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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60)화 (60/167)

제60화

나인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모든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는 물론이고 그림자들은 평생 황태후의 그림자로 움직이며 몸을 단련해 온 자들이었다.

그런 자신들이 따라갈 수조차 없던 움직임과 속도.

그 검은 가면이 시스테인 폰 디란타라면 모두 이해가 갔다.

그들이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분이셨군요.”

나인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아무리 상대가 그분이셨다고 해도, 그림자들이 제대로 리벨을 지키지 못한 건 분명한 죄였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대공비 전하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가 가벼워지진 않습니다.”

―탁.

리벨 앞 마차 바닥에 나인의 무릎이 닿았다.

“벌해 주십시오.”

벌? 리벨이 멈칫했다. 물론 위험했던 건 맞았다. 하지만.

“시스하고 싸울 순 없었잖아?”

싸우면 싸운 대로 문제 아니야?

하지만 나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해도 대공비 전하와 떨어진 것은 명백한 제 불찰입니다.”

이 사람 말이 안 통할 것 같은데! 리벨이 머리를 싸맸다.

이러다가 사극처럼 자기 목이라도 알아서 벨 기세였다. 그만큼 나인의 표정은 엄청나게 심각해 보였다.

그래, 위험하긴 위험했지.

그 검은 가면이 시스테인이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쯤 여기 앉아 있지도 못했을 거다.

리벨이 생각했다.

확실히 위험했고, 죽을 뻔했다.

지금 조마조마한 건 목숨이 달랑거려서 그런 게 아니라 정체를 들켰을까 봐 조마조마한 것이다.

그리고 죽을 위기에서 살아난 주제에 이렇게 한가한 생각이나 할 수 있었던 이유도, 검은 가면이 다행히도 시스테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기가 막힌 우연이었다.

하필 그가 거기에 있을 줄은 리벨도, 나인도 몰랐으니까.

원래대로라면 나인과 그림자들을 벌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귀족들이 모두 그러하니까.

그리고 만일 이번 일이 황태후 리엔의 귀로 들어간다면…….

Oh…….

리벨은 속으로 탄식했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살벌한 결말이 날 것이다.

리벨은 손을 내저었다.

“다음부터 안 그러면 되지. 괜찮아.”

“예?”

나인과 다른 익숙한 그림자들이 바뀌고, 아니, 죽어 버리는 것보다는 낫다.

무엇보다 이렇게 자주 이야기하고 알고 지내던 사람이 죽는 건 싫었다.

“대공비 전하?”

“벌 안 내릴 거야.”

리벨은 일어나라는 뜻으로 나인에게 손짓해 보였다.

“하지만―”

뒷말을 이으려는 나인을 리벨이 직접 일으켜 세웠다.

“쓰읍.”

그러면서 다물라는 의미로 제 입에 검지를 대어 보였다.

그러다가 멈칫했다.

“혹시 이번 일, 황태후 폐하께 알렸어?”

알렸으면 내가 살리고 싶고 자시고 없을 것 같은데?

다행히 나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보고가 올라가기 전입니다. 급하시다면 당장―”

“아니, 보고드리지 마.”

사람 모가지 나란히 날아갈 일 있어? 리벨은 손을 거듭 내저었다.

근데 보고하지 말래도 보고할 것 같은데.

리벨은 결국 말을 정정했다.

“보고한다고 해도 내가 벌하길 원치 않는다는 말은 꼭 붙여.”

그 말에 나인이 침묵했다. 그런 그를 보자 문득 리벨은 생각나는 게 있었다.

“설마 이번에 동행한 그림자 모두가 책임이 있다고 보고되는 거야?”

그 말에 나인은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예.”

이해는 가는데……. 리벨은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쿵쿵.

결국 리벨이 마차 벽을 두드렸다.

“마차 잠깐 세워 봐.”

“……?”

나인은 의아해하면서도 마차 밖으로 손짓했다. 금세 뜻이 전해졌는지 마차가 서서히 멈춰 섰다.

―덜컹.

이내 마차가 길 한가운데에 세워졌다. 리벨이 마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니, 주변은 허허벌판이었다.

“…….”

그리고 그런 그녀의 앞에, 말에서 내린 채 얼굴을 드러낸 그림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번에 같이 온 그림자들 모두 여기 있는 거지?”

그 말에 나인이 대표로 답했다.

“주변 정찰을 진행 중인 인력 외에는 모두 있습니다.”

정찰까지 하고 있었어? 철저하게 주변을 경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리벨은 조금 입을 뻐끔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깐 이야기 좀 하자.”

“하명하십시오.”

그림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숙연한 분위기를 보니 이대로 뒀다간 단체로 모여서 자결이라도 할 분위기였다.

눈앞에 있는 그림자만 해도 다섯인데, 정찰을 나갔다는 사람들까지 합하면 못해도 열은 될 터였다.

“……원래 수가 이렇게 많았어?”

리벨의 질문에 한 여자가 입을 열었다.

“대공비 전하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 달게 받겠습니다.”

무거운 얼굴이었다. 이대로라면 말이 안 통할 것 같았다.

리벨은 난감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오늘 죽을 뻔한 건 맞지.”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림자들의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았을 때였다.

“하지만 난 너희를 벌할 생각 없어.”

그 말에, 이미 그 말을 들은 나인을 제외한 다른 그림자들이 멈칫했다.

“일단 내 옆에 있던 사람 죽는 것도 싫고, 나 구하려고 애썼던 사람들 죽는 것도 싫고, 무엇보다 상대가 시스였잖아.”

원작에서 본 바에 따르면, 시스테인의 무력은 그야말로 인간에겐 재앙급, 사기였다.

당연히 따라갈 자가 없었다.

“오히려 쓸데없는 피를 안 흘려서 다행이었지.”

물론 이건 억지였다.

그림자들이 그녀를 ‘검은 가면’에게서 보호하지 못한 건, 상대가 시스테인임을 알고 그런 게 아니니까.

하지만 리벨은 그들의 면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낯익은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나인은 물론이고 그녀가 이전에 빵을 입에 물려 줬던 사람이나, 잠입 취재 나갈 때 같이 갔던 사람들부터, 마부로 주로 있던 그림자도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저택에서 하녀로 지냈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황태후 리엔 폐하의 사람들이다.

결혼 생활이 계속되면 디란타 대공가 사람들하고 더 친해지겠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들에게 소홀해지고 싶진 않았다.

리벨이 입을 열었다.

“다음부터 이러지 않으면 돼. 그니까 황태후 폐하께 보고드릴 때, 내가 벌을 원치 않는다고 전해 드려. 아니,”

리벨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이건 내가 직접 전하는 게 낫겠다.

“내가 직접 보고드릴게.”

물론 그녀가 본 황태후 리엔이라면 ‘그래~?’ 하고 되묻고는 흥미롭게 이야기를 들어 준 다음, 슬쩍 그림자들을 바꿀지도 몰랐다.

리벨은 그것에 대비할 생각이었다.

좀…… 간이 부은 것 같지만 어쩌겠어요? 사람 죽는 게 더 무섭다고!

무엇보다 황태후 폐하의 아드님이었다니까요, 납치범(?)이!

“그래서 말인데…….”

그녀의 대비책은 이러했다. 리벨은 가장 왼쪽에 무릎을 꿇고 있는 그림자를 가리켰다.

“너는 이름이 뭐야?”

통성명 하고 얼굴 제대로 외우면 사람 바뀌는 걸 모를 리가 없으니까.

“101번입니다.”

그 말에 그림자가 바로 답했다.

“……아.”

원래 그림자들은 이름이 없었지. 이름을 지어 준 나인을 제외하곤 그들에게 이름이 없을 터였다.

리벨은 그들을 보다가 물었다.

“그럼 이름, 내가 지어 줘도 괜찮지?”

그림자들이 일제히 눈을 크게 떴다.

*  *  *

리벨이 그림자들의 이름을 모두 지어 준 후에야 마차는 다시 출발했다.

그녀는 정찰을 갔다가 돌아온 네 명의 기사까지 포함해, 나인을 제외한 8명의 기사들에게 모두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들은 처음엔 낯설어하면서도 감사해했다. 놀랍게도 얼굴에 홍조를 띠는 자들도 있었다.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네.”

리벨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나인이 슬그머니 답했다.

“……이전부터 제 이름을 부러워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응?”

진짜? 리벨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럼 진작 지어 달라고 하지.”

하긴, 갑자기 황태후 폐하도 아니고 나한테 와서 이름 좀 달라고 하긴 뭐했을 것이다.

리벨이 볼을 긁적였다.

“앞으로 자주 불러 줘야겠네.”

“……모두 좋아할 겁니다.”

나인은 고개를 거듭 숙였다. 그는 그림자들이 마차 밖에서 제 이름을 뇌까려 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지금껏 이름이 없었던 자들에게 주어진 이름.

리벨은 모르는 듯했지만 그 무게는 굉장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황태후 리엔에게 충성했지만 자신들이 언제든 쓰이다 버려질 도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에 섭섭해하기에는 너무나 오랜 기간 그림자로서 살아왔다.

게다가 고아로 길거리에서 죽어 가던 그들을 거두어 기른 것이 황태후였다.

감히 은인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름이 없다는 건 다시 말해, 세상의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름이 생겼으니 달라졌다.

물론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리벨 폰 디란타, 대공비 전하 한 분뿐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이름이 소중했다.

번호가 아니라 이름.

다시 말해 인격체로 자신들을 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새롭고, 따뜻한 사실이었다.

“시스가 먼저 들어온 건 아니겠지?”

자신이 어떤 사람들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는 걸 아실까?

나인은 불쑥 의문이 들었다. 아무래도 창밖을 내다보며 나름 눈을 부리부리 뜨고 있는 이 대공비 전하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이미 살펴보았는데 아직 들어오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벌써 알아봤어?”

리벨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인은 재빨리 표정을 진지하게 가라앉혔다.

“예. 먼저―”

그림자를 보내 알아보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려던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정정했다.

“‘엘브 경’이 정찰하고 돌아왔습니다.”

리벨이 준 그림자의 이름 중 하나였다.

“엘브가?”

리벨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원래 ‘112번’이었다는 그녀는 엘브라는 이름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뿌듯해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얼른 들어가자.”

그러고는 검지를 제 입에 붙여 보였다.

“우리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는 거야. 알았지?”

“알……겠습니다.”

나인이 그답지 않게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리벨은 그런 그를 보다가, 바깥의 그림자들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황태후 폐하, 설마 그림자들한테 이름 붙이면 안 되는 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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