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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63)화 (63/167)

제63화

리벨도 시스테인도, 부업(?)을 제하고라도 원래 바쁜 사람들이었다.

대공령이라는 큰 영지의 주인과 안주인이니 당연했다. 그들의 위치에서 기본적으로 처리해야 할 업무들이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주로 머무는 디란타 별저는 제국령에 있는 만큼, 저택에서 처리해야 하는 일과 대공령에서 처리해야 하는 일까지 나뉘어 일은 두 배이다시피 했다.

그중에서 리벨이 주로 처리하는 건 다른 가문 간의 거래와 사교회, 대공령에 대한 소문이나 저택 내부의 일 등이었다.

그런데.

“……많아도 너무 많은데?”

리벨은 며칠 자리를 비웠다고 산처럼 쌓인 서류와 눈이 마주쳤다.

집사 헬리아는 난감한 듯 웃었다.

“마침 사교 시즌이라 처리하실 업무가 많아졌습니다. 최대한 저희 선에서 걸러냈습니다만…….”

리벨은 처리해도 끝나지 않는 서류 무더기를 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로가 눈을 무겁게 하는 듯했다.

안 그래도 틸라 저택에서 시스테인을 만나서 긴장한 데다가, 그와 함께 크라이베리 신문을 보고 기겁한 것 때문에 두방망이질하는 심장을 가라앉히지도 못했다.

그 덕에 그녀는 그야말로 피로 최고조인 상태였다.

그 상태로 일 처리를 하려니 당연히 더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업무 효율도 떨어졌다. 문제는 그렇다고 대충 처리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업무 처리 속도는 몇 배로 더뎌졌다.

실수해서는 곤란하니까.

거의 반쯤 혼이 빠진 채로 일을 처리하다가 몇 번이고 거듭 확인을 반복하던 리벨은 결국 펜을 든 손을 늘어뜨렸다.

그녀가 헬리아를 올려다보았다.

“시스는 피곤하지 않대?”

그 질문에 헬리아는 잔잔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원래 외근이 잦으셔서 괜찮으신 듯합니다.”

사람의 체력이 아니야……. 리벨이 입을 뻐끔거렸다.

최근에는 두 사람 다 바빠서 밤을 보내진 못했지만, 밤마다 느끼는 사실이기도 했다.

하룻밤을 치르고 나면 리벨은 어김없이 늦잠을 잤지만, 이 사람은 멀쩡한 상태로 집무실에서 발견됐던 것이다.

밤을 리드하는 건 시스테인인데도 그랬다.

그야말로 강철 인간이 아닐 수 없었다.

―달칵.

리벨은 커피를 물처럼 들이켜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반쯤 식어 벌컥벌컥 마시기 좋은 커피였다.

이 기분, 익숙하다 했더니 여기 빙의하기 전에 야근할 때가 딱 이랬다.

그녀는 눈을 꽉 감았다 떴다. 그리고 다시 서류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실수는 곤란하다.

“피곤하시면 조금 미루시는 것이…….”

헬리아는 그녀를 보다가 말했다. 그녀가 일을 시작하고 나서 벌써 몇 번째 제안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리벨은 손을 내저었다.

“이미 미뤄진 거잖아.”

미루면 대공가의 사용인들이 곤란해진다는 걸 리벨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리벨은 더욱 이 일을 미룰 수가 없었다.

그녀는 벨 기자이기도 했지만 디란타 대공비이기도 했다. 그리고 디란타 대공비는 디란타 저택의 사용인들은 물론이고 디란타령의 영지민들까지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기자 일 때문에 이쪽 일에 소홀해지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이 대공비라는 자리를 ‘이용’하지 않겠다는 그 약속을 지킨다는 걸 시스테인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그랬다.

“…….”

그리고 일 처리를 더 미룰 수 없다는 걸 그녀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헬리아는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리벨은 한참 동안 서류 처리를 하다가 헬리아에게 손짓했다.

“제대로 처리된 것 맞지? 네 번 정도 더 확인했는데.”

한 번 더 확인해야 하나? 리벨이 종이를 훑어보려는 때였다.

헬리아가 그녀 옆에 쌓인 서류 뭉치를 다른 데로 옮겨 버렸다.

“더 확인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충분합니다.”

헬리아는 가문의 안주인을 조금 안쓰러운 눈으로 보았다.

분명 피곤하실 텐데, 이렇게까지 일하신다는 건 분명 대공가 사람들을 위해서이리라.

감찰 조력자 일까지 하시려면 굉장히 힘드실 텐데도.

“사용인들이 마님을 많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요즘 피로해 보이신다고요.”

헬리아가 입을 뗐다. 사용인들은 헬리아와 생각이 비슷했다. 감찰기사단에게 조력자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조력자들은 ‘제국의 안녕’을 위해 기꺼이 제 목숨을 걸고 일하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대공비 전하께서 그런 조력자셨다니.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쉬실 수 있게, 대공가의 일은 줄여 드리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다른 곳도 아니고 감찰기사들이 우글거리는 디란타 가인데.

그 결과 줄이고 줄인 업무량이 이것이었다. 헬리아는 물론 그 사실을 굳이 말하진 않았다.

“좀 피곤하긴 한데…… 이제 쉴 거니까, 괜찮아!”

리벨은 뇌가 녹는 기분이었지만 눈을 꽉 감았다 떴다.

그러다가 문득 헬리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디란타 대공령 한번 돌아봐야 하는데.

아무리 몬스터가 넘쳐흘러 위험하다는 대공령이라지만, 대공비씩이나 돼서 거길 한 번도 안 들른다는 건 좀…….

“……헬리아.”

결국 리벨이 헬리아를 불렀다.

“예.”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그녀에게 리벨이 물었다.

“대공령에 곧 들르게, 준비할 수 있을까?

“예?”

그 말에 헬리아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리벨은 손을 펴 보였다.

“위험한 건 알아. 근데 한 번도 안 들를 순 없잖아. 가문의 안주인인데. 대공령을 서류가 아니라 실제로도 살펴봐야지.”

난 앞으로 기자도 기자지만 대공비로서 살 테니까.

대공가에 소홀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도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지만 대공령도 둘러보지 않은 대공비를 대공령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상황을 알아보겠습니다.”

헬리아는 결국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가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최근에 대공령에 전하께서 들르시지 않아 상태가 좋진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말에 리벨이 입을 살짝 벌렸다.

“아, 시스가 관리하러 간다고 했지.”

“예. 전하께서 대공령에 들르실 때마다 몬스터의 수가 폭감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안정적인 시기가 찾아옵니다.”

리벨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 요컨대…….

“……몬스터를 잡으러 가는 거였어?”

대공령을 단순히 둘러보러 가는 게 아니라? 물론 몬스터를 겸사겸사 잡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리벨의 말에 헬리아는 도리어 놀랐다.

“모르셨습니까? 전하께서는 한 달에 한 번 몬스터들의 수를 줄이러 대공령에 직접 출정하십니다.”

아니, 굳이 그런 얘기 안 하는 사람이니까 몰랐지……. 리벨이 볼을 긁적였다.

잠깐. 그런데.

“―결혼하고 한 번도 안 가신 것 아니었어?”

그럼 지금 대공령 상황이 어떻다는 거지? 리벨의 얼굴이 조금 새하얘졌다.

헬리아는 안심하라는 듯 두 손을 펴 보였다.

“대공령의 병력이 있으니 몬스터가 지나치게 불어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녀는 안심하라는 듯 웃어 주었다. 리벨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너무 오래 안 가면 안 좋을 것 같은데…….”

그러면서 그녀는 마저 처리한 서류를 헬리아에게 건넸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마님.”

헬리아는 공손하게 그 서류를 받아 들었다.

리벨은 전투(?)가 끝나고 어지럽혀진 책상을 보다가 기지개를 켰다.

“책상 정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헬리아의 말에 리벨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줄래?”

청소까지 할 정신머리는 없다고 생각한 참이었다. 리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오늘 업무는 여기까지.”

이따가 시스한테 대공령 이야기 해 봐야겠다.

리벨은 자리에서 일어나 목 운동을 하며 집무실을 나섰다.

서류에, 제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한 것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로.

*  *  *

리벨이 처리한 서류를 최종적으로 다시 확인하는 건 당연히 가주인 시스테인이었다.

“……이걸 다 처리하셨다고?”

시스테인은 생각보다 많은 리벨의 업무량에 인상을 썼다. 그러면서 서류를 받아 들었다.

최종 결재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

그 서류를 보던 그는 차가 식는 것도 모르는 채 서류를 살피기 시작했다.

살짝 눈썹을 치켜올린 그는 손끝으로 서류를 매만져 보았다.

정확히는 서류에 쓰인 글씨 위에.

문장 끝 부분에 힘을 주는 거친 글씨체.

“이건…….”

최근에 본 적이 있는 글씨체였다.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하인?”

그의 업무 특성상 이런 것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만큼 신중한 사람이었다.

하인과 리벨의 글씨체가 비슷하다…….

그 하인이 썼던 글씨가 있다면, 분명히 대조해 볼 수 있을 텐데.

지금으로서는 이 사실 하나로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

하지만 시스테인은 서류의 글씨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때였다.

―툭.

서류들 사이로 편지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정확히는 서류 가장 위에 있었던 것을, 글씨체에 정신이 팔린 그가 뒤늦게 발견한 것이었다.

[시간이 되면 아가와 함께 들르렴. 티타임을 준비했단다.]

그건 황태후 리엔의 짤막한 편지였다. 시스테인은 작은 편지 봉투에 다시 편지를 집어넣었다.

저택의 일은 물론이고 제도기사단의 업무까지 심각하게 밀려, 이번 티타임에 가는 건 무리일 듯싶었다.

그는 빈 편지지에 답장을 간단히 쓰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

어머니가 유독, 근래 들어 자주 편지를 보내시는 느낌인데.

물론 원래도 관심 있는 곳에는 신경을 많이 쓰시는 분이긴 했다.

그리고 그는 제 어머니가 리벨에게 유독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특이한 사람을 발견하면 관심을 가지시기는 하지만.

그가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그가 보기에도 리벨은 첨언할 필요도 없이 특이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재차 고개를 기울였다.

어머니와 리벨.

두 사람이 친하게 지내는 거야 좋은 일이었다.

그도 제 어머니인 리엔이 어떤 소문에 휩싸인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제 목을 귀히 여기는 자라면 리엔을 무서워한다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가 리벨을 마음에 들어 하신다면 다행이었다. 리벨 역시 티타임에 갈 때 그렇게 큰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진 않았다.

“…….”

물론 정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건지, 어머니에게 맞춰 주시느라 그래 보이는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 알 일이었다.

“…….”

그렇게 생각하던 시스테인은 멈칫했다.

실로 오랜만에 되살아나는 걱정과 감정이었다. 그리고 거미줄처럼 생각이 이어졌다.

감정을 가라앉히는 건, 타인에게 관심을 끊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우웅.

또 무엇 때문일까. 심장 근처의 마나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는 인상을 쓰면서 재차 생각했다.

주변에 관심을 끊고, 마음을 걸어 잠그고, 최대한 외부와의 접촉을 줄이는 것만이 마력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오래전에 알았던 것이었다.

“…….”

그런데, 자꾸만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흔들렸다.

어렸을 때 사고 이후로 단단하게 자물쇠를 걸어 잠가 놓았던 마음이 자꾸 열리려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그 자줏빛 눈동자에.

눈을 가늘게 뜬 그가 눈앞에 그려지는 그녀의 모습을 지우려 애썼다.

대공령에 들러 마력을 풀어놓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마력이, 다시 묘하게 들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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