 미소는 몇 초 만에 사라져 버렸다.
“?”
통로 안, 깊숙한 방에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누군가의 가면과 마주쳤다고 하는 게 옳을 터였다.
검은 가면?
형이…… 여기서…… 왜…… 나와?
“…….”
“…….”
―쿵.
그때 이미 통로에 들어선 리벨 뒤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악!”
문 고정해 두는 거 까먹었잖아!
“…….”
“…….”
닫힌 통로 입구를 보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니, 검은 가면은 리벨을 여전히 마주 보고 있었다.
“…….”
리벨은 새삼 제 하인 복장을 살폈다.
이건 이제 쓸모없는 것이 됐다.
하인이라면 주인의 비밀 방을 발견했더라도 곱게 도망치는 게 정상이다.
걸려서 목이 날아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런데 난 신나서 들어오기까지 했지.
그걸 저 검은 가면은 다 봤고.
“…….”
물론 검은 가면이 이 방에 있는 것도 이상했다.
누가 봐도 틸라 상단주의 비밀 방인데, 방 주인이 없는 사이에 잠입했다?
이건 검은 가면 쪽도 뭔가 구린 게 있다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문제는, 검은 가면은 적어도 틸라 상단주와 거래하는 당사자라는 점이다.
핑계거리라도 있다는 뜻.
그에 반해 하인 복장인 그녀는 그냥 들어오면 쓱싹인 사람이었다.
“……너는 초대받은 자가 아니군.”
그때 검은 가면이 입을 열었다. 긴장이 머리끝까지 올라와 있던 리벨은 저도 모르게 툭 뱉었다.
“그쪽도 초대받은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
으아악! 긴장하면 입 터는 버릇이 또! 리벨은 제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나인, 같이 들어온 거겠지? 응?
리벨은 통로의 앞뒤양옆위아래를 열심히 훑어보았지만 나인은 머리털 하나도 안 보였다.
그가 여길 들어올 수 있을까?
내가 문 여는 걸 보았으니까 다시 열고 들어올 수 있지 않을까?
“…….”
하지만 문은 열릴 기미도 안 보였다. 안 열리게 장치라도 되어 있는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여긴 마력으로 통로가 막혀 있어. 바깥에서 안쪽의 기척을 전혀 확인할 수 없지.”
그때 검은 가면이 말했다. 리벨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 말은 외부에 도움을 요청해도 소용없다는 뜻이리라.
이때쯤 되면 나인이 나타나도 진작 나타났어야 했는데, 안 나타나는 걸 보니 정말 밖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 그렇군요.”
리벨은 아무 말로나 대답하며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잘 생각해 보자, 리벨!
검은 가면이 여기, 비밀 장소에 들어온 건 누가 봐도 수상한 목적이 있다는 거다!
누가 봐도 숨긴 물건 찾으러 온 사람이잖아! 틸라 상단주 뒤통수치려는 사람이잖아!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했다!
리벨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도박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할 순 없었다.
검은 가면이야 빠져나갈 구석이 있다 쳐도, 귀족들은 하인들의 목숨 따위는 파리 목숨보다 못하게 여기니까.
리벨은 당당한 듯 몸을 폈다.
“맞죠? 그쪽도 몰래 들어온 거잖아요?”
그러고는 떨지 않으려 애쓰며 통로를 걸어 검은 가면에게 다가갔다.
어차피 다 막힌 공간이라 튈 데도 없었다.
“…….”
리벨의 말에 검은 가면의 입술이 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누군가가 떠오르는 입술이었다. 늘 입을 다물거나, 담담하거나, 무표정한 얼굴로 답하는 사람.
……가면이 있으니까 표정이 안 읽힌다는 점에선 똑같나?
그를 살피면서 리벨은 그의 앞에 다가가 섰다.
남자로 변신해서 그런가 보폭이 넓은 건 편했다.
“여기서 뭘 찾으려고 했던 거죠?”
리벨의 물음에, 검은 가면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같은 질문을 돌려줄 수 있겠군.”
“……?”
낮은 목소리. 아까와 같은 낮은 목소리였지만 뭔가 달랐다.
가까이에서 들으니 더 알 것 같았다. 아까는 일부러 낮춘 목소리였다면…….
“잠깐, 말 좀 다시 해 보시겠어요?”
리벨이 불쑥 말하자 검은 가면이 곧바로 되물었다.
“뭐?”
무미건조하게 돌아오는 목소리는 익숙했다.
저 목소리는?
리벨은 믿을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대화를 하는 사람이 몇 명 없는 데다 직업 특성상 그녀는 목소리를 잘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상황은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보니 머리카락 색만 다를 뿐 저 위에 시스테인 얼굴을 갖다 놓아도 전혀 어색함이 없을 만큼 익숙한 체형…….
……당연하지, 저 사람이 시스테인 본인이니까!
아니 댁이 왜 가면 쓰고 여기 있어요? 가발은 왜 썼어? 혹시 디란타 가 부업이 소금값 담합이었습니까? 그렇게 우리 돈 궁해???
“어…… 음…….”
리벨은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근처로 외근 나간다고 했지. 그게 설마…… 이거?
에이, 설마!
하하하하! 시스테인하고 체격 비슷한 사람이 또 있을 수도 있지! 대륙이 얼마나 넓은데!
리벨은 설마 하는 가능성을 애써 지우며 팔짱을 꼈다.
“제, 제가 보기엔 여기에 우리가 같은 걸 찾으러 온 것 같거든요?”
구린 사람 집에서 뭐 찾는다고 하면, 목적이야 어쨌든 구린 거 찾은 거지 뭐, 안 그래?
그 말에 검은 가면은 답이 없었다. 리벨은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어차피 같은 입장인데, 못 본 척할래요?”
그녀가 좀 더 검은 가면에게 가까이 걸어갔다. 정확히는 그의 뒤에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어차피 여기 갇힌 건데, 피차 시간 낭비하지 말고 장부 찾아서 나갑시다!
그렇게 옆을 스친 순간이었다.
―우웅.
기묘한 진동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혹시 정체가 핸드폰이셨습니까?
그럴 리가 없어 돌아본 리벨은 제 눈을 의심했다.
순간 반투명해진 가면 사이로 아는 얼굴이 분명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익숙한 푸른 눈동자와 담담한 얼굴.
지지진짜 시스테인이잖아!
리벨은 순간 소리를 지를 뻔했다.
―탁!
그때 남자가 그녀의 팔을 탁 잡았다.
“어어우, 아무리 같은 편이라지만 이런 스킨십은 좀.”
리벨은 재빨리 팔을 떼어 냈다. 시스테인은 저번 디엘렌 가의 연회에서 그랬다.
나와 접촉하면 마력이 가라앉는다고.
그런 사람이 흔할 리도 없고, 지금 마력 상태가 어떤지는 몰라도 접촉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하필 잠입 취재 중에 만나면 안 될 사람 1순위를 여기서 마주칠 줄이야!
다행히도 지금은 남자 모습으로 변장해 있었다.
“얼른 조사나…….”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물러설 때였다.
검은 가면, 아니 시스테인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같은 편이라도 이렇게 깊은 커뮤니케이션은 좀 곤란하거든요?”
그렇게 유심히 보지 말아 줄래요? 들킬 것 같거든?
무엇보다 변신할 때 자줏빛 눈동자만큼은 바꾸지 못하는 게 제일 치명적이었다.
시스테인이 아무리 세상사에 관심이 없기로서니 자기 아내 생김새도 모를 리도 없고, 하필이면 자줏빛 눈동자는 흔한 것도 아니었다.
리벨은 재빨리 그에게서 떨어져 방 안으로 향했다.
“빨리 찾죠.”
뭐든! 리벨은 그렇게 말하면서 방 안을 이곳저곳 뒤적이기 시작했다.
책장 뒤라 그런지 책장은 또 무지막지하게 많았다.
그냥 거래 장부를 여기다 다 모아 둔 듯했다.
―탁. 타탁.
리벨이 장부 여러 개를 빠르게 살펴보는 사이에도 시스테인의 시선은 빤히 그녀를 보고 있었다.
서얼마 들키진 않았겠지?
리벨은 최대한 모른 척 장부를 뒤적거렸다.
알아챘으면 아는 척하지 않았을까?
아니, 근데 알 리가 없지! 난 지금 남자 모습이잖아!
리벨은 애써 속을 가라앉히며 책장을 뒤적거렸다.
“……그렇게 하지.”
결국 시스테인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휴.
속으로 한숨을 삼킨 리벨이 그제야 자료를 뒤지는 데에 집중했다.
소금이 정상적으로 가격이 올라갈 때의 가격 그래프와, 현재의 가격 변동을 비교해 놓은 자료도 보였다.
“오.”
일단 이것도 증거가 될 것 같고…….
그 근처를 좀 더 뒤지니 소금 산지와 틸라 상단이 거래한 흔적도 나왔다.
그리고 이내.
“찾았다.”
리벨이 눈을 반짝였다.
[BLACK & WHITE]
설마 거래자들 가면이 검은색이랑 하얀색이라고 이런 구린 이름을 붙여 놓은 거 아니지? 그렇지?
리벨은 장부를 재차 펼쳐 확인했다.
물품이 무엇인지 나오지는 않았지만 수레당 가격이나 거래 일자가 가격 변동 그래프와 정확히 겹쳤다.
그녀가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같은 걸 찾고 있었나.”
소리 없이 다가온 시스테인이 뇌까렸다.
리벨이 움찔했다. 다행히도(?) 디란타 가의 부업이 소금 장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도 조사차 여기로 나온 모양인데……
……그런데 제도기사단장이 왜 투라 영지까지 와서 잠입을 하고 있어?
“그, 그래요?”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리벨은 그와 닿을까 싶어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문제는 그녀에게도 장부가 필요하고, 시스테인에게도 장부가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
“…….”
두 사람 사이로 침묵이 흘렀다. 시스테인의 입술이 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리벨은 가면에 가려진 얼굴이지만 그의 얼굴이라 생각하니, 저 아래에 무슨 시선이 감추어져 있을지 알 것 같았다.
저…… 저 단호한 표정은?
‘아는 사이십니까?’
처음 대공저에 갔던 날, 웬 기사와의 일면식을 논했던 그의 얼굴이 저랬다.
한마디로 사람 죽이기 전의 얼굴이 저랬다.
리벨은 두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아아아아니그런데저는 엄연히 따지면 이게 필요한 게 아니거든요? 난 존재만 알면 되거든요?”
“?”
Wait a minute. 웨이럼미닛. 기다려 봐요. 칼 안 돼, 폭력 안 돼!
리벨이 재빨리 머리를 굴릴 때였다.
시스테인의 시선이 불쑥 통로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방 주인이 왔군.”
뭐라고? 리벨이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