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리벨은 시스테인의 말에 당황했다.
“아니, 아깐 바깥 기척 차단된다면서요?”
그럼 안 들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잘못 들은 게 아닐까요?
“나한테는 들려.”
시스테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 그거참 좋은 소식이다!
리벨은 굳어 버렸다.
“그으으럼 혹시 그 좋은 청력으로 여기서 나갈 방법은 찾아보셨는지…….”
그 말에 시스테인이 급할 것 없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퇴로 없는 굴에 내 발로 들어오진 않아.”
그건 다행이다! 역시 내 남편!
그런데 이 사람 반말하는 건 처음 보네.
나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긴장이 풀어진 건지, 리벨은 새삼스럽게 그를 다시 보았다.
검은 가면 너머에 얼굴이 감추어져 있었지만, 그인 걸 알고 나니 가면에 가려지지 않은 얼굴 일부만으로도 그의 표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이 사람 얼굴을 이렇게 유심히 봤던가?
“그럼 어서 나가죠. 이 밤에 상단주가 밖으로 다시 나갈 것 같지도 않고…….”
아직 이 비밀 공간에 우리가 들어온 걸 모를지도 모른다. 그사이에 탈출하는 게 상책이었다.
“음…….”
시스테인은 그 말에 통로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리벨은 그 틈을 타서 재빨리 카메라를 꺼냈다.
이때다! 일단 증거 확보부터!
―찰칵!
셔터 소리 나는 곳은 막았지만, 방이 작아서 그런가 그 소리는 유독 크게 방 안을 울렸다.
“…….”
그러고 보니 저 사람, 귀 좋댔는데.
리벨은 슬쩍 눈을 들어 시스테인을 보았다. 그의 가면이 그녀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카메라를 보고 있는 듯했다.
리벨이 카메라를 슬그머니 내렸다.
“카메라?”
시스테인이 뇌까리는 말에 리벨은 눈을 깜빡였다.
카메라 들고 증거 찍는 직업이 세상에 몇 개나 있지?
아아니지, 진정해!
그런 직업이 기자밖에 없다고 해도 난 지금 남자 모습이다!
“저는 이거면 됐거든요. 장부는―”
가지세요, 하려다가 리벨은 멈칫했다.
시스테인 입장에서 나를 굳이 밖으로 데리고 나가 줄 이유가 없잖아?
내가 리벨인 걸 밝힌 것도 아니고, 시스테인 입장에서는 생판 모르는 남에 심지어 자신이 하던 일을 알게 된 자이기까지 한데, 굳이 살려…… 둘…… 필요가……?
―파앗!
그 순간 리벨이 눈을 꽉 감았다 떴다. 눈앞이 까마득해지는 느낌.
이건…….
최근엔 느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왜냐면 이렇게 오랫동안 변신을 유지한 적이 없었으니까.
리벨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건 변신이 풀리기 10분 전에 일어나는 전조 증상이었다!
“빨리, 빨리 나갈 곳을 찾죠.”
리벨은 장부를 챙겨 넣으면서 말했다. 그러다가 시스테인과 눈이 마주쳤다.
“…….”
“…….”
이걸 안 갖고 나가면 왠지 시스가 날 안 꺼내 줄 것 같……
……다고 말할 순 없으니 변명은 대야 했다.
“제 옷이 숨기기 쉽잖아요?”
“…….”
시스테인의 입매가 일자로 굳게 다물어졌다.
하인의 옷과는 달리 여유가 많은 편은 아닌 제 정장을 내려다보다가, 시스테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한쪽으로 손을 뻗었다.
책인 줄 알았던 것은 자세히 보니 종이 재질이 아니었다. 리벨이 눈을 크게 떴을 때였다.
“이 문엔 문제가 두 가지 있는데.”
시스테인이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나는 바깥으로 향한다는 거고…….”
그게 문젠가요?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다른 하나는.”
뭔가 말을 이으려던 시스테인은 입을 닫아 버렸다.
저기, 이거 그건가요? 사람을 미치게 하는 방법? 하나는 말을 끝까지 하지 않는 것이고?
―달칵.
그때 시스테인이 문제의 책을 건드렸다.
그리고 리벨은 그가 말하지 않은 나머지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쿠르르르르르릉!
엄청난 굉음이 건물을 뒤흔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니, 이런 문제점이면 빨리 알려 달라고!
건물 전체가 뒤흔들릴 만큼의 진동이니 저택에 있는 사람들도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건 당연히 알아챌 터였다.
그리고 이 방의 존재를 아는 틸라 상단주가 그걸 못 알아챌 리 없었다.
―쿠쿠쿵!
그리고 그 버튼과 함께 마력 장막이 풀리게 되어 있는지, 저 밖에서 상단주가 당황해 외치는 소리가 리벨의 귓가에 꽂혔다.
「뭐, 뭐야! 안에 누가 있잖아! 여봐라!」
뒤돌아볼 틈도 없이 리벨은 열린 통로로 뛰쳐나갔다. 시스테인 역시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따라 나섰다.
아니, 그런데 뒤에서 당장 쫓아올 텐데 그렇게 여유롭게 걸어도 돼요?
나만 지금 급박해? 사실 나만 쫓기는 거야?
“저기, 기럭지가 길어서 여유로우신 건 알겠는데 이렇게 걸어 나가셔도 되는지?”
리벨은 결국 묻고 말았다.
설마 저한테 타지에서 객사했다는 전언 전해 주실 거 아니죠?
아니, 여기서 시스가 죽으면 나도 죽을 것 같긴 한데…….
그녀의 말에 시스테인은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앞에 함정이 있어서.”
뛰어나가던 관성을 못 버티고 리벨이 비틀거렸다.
“그런 건 일찍 말해 주시면 안 될까요?”
리벨은 슬그머니 그보다 좀 더 뒤처져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키 차이 때문인지 거의 뛰다시피 해야 했다.
“그, 함정 처리는…… 가능하신 거죠?”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문득 저번 시스테인의 옷소매에 묻어 있던 피가 떠올라서였다.
그건 그의 피는 아니라고 했지만.
피 보며 사는 사람들이 원래 자기가 다칠 가능성도 높지 않은가.
“안 다치면서, 가능한 거죠?”
리벨이 슬그머니 덧붙였다.
“…….”
시스테인이 그를 돌아보았다.
꾹 다문 입매만 보였지만 그는, 왠지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았다.
걸음까지 멈춘 그는 리벨을 바라보았다.
아니, 지금 뒤에서 사람들 쫓아온다고!
리벨은 결국 장부를 툭툭 쳐 보이면서 말했다.
“무사히 같이 나가게 되면 이건 유혈 사태 없이 드릴 테니까, 서둘러 주시면 안 될까요?”
장부에 사람 피 같은 거 묻어 봐야 좋을 거 없잖아요? 그죠? 혹시 그런 살벌한 그림 원하시는 거―
리벨이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이었다.
―파앙!
통로 앞쪽으로 내밀어진 시스테인의 손에서 새파란 마력이 터져 나왔다.
무슨 레이저처럼 통로를 관통한 마력은 하늘의 구름에마저 구멍을 새기고 사라져 버렸다.
리벨이 입을 떠억 벌렸다.
“쫓아라!”
그때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화들짝 놀란 리벨이 앞으로 뛰어갔다.
“으으아악! 얼른 나가요!”
―콰앙!
다시 한번 건물이 뒤흔들렸다. 지금까지 있던 진동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리벨이 통로가 흔들려 뒤를 돌아보니, 시스테인은 두 사람이 지나온 통로를 무너뜨린 후였다.
저, 저것도 아까 그 마력으로 한 건가?
“……!”
당황하는 사이, 리벨은 다시 한번 눈앞이 까마득해짐을 느겼다.
안 돼, 변신 풀리기 직전이다!
―타탓!
리벨은 앞뒤 잴 것도 없이 튀어 나갔다.
그리고 마침 출구 밖에 있는 풀숲의 나무 뒤로 뛰어들었다.
―화악!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얼굴과 몸을 감싼 그녀의 변신이 풀려 버렸다.
리벨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좀만 늦었으면 걸릴 뻔했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나무 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약속과 달리 행동하는 것 같은데.”
헉.
시스테인의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맞다, 장부 주기로 했지!
리벨은 장부를 꺼내다가 멈칫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의 손은 아까 남자의 다소 탄 피부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
장부를 들고 튀려고 했던 게 아니라! 그렇게 말하려던 리벨은 입을 틀어막았다.
여자 목소리잖아!
당황해 허공을 더듬거리던 리벨의 손이 재빨리 수첩을 꺼냈다.
―찌이익!
수첩 한 장을 찢은 리벨이 재빨리 글씨를 써냈다.
[제가화장실이급해가지고]
그러고는 나무 옆으로 슥 종이를 내밀었다. 손이 안 보이게 종이 끝을 잡은 채였다.
“…….”
시스테인은 분명 종이를 봤을 텐데도 답이 없었다. 왠지 가라앉은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생각할 때였다.
“저쪽이다!”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
병사가 몰려드는 소리였다.
아니, 비밀 통로는 막혔는데― 젠장!
리벨은 머리를 싸맸다. 비밀 방의 주인인 틸라 상단주가 이 비밀 통로의 출구가 어디로 통하는지 모를 리가 없잖아!
[지금 사람들 오고 있는 것 같은데요]
리벨이 재빨리 다시 종이에 글씨를 써서 내밀었다. 시스테인이 답했다.
“오고 있겠지.”
아니 그걸 그렇게 한가하게 말할 일?
리벨은 다시 종이에 글씨를 휘갈겼다.
[장부는 제가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주시면 드릴게요]
“……점점 조건이 늘어나는데.”
시스테인의 목소리가 더욱 가라앉았다. 그게 정말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리벨 상태로 들켰다간 그에게 내가 기자요, 하고 알리는 꼴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변신 능력으로 기자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까지 알리는 셈이고, 그가 바보가 아니라면 ‘여러 명의 숙련된 인턴 기자’를 끌고 다닌다는 벨의 그 인턴 기자들의 외모와 대조해 볼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 갈색 머리 남자가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면…….
오…….
리벨은 눈을 꽉 감았다 떴다.
그런데 시스테인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내가, 그냥 빼앗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
묘한 한기가 서린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