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내가, 그냥 빼앗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
리벨은 우뚝 굳었다.
설마 나무째로 저까지 갈라 버리실 생각?
그럼 장부도 갈라지고 나무도 갈라지고 당신 아내도 갈라지는데 그런 대참사를…….
……그런데 시스테인 입장에선 그렇게 하는 게 효율적이었다.
그녀가 리벨임을 스스로 밝히지 않는 이상, 그냥 그녀를 죽이고 장부를 들고 자리를 피하는 게 가장 편하고 빠른 방법이었다.
아니, 고자 기사의 업보를 이렇게 받는다고?
리벨이 머리를 싸맸다.
아아아니야! 이렇게 여기서 죽을 순 없다!
―펄럭!
리벨은 주머니에서 검은 손수건을 재빨리 꺼내 털었다. 나인이 준 압축(?) 로브였다.
이게 툭툭 턴다고 로브가 될까, 싶었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손수건은 쑥쑥 자라 금세 로브 모양으로 변했다.
로브를 빠르게 뒤집어쓴 리벨이 다시 글씨를 써냈다.
[제가 아까 찍은 사진이 이것뿐만은 아니거든요]
[뭐 때문에 장부를 구하시는진 모르겠지만 사진도 도움이 될 거예요]
그니까 나도 좀 데려가 줘요! 리벨은 필사적이었다.
그러자 시스테인의 고민 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카메라까지 뺏으면 된다고 알려 주는 건가?”
그게 아니고! 수첩에 휘갈기는 그녀의 글씨가 점점 거칠어졌다.
[이 카메라는 저만 잠금 해제 가능]
“…….”
그 문장에야 시스테인은 조금 고민하는 듯했다.
요컨대 나 쓸모 있으니까 같이 나가면 안 될까요? 하는 소리였다.
물론 얼굴 들키면 사망이니까 얼굴은 가려야 할 터였다.
다시 변신을 할 수 있는 10분이 지날 때까지.
“……어쩔 수 없군.”
그때 시스테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좀 더 가까운 곳에서.
헉!
화들짝 놀란 리벨이 로브 후드를 푹 뒤집어쓰다 못해, 얼굴을 아예 감춰 버렸다.
남자 모습이 키 차이가 별로 안 나서 다행이다. 체격이 크게 차이 났으면 시스테인도 의심했을 테니까.
리벨이 로브 안에서 한숨을 쉴 때였다.
“……그 상태로 도망칠 생각인가?”
시스테인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리벨이 눈을 깜박였다.
그……러게?
하지만 얼굴 깠다간 그대로 배드 엔딩이었다. 리벨은 목소리가 간신히 나올 정도로 톤을 확 낮춰서 말했다.
“제가, 아까 발을 삐어서.”
“…….”
침묵하던 시스테인이 나뭇잎을 밟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이내, 불쑥 그녀를 안아 들었다.
“헙.”
리벨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익숙한 온기가 그녀를 감쌌다.
“꽉 잡아.”
시스테인의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리벨은 로브 안에서 슬그머니 웃었다.
그래도 역시 친절한 사람이다.
그녀는 로브 후드를 잡지 않은 손으로 그의 몸을 꽉 잡았다.
“나 말고, 장부랑 카메라.”
그때 시스테인의 덤덤한 말이 떨어져 내렸다.
……아, 예.
리벨은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그래도 나 놓치진 않을 거죠? 그죠?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장부와 카메라가 그녀의 품에 있기 때문인지, 시스테인은 그녀를 단단히 안은 채 도약했다.
* * *
감찰기사단의 계획이 꼬이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하지만 일단 이번 계획은 초장부터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먼저 시스테인이 루이스 대신 검은 가면이 된 것부터 계획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계획은 급변했다.
필요한 장부만 빨리 들고 나온다!
어차피 중간에 검은 가면이 사라져 세 상단이나 하얀 가면이 이상함을 느낀다고 해도, 장부만 있으면 감찰기사단에서 그들을 불러들이면 그만이니까.
장부, 요컨대 두 가문과 세 상단의 거래 증거만 얻을 수 있으면 된다.
감찰기사단에서는 이미 세 상단과 거래하는 가문이 페티아 후작가와 다닐 백작가라는 사실은 알아낸 상태였다.
그들을 조일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게 문제였지.
그 증거만 수집하면 그만이니, 시스테인은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려고 했다.
―덜컹.
하지만 그는 생각지도 못한 돌발 상황에 부딪혔다.
장부를 찾기 위해 들어온 비밀 방에서, 웬 하인과 만난 것이다.
“…….”
“…….”
물론 진짜 하인은 아닐 터였다. 이 방에 들어온 것부터.
문제는 간신히 제어되고 있는 그의 마력에, 돌발 상황은 아주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여차해서 여기서 폭주했다간……. 시스테인이 뒷일을 생각할 때였다.
“그쪽도 몰래 들어온 거잖아요?”
당돌한 침입자가 가까이 다가온 순간, 그는 눈을 크게 떴다.
하인 복장의 남자가 가까워질수록 마력이 기이하게도 가라앉았다.
시스테인은 남자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마치 리벨이 옆에 온 것처럼 가라앉는 마력.
그리고…… 저 자줏빛 눈동자.
그녀 생각을 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같은 색의 눈동자를 가진 이자에게도 같은 능력이 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력은 빠르게 진정되고 있었다.
“……빨리, 빨리 나갈 곳을 찾죠.”
당당한 척 하던 하인 복장의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방의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장부를 찾더니, 제 옷 속으로 쏙 숨겨 버렸다.
「문이 열렸었나?」
그때쯤 시스테인은 마력 장벽 밖, 틸라 상단주의 목소리를 들었다.
시스테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우웅……
그의 속에서 들끓는 마력과 공명해, 이곳을 둘러싼 마력 장벽은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책, 책이 이미 뽑혀 있잖아! 빨리 병력을 불러와!」
저 통로로 병사들이 쳐들어오면 아주 귀찮아질 것이다.
빨리 나가야 한다.
시스테인이 몸을 돌렸을 때였다.
―사아아…….
하인 복장의 남자와 아주 잠깐 몸이 스쳤을 뿐이었다.
다시 마력이 움직였다. 확실히, 긴장에 들끓던 마력은 순간적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하인과 눈이 마주친 그는 자줏빛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흔하지 않은 색의 눈인데.
……리벨에게 다른 가족이 있었나?
그가 알기로 리벨에게 살아 있는 친족이라고는 이벨라 자작뿐이었다.
그럼, 그녀와 같은 능력, 같은 눈 색을 가진 이 남자는 누구지?
마력이 가라앉은 건 착각이었나?
시스테인이 다시 한번 남자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러자, 하인이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
하인은 눈에 띄게 그를 경계하며 말했다.
“빠빠빨리찾죠? 우리 지금 죽기 직전인데?”
시스테인은 가면 속에서 살짝 미간을 좁혔다.
여차하면 건물을 무너뜨려 버리면 그만이다.
그는 이곳에서 안전하게 나갈 방법을 몇 가지나 알고 있었다.
“…….”
하지만 이 사람.
리벨과 같은 눈, 같은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생긴 건 전혀 닮지 않은 이 남자.
……귀족가에 비밀 하나쯤 없는 집안은 없으니.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도 만일 그녀에게 숨겨진 가족이 있었다면, 그녀 자신은 몰라도 결혼하기 전 어머니와 내가 조사했던 결과에는 나왔어야 했는데.
하지만 어머니 리엔도 그도 리벨에게 다른 가족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럼 혈연관계가 아니라…… 이런 능력을 가진 자들이 따로 있는 건가?
라이아 약초와 대공령의 몬스터 쓸이는 임시방편일 뿐, 그의 안에 들끓는 몬스터를 가라앉힐 방법은 되지 못했다.
그런 그의 마력을 가라앉힐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 능력을 가진 남자.
이 남자는 그 능력에 대해 조사할 실마리가 되어 줄 터였다.
“……제 옷이 숨기기 쉽잖아요?”
그가 빤히 바라보는 이유가, 제 옷에 숨긴 장부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남자가 슬그머니 말했다.
자줏빛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시스테인을 올려다보았다.
“…….”
리벨을 닮았다, 그가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죽일 생각은 없으니, 빨리 나가는 게 좋을 터였다.
시스테인은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 봐 두었던 장치 근처로 다가갔다.
“이 문엔 문제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바깥으로 향한다는 거고.”
그는 장치에 손을 올렸다.
“다른 하나는.”
굳이 설명하는 것보다는 그냥 장치를 구동시키는 게 빠를 듯했다.
―툭.
그리고 그 장치를 건드리자마자, 그의 예상대로 건물 전체에 엄청난 진동이 전해졌다.
그러면서 책장이었던 것들 사이로 외부로 통하는 통로가 드러났다.
하인 복장 남자가 소스라치게 놀라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저것마저, 리벨을 닮았다. 시스테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이이런 걸……!”
뒷말도 제대로 잇지 못한 남자가 통로로 튀어 나갔다.
통로에 함정이 있을 텐데.
시스테인은 그를 따라 걸어 나가며 생각했다.
「얼른 쫓아! 침입자가 있다!」
그러는 사이 상단주의 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먼저 튀어나갔던 남자의 목소리도 거의 동시에 들려왔다.
“저기, 기럭지가 길어서 여유로우신 건 알겠는데 이렇게 걸어 나가셔도 되는지?”
빠르고 길게 줄줄이 튀어나오는 말은 아무래도 머릿속을 거치지 않고 튀어나온 말인 것 같았다.
한눈에 봐도 남자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원래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하는 자 같지는 않은데.
시스테인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남자가 느끼는 긴장과 두려움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했다.
그 두려움에는 아마 이쪽에서 저를 죽일 거라는 두려움도 속해 있을 터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도 마력이 폭주하지 않게 해 준 남자를, 시스테인은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랬기에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함정이 있어서.”
그 말에 남자가 비틀거렸다.
“그런 건 일찍 말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는 순식간에 뛰어나가던 속도를 줄여 시스테인의 뒤에 철썩 붙었다.
그 모습마저 매사 통통 튀는 제 아내가 생각나, 시스테인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함정 처리는 가능하신 거죠? 안 다치면서 가능한 거죠?”
남자는 쫓아오면서 재잘거리듯 물었다.
시스테인은 그 질문에, 이 남자가 어디 다른 곳의 정보원일 가능성을 거의 완전히 지워 버렸다.
초면에 남 다치는 걸 이렇게나 진심으로 걱정하는 어설픈 정보원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때 남자가 제 옷을 툭툭 쳐 댔다. 아까 장부를 집어넣은 곳이었다.
“무사히 같이 나가게 되면 이건 유혈 사태 없이 드릴 테니까, 서둘러 주시면 안 될까요?”
……대체 어느 곳의 정보원이 이런……. 이마를 짚은 시스테인은 통로 앞으로 손을 뻗었다.
마침 마력은 쓰면 쓸수록 좋은 상태이니.
―파앙!
그의 손에서 푸른 마력이 쏘아져 나갔다.
그 자신도 놀랄 정도의 강한 출력으로, 마력은 통로의 장치를 싹 태우고도 하늘의 구름마저 뚫어 버렸다.
“헐.”
남자가 놀라든 말든, 시스테인은 그들이 지나온 통로까지 마력으로 무너뜨려 버렸다.
그에 남자는 움찔하는 것도 잠깐, 제 딴에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밖으로 튀어 나갔다.
종잡을 수 없는 것마저 왠지 리벨을 닮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는 나무 뒤로 쏙 숨는 남자를 발견했다.
……이건 또 상상치도 못한 전개였다.
시스테인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