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아니야, 난 그때 남자였다!
리벨은 재빨리 새하얘진 머릿속을 다시 복구하려 애썼다. 그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기하네요.”
정말 신기하네요오오오. 모가지가 마치 겨울바람에 떨어지기 직전의 바삭한 나뭇잎처럼 팔랑거리기 시작했다.
들켰나? 안 들켰……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내가 거깄던 걸 알았으면 이 사람이 굳이 이렇게 떠볼 사람일까?
게다가, 그때 그녀는 분명히 남자 모습이었다.
하녀가 아니라 하인으로 변장한 건 정말 신의 한 수였다.
누가 마법사도 아니면서 이런 변신 능력을 타고났다고 생각하겠어?
시스테인은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다.
좋아, 변신 능력만 안 들키면 된다!
점점 목이 조여 오는 것 같지만, 기분 탓이겠지! 하하하하!
이대로라면 침묵이다! 어색한 침묵은 안 돼!
리벨은 필사적으로 물었다.
“그런데 어디 다녀오셨는지 여쭤봐도 되나요?”
이걸 내가 왜 물어보고 앉아 있지? 물론 물어보는 게 이상하진 않았다.
그래, 어차피 기사단 내부 일이니 제대로 말 안 해 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주제를 자연스럽게 돌리는 거―
“틸라 상단의 별저에 다녀왔습니다.”
……저기, 너무 오픈하시는 거 아닙니까? 공무원(?)이 그렇게 막 일 얘기해도 돼요?
“상단의 별저예요?”
리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사단에서 그런 곳에는 왜 들르는지 상상도 안 가는 척! 눈 동그랗게 뜨기!
그런데 이번 표정은 꾸민 것만은 아니었다.
대체 제도기사단장인 그가 왜 틸라 상단의 저택에서 검은 가면으로 분장해 있었는지는 궁금했다.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말해 줄 생각이 없는지, 시스테인은 짧게 답했다.
만약에 비밀의 방에서 안 만났으면, 이 사람이 검은 가면으로 변장한 거 몰랐으면 디란타에서 소금 장사 하는 줄 알았겠다!
리벨은 뒤로 주르륵 흐르는 식은땀을 무시했다.
그리고 다음 날, 대망의 기사가 떴다.
* * *
[두 귀족 가문과 상단들의 은밀한 거래]
[최근 니아 상단 성장세의 비밀]
[페티아 후작가, 디엘렌 가와의 사이에 이어…… ‘충격’]
[다닐 백작가, 유서 깊은 귀족가의 이면]
다음 날 크라이베리 신문에 올라온 온갖 기사들이었다.
“오…….”
리벨은 그 기사들을 보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첫 번째 기사, ‘두 귀족 가문과 상단들의 은밀한 거래’는 리벨 자신이 쓴 것이니 당연히 올라올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기사들은 의외였다.
자신의 기사로 불이 붙어 다른 후속 기사들이 나올 줄 알았지, 이렇게 동시에 기사들이 터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기사를 살펴본 리벨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감찰기사단?”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여러 신문 기사를 종합해 보면 사실은 이러했다.
문제의 두 귀족 가문과 니아, 틸라, 루이나 세 상단에 거의 동시에 감찰기사단이 떴다고.
페티아 후작가와 다닐 백작가였구나…….
리벨은 다른 기사들을 보며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하필 시스테인과 거기서 만나는 바람에, 그리고 시스테인이 검은 가면으로 변장한 바람에 그녀는 세 가문의 뒤를 봐주는 가문들의 정체를 알아 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건 나라에서 알아봐 주겠지, 싶어 기사를 올렸던 것이었다.
하지만 감찰에서 이미 그들을 쫓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리벨의 기사에는 니아와 틸라 상단이 투라 영지 일대의 소금값 인상에 관여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실려 있었다.
루이나 상단에 대해서도 올리고 싶었지만, 하필 루이나 상단으로 변장하는 바람에 확실한 증거를 못 잡아서 안 올렸지만.
[루이나 상단, “일어나 보니 숲에 있어” 도움 청하던 중 감찰에 체포돼]
하지만 루이나 상단에 대한 기사도 이미 올라와 있었다.
“숲에서…… 기절?”
재웠다는 게 이런 거였니? 리벨은 볼을 긁적였다.
나인과 다른 그림자들이 그들을 재웠다는 게 아마 이런 의미였던 모양이었다.
[루이나 상단주 리 루이나는 틸라 상단의 별저로 향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감찰기사 시엘은 “그사이 루이나 상단에는 이미 감찰기사단이 파견되었고, 상단 본부가 비어 있어 도주를 의심하던 도중 틸라 상단의 저택에 루이나 상단 일행이 나타났다”며, 무사히 체포했다고 밝혔다.
한편 감찰기사 시엘은 “두 가문과 거래하는 상단들이 있다는 정보는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확실한 증거 확보에 시간이 걸렸던 것”이라고 밝히며, “감찰기사단에서는 이번 일을 가볍게 보고 있지 않다”며 페티아 후작가와 다닐 백작가, 그리고 세 상단에 대한 처벌을 시사했다.]
이미 알고 있었구나……. 리벨이 볼을 재차 긁적였다.
루이나 상단 사람들은 아직 소금값 인상에 직접 가담하진 않았으니 미수로 끝나겠지만, 그래도 감찰기사단의 조사를 받는 모양이었다.
뭔가 잠입 취재한 것치고는 별거 못 건진 것 같지만, 결과는 좋았으니 됐다. 리벨의 얼굴이 폈다.
어쨌든 소금값은 곧 정상화될 것이다. 편지를 보내온 상인도 걱정이 덜어질 터였다.
―사락.
그렇게 생각하며 리벨이 신문을 넘기려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없는 듯 가만히 있던 시스테인이 그녀의 손을 막았다.
“잠시만.”
“네?”
리벨이 멈칫했다. 아니, 이 기사에 관심 많으세요?
하필 그의 손끝이 닿아 있는 기사는 리벨의, 아니 벨의 기사였다.
“벨 기자의 기사가 있어서요.”
시스테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 벨 기자 기사는 다 보신다고 하셨죠?”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막았다간 당장 수상해진다.
리벨은 슬그머니 신문지를 넘기던 손을 내렸다.
―사락.
다시 드러난 크라이베리 1면으로, 시스테인의 시선이 박혔다.
역시 그는 그녀의 기사를 읽고 있었다.
관심 가시는 건 알겠는데 안 보시면 안 될까요?
리벨이 조마조마한 가운데, 시스테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
리벨이 그를 살폈다. 자세히 보니 그는 벨의 기사를 보는 게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 기사의 사진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시스?”
사진에 뭐 있나? 리벨이 사진과 그를 번갈아 보았다.
“이 사진…….”
그러자 시스테인이 사진을 가리켰다.
“제가 갔던 저택이 이 틸라 상단 저택입니다만,”
그야 알고 있지만! 리벨은 모른 척하려다 멈칫했다.
그런데 사진은 왜요?
혹시 제 사진에 저라도 찍혔나요?
리벨이 필사적으로 제 사진을 살필 때였다.
시스테인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이 사진은, 저택 내부에 온 자만 찍을 수 있는 사진입니다.”
난 또 뭐라고. 리벨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야 저택 안 사진이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하하하하! 사람 놀라게 진지한 표정 짓지 말라고요! 하하하하!
리벨이 진땀을 뺄 때, 시스테인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물론 맞는 말씀입니다만, 이 저택은 애초에 틸라 저택에서 귀빈을 모실 때만 열리는 곳이고, 원래 쓰이지 않는 저택입니다. 다시 말해.”
그답지 않게 길게 이야기한 그가 기사의 사진을 가리켰다.
“벨 기자는, 이날 저택에 온 겁니다.”
“네?”
리벨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숨기지도 못했다. 물론 놀라는 상황이 맞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놀랐다.
아아아니 왜 그게 그렇게 돼? 최대한 평범한 사진 잡았는데!
“그럼 틸라 상단에서 기자를 불렀다는 말씀이세요?”
그 말에 시스테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감찰에서 알아볼 일이겠지요.”
구구굳이알아봐야할까요? 공무원(?)이면 시간도 없고 바쁘고, 어?
리벨은 머리를 싸맸다.
“그런데 이런 불법적인 일을 하는데 기자를 불렀을 것 같진 않은데요…….”
이럴 땐, 일반론 발사!
그녀의 말에 시스테인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의 청명한 벽안이 리벨을 비추었다.
양심이 박살 날 것 같으니까…… 그런 맑은 눈으로 나 쳐다보지 말아 줄래요?
심장이 쥐어 짜일 듯 쫄깃해지는 가운데 리벨은 속으로 울어 댔다.
기자가 올 리가 없잖아요? 그죠?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구린 짓 하려는데 거기 기자를 왜 부릅니까? 그렇죠?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 외침이 들릴 리가 없는 시스테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앞에 폭탄을 투하했다.
“부른 게 아니라, 잠입한 거겠죠.”
으아악! 그렇게 정확하게 짚지 마!
“이날에요?”
리벨은 말하면서 기사를 살폈다.
감찰기사단은 두 가문과 세 상단의 회동 날에 바로 덮쳤다고 했다.
아마 나랑 시스가 벗어나고 나서 곧바로 덮쳤겠지…… 잠깐만.
근데 시스가 검은 가면으로 분장한 거 아니었어?
다시 말해 당일에 그곳에 있던 검은 가면은 시스테인이 아니었다.
기사에는 백색 가면의 정체가 다닐 백작가라고 나와 있었다.
그럼 검은 가면은 페티아 후작가 사람인데…… 그자로는 시스가 변장했고.
그런데 그 상태로 감찰기사단이 덮쳤다면, 왜 감찰기사단은 검은 가면인 시스를 안 잡아갔지?
나랑 같이 먼저 자리를 벗어나서 못 잡았다고 하면, 적어도 놓쳤다는 이야기는 쓰여 있어야 하지 않나?
아니, 잠깐만…….
[회동에서 ‘검은 가면’ 블랙 경으로 위장했던 페티아 후작가의 대리인은 현장에서 붙잡혔다.]
기사에는 검은 가면이 붙잡혔다고 분명히 나와 있었다.
리벨은 눈을 깜빡였다.
검은 가면은 이미 잡혔는데, 내가 저택에서 봤던 검은 가면은 시스테인……?
어떻게 이렇게 되는……?
눈을 깜빡이던 리벨이 입을 떠억 벌렸다.
그 모든 사실이 가리키는 건 한 가지였다.
설마 이 사람이,
“감―”
……찰기사단은 원래 신분 밝히면 안 되지, 참.
리벨은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서 대외 업무를 담당한다는 시엘 경만 인터뷰를 하며 이름을 밝힌 상태라고 했다.
리벨은 입을 재빨리 다물어 버렸다.
그때 시스테인이 말했다.
“예, 벨 기자는 이 날에 왔을 겁니다. 그리고,”
그의 손끝이 사진을 가리켰다.
“감찰기사단이 거래 증거를 잡기 위해 저택을 뒤집었을 텐데, 이 사진이 깨끗한 것도 그렇고…….”
사진을 가리키던 그의 손끝은 사진 안의 화분에 멎었다.
“이 화분의 꽃 상태는 감찰기사단이 덮치기 전에 제가 봤던 상태와 같습니다. 다시 말해, 벨 기자는 이날 저택에 온 것도 모자라…….”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택을, 활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말이 서늘하게 울렸다.
리벨이 입을 뻐끔거렸다.
벨……은 내가 아니다! 아니다! 아아아니다! 리벨은 애써 속으로 외쳐 댔다.
들키기, 일보 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