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잘 들어. 이제부터 우리는 외근 일찍 끝나서 들어온 사람들인 거야. 알았지?”
리벨은 나인과 다른 그림자들에게 몇 번이나 거듭 강조했다.
절대 틸라 저택에 내가 있었던 걸 들키면 안 된다!
리벨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림자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일단 들어가서 바로 씻고 옷도 갈아입고…… 아, 아니 저 옷 태울 수 있어?”
그때 리벨의 눈에 띈 건 하인의 옷이었다.
나인은 저도 모르게 웃으려다가 목을 가다듬었다.
“그, 뒤처리는 흔적 없이 해결하겠습니다.”
“그래? 아, 전문가였지.”
리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들에게 윙크한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부탁해! 하녀들은 빨리빨리 나 따라오고.”
그러고는 나름 후다닥 걸음을 옮겨 저택으로 향했다.
첩자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리벨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저택에 들어서면서도 마음이 두근두근거렸다.
“마님, 다녀오셨습니까?”
집사 헬리아는 리벨의 마차가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채비를 하고 있었던 듯, 바로 그녀를 맞이했다.
“응. 움직였더니 목욕이 좀 하고 싶은데…….”
리벨이 크흠,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따뜻한 물 좀 준비해 줘.”
안 어색했겠지? 원래도 잠입 취재 많이 하는데, 오늘따라 정말 어색했다.
어색하면 안 돼!
리벨은 재차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헬리아가 손짓했다. 리벨은 그녀를 따라가면서 하녀로 변장한 그림자들, 아니, 엘브와 미엘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묘한 유대감이 감돌았다.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지금쯤 리벨이 틸라 상단에 다녀왔다는 흔적은 사라지고 있을 것이었다. 그녀가 원래 가기로 했던 영지에 갔다 왔다는 증거만 남을 터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시스테인이 저택에 돌아왔다.
* * *
“돌아오셨어요?”
리벨은 그의 마차가 돌아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저택 밖으로 달려 나갔다.
마차에서 내리는 그의 얼굴은 다소 피곤해 보였다.
피곤할 만도 하지.
틸라 저택 비밀의 방도 찾아, 거기서 탈출도 해, 나 들고 뛰기도 해, 거기다가 출장 나간 일의 뒤처리까지……
잠깐, 근데 결론적으로, 이 사람은 출장을 틸라 저택으로 간 건가?
그것도 검은 가면으로?
……왜? 제도기사단 단장이 그런 일까지 해?
“예상보다 조금 늦었습니다.”
그때 시스테인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리벨은 생각을 끊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스테인을 살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못 살폈는데, 설마.
“다친 곳은 없으신 거죠?”
리벨이 그를 이리저리 살폈다.
시스테인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기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절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군요.”
“네?”
누누누누누구? 모르는 척!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임무 중에 다치지 말라는 자를 만나서요.”
그 말에 리벨의 빙그레 웃는 얼굴에 금이 갈 뻔했다.
그거 나잖아!
“친절하신 분이네요.”
리벨은 좀 더 웃었다. 너무 친절하시네! 하하하하!
“…….”
시스테인은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리벨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리벨이 눈을 깜박였다.
왜 그러세요? 혹시 아까 본 제 눈동…… 아니, 그 하인 눈동자가 신경 쓰이시나요?
신경 쓰이겠지! 엄청나게 신경 쓰이겠지!
하지만 필사적으로 그녀는 모른 척을 해야 했다.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그녀가 몇 번 더 눈을 깜빡였다.
옛날 같았으면 이렇게 조각 같은 얼굴이, 눈부신 벽안이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두근두근거렸을 것이다.
이 사람 행동에 로맨스의 R도 없다고 해도 어쨌든 설렜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왜…… 이렇게…… 목이 달랑달랑 흔들리는 것만 같지……?
“……아닙니다.”
시스테인은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 * *
목욕을 마친 시스테인은 리벨과 함께 저녁 식사 자리에 앉았다.
조금 이른 저녁이었지만, 리벨이 직접 준비하라 이른 것이었다.
“외근 다녀오셔서 피곤하실 것 같아서요.”
피곤할 땐 맛있는 거지! 리벨이 반짝이는 눈으로 상을 둘러보았다.
정말 말 그대로 상다리가 휘어져라 접시들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듣자 하니, 리벨도 그 사이에 외근을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일이 생겨서요.”
리벨이 간단히 답했다. 나갔다는 사실을 숨길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 영지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 내가 간 곳이 틸라 영지라고 생각하겠어?
생각하……겠……어? 안 그러겠지?
리벨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도 시스테인은 그녀의 눈을 보고 있었다.
“…….”
식기를 움직이던 손마저 멈춘 채였다. 아주 시선에 불타오를 지경이었다.
“혹시 제 얼굴에…… 진짜 뭐 묻었나요?”
아니면 제 눈을 틸라 상단주 저택에서 보신 것 같아서 그러세요?
그렇게 물을 순 없으니 모른 척 딴청을 피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시스테인은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물었다.
“리벨, 혹시 그 눈.”
역시 눈이었던 거지! 눈이 신경 쓰이셨던 거지! 리벨이 침을 꼴깍 삼켰다.
“유전입니까?”
이……거는 예상 내의 질문이다! 리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걸요? 저희 아빠 눈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리벨은 이벨라 자작의 퀭한 눈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별로 닮지 않았거든요. 어머니 눈은 잘 모르겠어요. 무슨 색이셨다고 했지?”
리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작 속 리벨 이벨라의 어머니는 일찍 죽었으니 그녀가 제 어머니의 눈 색을 모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흑안이셨습니다.”
“그렇……”
그건 언제 알아보셨습니까? 리벨은 혀를 깨물 뻔했다.
“―여하튼 이 눈이 신기하세요?”
리벨은 간신히 이야기를 돌렸다. 신기해할 수도 있지. 이제 와서 새삼 신기해하는 게 이상하지만.
어디서 나랑 같은 눈을 보고 온 게 분명하지만.
필사적으로! 모른 척!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좀 많긴 했어요. 간혹 제국인들 중에 특이한 눈 색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리벨이 제 눈을 가리켜 보였다. 이건 그가 오기 전까지 예상 질문에 대한 답으로 준비했던 것 중 하나였다.
“어릴 때부터 그런 거 아닐까 생각했었어요.”
흔치 않은 눈 색이긴 하잖아요? 눈을 몇 번 깜빡이던 리벨이 빙그레 웃었다.
사실 나도 태어나서 나밖에 못 봤거든요! 하하하하!
그 사실을 말할 순 없으니 최대한 가볍게 말했다.
“그렇습니까…….”
시스테인이 중얼거렸다. 리벨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갑자기 눈은 왜요? 전 시스 벽안이 예쁘다고 생각한 지 꽤 됐는데.”
사실 첫 만남이 정신없어서 그랬지, 조각 같은 미남상이니까.
그렇게 말했던 리벨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나…… 너무 들이댔니?
“…….”
시스테인은 한동안 침묵했다.
마치 유리에 비치는 제 눈을 들여다보듯 시선은 한곳에 고정한 채였다.
진짜 너무 들이댔나? 이 어색한 침묵 어쩔 거야?
리벨이 침묵을 깨기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순간이었다.
시스테인의 푸른 눈이 다시 그녀를 향했다. 리벨은 살짝 입을 벌렸다.
저 푸른 눈에, 일순 다정함이 깃든 것 같은 건 착각일까─
“어딘가에서 본 것 같아서요, 그 눈.”
다음 순간 리벨은 그의 눈에서 느껴지는 다정함이고 뭐고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네?”
아아아니! 사람이 본의 아니게든 본의 맞게든 플러팅을 했으면 반응을 해 달라고!
안 들은 것처럼 그때 이야기 꺼내기 있기 없기???
리벨은 머리를 싸매고 싶었다.
“이번에 외근 나갔을 때, 리벨과 같은 눈을 봤습니다.”
그 말에 리벨은 아주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짜요?”
“예.”
그으으야 당연히 보셨겠죠!
리벨은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이 상황, 이 대화, 이 온도, 이 습도 모두 대비하고 있었다!
“전 저랑 같은 눈 색 못 봤는데. 어디 닮은 사람이 있겠거니 하긴 했어도…… 세상은 넓잖아요.”
리벨은 가볍게 말했다.
그런 그녀를 보다가, 시스테인이 입을 뗐다.
“마력을 가라앉히는 그 능력까지, 말입니까?”
저것도! 질문할 줄 알았다! 이런 날카로운 사람!
이거 때문에 접촉 안 하려고 하인 차림으로 그 좁은 방에서 그렇게 애썼던 건데!
하지만 거길 빠져나오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시스테인이나 나인이면 모를까, 그녀에게는 사방으로 조여 오는 병사들의 포위망을 피해 빠져나갈 능력이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안겨서 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마력을 가라앉히는 사람이 또 있었어요?”
그건 그거고! 놀라는 건 놀라는 거다! 리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이번 외근에서 만난 자가 그러하더군요.”
시스테인이 담담하게 답했다.
“리벨과 눈도, 능력도 닮아 있는 자였습니다.”
그의 시선이 리벨의 자줏빛 눈동자로 향했다.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그런 사람이 있다니…….”
정말 누군지 나도 궁금하네…… 나만 아니면 너무 궁금할 것 같네…….
“그런데 기사단 업무에서, 외부인과 그렇게 가까이서 접촉할 일이 있나요?”
리벨은 손끝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볼은 조금 붉어진 채였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건, 디엘렌 연회에서의 그의 모습이었다.
나와 접촉하면 마력이 가라앉는다고 했지.
“접촉이라 하시면……?”
시스테인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네. 저번에 말씀하시길 이렇게 닿아야 마력이 가라앉는다고.”
리벨이 다시 손을 움직여 보였다.
의아해하기! 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기!
그런 그녀에게 시스테인이 아, 하더니 말했다.
“접촉할 일도 간혹 있지만, 애초에 근처에만 있어도 느껴집니다.”
그가 테이블을 가리켰다.
두 사람 사이엔 펼쳐진 그릇의 개수만큼 넓은 테이블이 펼쳐져 있었다.
“이 정도만 가까워도요.”
그으럼…… 그 비밀의 방에서 안 닿으려고 애썼던 게 다 헛짓이었다는 소리네?
리벨은 슬그머니 접시로 시선을 내렸다.
이거 들키기 직전……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