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약속과 다른 것 같은데.”
그 말에 부스럭거리더니 내놓는 답은 가관이었다.
[제가화장실이급해가지고]
“…….”
확실히 어딘가의 정보원은 아니었다.
이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대는 자를 누가 이곳에 잠입시켰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시스테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통로를 막아 놨다지만 저걸 치우는 데에 오래 걸리진 않을 거고, 상단의 병사들은 이미 주변을 포위하려고 하고 있었다.
저들을 죽이고 나가는 거야 쉽다.
“…….”
하지만 눈을 가늘게 뜬 시스테인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이번 일은 감찰기사단의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을 때에야 사람을 죽이긴 하지만, 감찰기사단에게는 기본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권리는 없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귀족들이 반발 없이 감찰기사단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거고.
그렇게 생각에 잠긴 사이, 남자와의 필담은 빠르게 이어졌다.
[장부는 제가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주시면 드릴게요]
점점 조건이 많아지는 남자였다.
그래도 급하긴 급했는지, 점점 글씨체가 날아가고 있었다. 글자 끄트머리에 힘을 주는 방식이 눈에 띄는 글씨체였다.
남자는 장부로는 제 필요가치를 증명하는 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아까 사진을 찍었던 카메라까지 운운했다.
시스테인은 그때쯤에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카메라까지 뺏으면 된다고 알려 주는 건가?”
그 말에 남자는 더욱 당황했다.
아까와 묘하게 기척이 달라진 그는, 어디에선가 검은 로브를 꺼내 들었다.
아까 그 남자가…… 로브를 들고 있진 않았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급히 휘갈긴 남자의 글씨가 보였다.
[이 카메라는 저만 잠금 해제 가능]
“…….”
저렇게 구구절절한 건 보나 마나 나갈 능력이 없다는 뜻이리라.
―쿠르르…….
이건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마력이 들끓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병사들이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으니, 전투의 흥분에 마력이 반응하는 것이었다.
“…….”
그의 잇새에서 단내 나는 숨이 새어 나왔다.
여기서, 특히 다른 자의 저택 한가운데에서 마력이 폭주한다면.
언젠가처럼 이성을 잃는다면 그가 지금까지 지켜 오려던 모든 것이 소용없어지는 셈이었다.
“어쩔 수 없군.”
시스테인은 남자를 데리고 나갈 몇 가지 경로를 계산하며 나무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번데기처럼 제 얼굴과 몸을 로브로 가려 버린 남자와 마주쳤다.
“……아까 다리를 삐어서.”
다리보단 목이 불편한 것 같은 목소리였다.
시스테인은 그를 데리고 나갈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결국 그는 남자를 안아 올렸다.
그 상태로도 남자는 로브로 아예 얼굴을 둘둘 감고 있었다.
“꽉 잡아.”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력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시스테인이 마음을 다스릴 때였다.
남자의 손이 슬그머니 그의 목 뒤를 감아 왔다.
“…….”
잠시 어이가 없어 숨을 내뱉은 시스테인이 말했다.
“나 말고, 장부랑 카메라.”
내가 길을 가다가 버리기라도 할 것 같았나?
물론 그게 시스테인에겐 편한 선택지이긴 했지만, 마력을 가라앉힐 수 있는 리벨이 없는 지금 그는 이 남자를 버리고 갈 수가 없었다.
때마침 장부와 카메라도 이자가 들고 있으니, 그의 입장에선 그냥 들고 가는 게 나았다.
―타탁!
그는 남자를 꽉 잡은 채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
굵은 나뭇가지 몇 개를 밟고 뛰어오른 그가 몸을 숙였다.
“잡, 잡아!”
병사들이 제 위를 스쳐 지나가는 그를 보고 놀라 화살을 쏘아 댔지만, 화살은 그가 있던 자리만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쫓아라!”
말을 타고 쫓으려는 자들은 적당히 다른 기사들이 막아 줄 것이다.
그러니 마력을 가라앉히는 게 우선이다.
시스테인은 남자를 든 채 생각했다.
“…….”
근데, 원래 체형이 이렇게 작은 자였나?
물론 키가 큰 남자는 아니었지만 옷을 좀 크게 입고 다니는 자인가?
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긴가민가하는 사이 안전지대에 닿은 시스테인은 남자를 내려놓았다.
―툭.
그리고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남자가 로브 모자를 확 젖혔다.
드러나는 건 당연히 갈색 머리 남자 얼굴이었다. 자줏빛 눈동자만 빼면 낯익은 부분 하나 없는.
“고맙습니다!”
남자의 얼굴엔 안도감이 묻어나 있었다. 고개까지 꾸벅 숙이더니 남자는 불쑥 시스테인에게 장부를 건넸다.
“이거요, 장부.”
받기로 했던 것이니 시스테인은 별말 없이 장부를 받아 들었다.
그러면서 남자의 얼굴을 주시했다. 기억에 담아 둘 참이었다.
대체 어디에서 온 자인지, 왜 이런 능력을 가졌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으니까.
“아, 필름도 드려야지.”
그런데 그의 시선에 지레 찔린 바가 있는지, 남자는 주섬주섬 카메라에서 필름을 꺼냈다.
“아, 근데 이거 마법 필름인―”
종이나 다름없는 재질의 마법 필름은 인화하는 데에 특별한 과정을 거치진 않았다.
그 사실을 아는 시스테인은 남자의 손에 들린 필름에 손을 가져다 댔다.
마력이 안 그래도 들끓고 있으니, 스치기만 해도 충분할 것이다.
―사아아…….
아니나 다를까, 그의 손끝 마력에 반응한 필름에서 사진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헐.”
남자가 입을 떠억 벌렸다가, 재빨리 사진을 챙겼다.
그리고 사진 몇 개를 슬며시 골라내더니 나머지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언뜻 보니 그가 골라낸 건 주로 저택의 풍경이나 사람들을 찍은 것이었다.
어차피 저건 감찰 입장에서는 쓸 일 없는 사진들이었다.
“……음.”
반면 시스테인이 받은 사진은 대부분 거래 장부였다. 문제의 소금 거래를 틸라와 니아 상단이 주도했다는 충분한 증거가 될 터였다.
“감사히 받지.”
근데 이자는 이게 필요가 없으면 왜 찍은 거지?
의아함에 시선을 들어 쳐다보니, 정답은 남자의 얼굴에 나와 있었다.
“저…… 안 죽이실 거죠?”
“…….”
아무래도 저쪽도 필요했지만 나름 목숨값으로 내어 준 모양이었다.
뭘 믿고 살려 줄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를 노릇이다.
필요한 걸 다 취하고 죽일 수도 있는데.
물론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의 아내는 다른 자의 피에도 화들짝 놀라는 사람이었으니, 어지간하면 피 볼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마치 그 생각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구는 게 신기했다.
“그, 그럼 이만?”
남자는 몇 번 뒷걸음질 치더니 그의 앞에서 멀어져 갔다.
“…….”
시스테인은 그 몸놀림을 자세히 지켜보았다.
귀족다운 몸놀림도, 훈련 받은 자의 몸놀림도 아니다.
무엇보다 남자였다.
그런데 왜 자꾸 리벨이 생각나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
머리카락조차 그녀의 진분홍빛 머리칼과는 거리가 먼 갈색인데도.
자꾸만 리벨이 생각이 났다.
“마력 때문인가.”
그가 뇌까렸다.
기이한 일이었다.
* * *
“흐어어어.”
리벨은 제가 어디로 뛰어가는지도 모르고 일단 시스테인에게서 멀어졌다.
진짜 몰랐겠지? 갑자기 자기 아내가 타지에서 남자가 되어 마주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어? 안 그래?
그녀가 아는 시스테인은 그렇게 상상력이 풍부한 남자가 아니었다.
내가 리벨이었다곤 생각도 못 할 것이다.
아니, 생각도 못 해야 했다.
“전하!”
그때 불쑥 누가 리벨을 붙들었다. 얼굴을 드러낸 남자는 나인이었다.
“어디 갔었어?”
왜 이제 튀어나와? 리벨은 반쯤 울고 싶었다.
나인이 무릎을 꿇었다.
“죽여 주십시오. 그 방에 있는 마력장에 반발이 생겨 진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력장?”
리벨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고 보니 시스테인이 마력장이 어쩌고 방음이 어쩌고 한 것 같긴 한데.
“……난 들어갔는데?”
“죄송합니다. 제 능력 부족입니다.”
나인도 그 사실이 의아하기는 했다. 그가 아는 리벨 폰 디란타는 마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뚫은 마력장을 제가 뚫지 못했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제대로 주인을 호위하지 못하고 위험에 노출시켰으니, 제게는 더 살 가치가 없었으니까.
“빨리 일어나, 빨리.”
그때 리벨이 그를 잡아끌었다.
“저, 전하?”
무릎이 꿇린 채 끌려가던 나인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리벨이 기겁했다.
“으, 무릎 아팠겠다. 미안. 아니 근데 진짜 지금 여기 있을 때가 아니라니까?”
리벨은 손짓 발짓을 하면서 저택과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빨리 튀자. 뭔 일인지는 튀면서 설명해 줄게. 빨리!”
그 말에 나인은 고개를 숙였다.
하긴, 다른 그림자들이 있다곤 하지만 이곳에서 죽어 흔적을 남기는 것보다는 저택으로 돌아가 처분을 받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터였다.
나인이 고개를 깍듯이 숙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지금 마지막은 나한테 닥치게 생겼거든? 빨리!”
리벨이 손짓했다. 나인은 그런 그녀를 데리고 근처의 마차로 다가갔다.
그림자들이 미리 준비해 둔 탈출용 마차였다.
나인이 마력장에 진입이 막혀 리벨과 떨어지자마자, 그림자들은 숨 가쁘게 움직였다.
여차하면 저택을 폭파해서라도 리벨을 찾아야 했으니까.
하지만 다행히 얼마 있지 않아 저택에 이상한 움직임이 생겨났고, 병사들은 한 군데로 몰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리벨의 위치를 특정하기는 쉬웠다.
문제는.
“……전하, 그런데 함께 있던 자는 아시는 자입니까?”
리벨을 안아 올려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준 남자.
그자가 문제였다.
나인은 그들이 포위망을 빠져나가자마자 남자를 기절시킬 생각이었으나, 남자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사람 하나를 든 데다, 가면을 써서 시야가 가려진 채로도 나인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를 낸 것이었다.
만일 그자가 적이라면 그자 앞에서 몇 분이나 버틸 수 있을까?
그자가 만일 대공비 전하를 노린다면?
나인의 질문은 마차의 열린 창문 틈으로 다른 그림자들에게도 들리고 있었다.
그림자들은 일제히 긴장에 휩싸였다.
그때 리벨이 마차에 털썩 널브러지면서 말했다.
“시스테인이었어.”
“예?”
나인의 턱이 떨어질 듯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