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달칵.
그날 저녁, 시스테인은 리벨보다 몇 분 늦게 침실에 들어왔다.
잠들 준비를 마친 리벨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저택이 넓으니까 같이 있어도 같이 있을 틈이 없네요.”
특히 일이 바쁘니까 더. 리벨이 인사 겸 건넨 말에 시스테인은 짧게 묵례했다.
“불편하시다면 집무 공간을 옮기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요.”
뭔 말을 못 하겠네! 리벨은 난감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는 사이 그녀에게 다가온 시스테인은, 그녀의 눈을 다시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제가 그러고 있는 줄도 모르는 것처럼 생각에 빠진 눈이었다.
결국 리벨이 물었다.
“……아직도 그 사람 생각이 나세요?”
그 하인.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 실례였겠군요.”
“네?”
또 뭐가 실례야? 실례 한번 많은 사람이었다.
리벨이 되묻자 시스테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눈을 보고 다른 사람 생각을 한다는 것이.”
시스테인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반적으로 부부 사이에서는 실례라고, 들었습니다.”
그 말은 왠지 굳이 덧붙인 것 같았다. 리벨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게…… 따지자면 딴 사람 생각하신 게 아니긴 한데…….
여기선 내 생각 안 해 주면 안 될까요?
리벨은 그 염원을 담아, 짐짓 불편한 척 눈을 가늘게 떴다.
“좀…… 묘하긴 하죠?”
그니까 지난 일은 잊읍시다! 예?
그녀의 내면의 소리가 들릴 리 없는 시스테인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확실히 실례였군요. 죄송합니다, 리벨.”
그가 깍듯이 묵례했다.
아니, 죄송한 건 따지자면 이쪽이거든요? 이걸 말할 수도 없고!
리벨이 다시 양심의 딜레마에 빠지는 사이, 시스테인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죄송스러운 것이,”
또 있나요? 사실 제가 벨인 걸 알았나요? 그래서 실례지만 목을 좀 베어야 한다는 뭐 그런 건 아니죠?
멘탈이 바스러져 가는 리벨에게, 시스테인이 꺼낸 문제는 다행히도 사소한(?) 것이었다.
“내일 있을 어머니와의 티타임 말입니다만…….”
“아, 맞다.”
딴 얘기다! 리벨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그녀가 눈을 반짝였다.
“같이 갈 수 있어요?”
시스테인은 그녀의 반짝이는 눈을 보며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기사단의 일이 밀려 있어, 동행하지는 못할 듯합니다.”
“아…….”
하긴, 외근 다녀왔으니 저택의 일과 함께 밀렸을 것이다. 이해는 갔다.
그런데 이렇게 바쁘면…….
리벨은 슬그머니 입을 뗐다.
“시스, 근데…….”
침대로 다가가던 시스테인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리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공령은 안 가 봐도 돼요?”
침대 머리맡의 조명으로 향하던 그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주 잠깐의 침묵 끝에 그가 말했다.
“이렇게 리벨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에 리벨이 담겼다. 리벨은 그 눈에 비치는 저를 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아니, 무슨 그런 로맨틱한 말을 담장에 기어가는 개미 쳐다보는 표정으로 하세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기쁘긴 한데,”
리벨이 볼을 긁적였다.
“대공령에 몬스터들이 많다고 하셨잖아요. 오늘 낮에 헬리아가 그러더라고요. 그것들을 주기적으로 처리하려고 대공령으로 가셨던 거라고…….”
그 말에 시스테인은 잠시 침묵했다.
“……그녀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리벨이 눈을 깜박였다.
뭐야, 나 말실수했나?
제 말을 곰곰이 되짚어 보던 리벨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런 것 같진 않은데……?
“네. 그런데 몇 달 동안 안 가면 혹시 몬스터가, 곤란할 정도로 불어나진 않을까 싶어서요.”
리벨의 답에 시스테인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곳에도 병력이 있으니 문제없―”
그렇게 말하려던 시스테인은 말을 멈췄다.
돌연 심장 근처의 마력이 다시 들끓기 시작한 탓이었다.
이번엔 대체 왜?
심지어 옆에 리벨이 있는 상태였다. 마력을 가라앉혀 주는 그녀가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데, 왜 이러는 거지?
짧은 순간 파악해 낸 원인은 긴장감이었다.
“…….”
그가 미간을 좁혔다. 이건 리벨이 대공령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시작된 긴장감이었다.
끔뻑이는 자줏빛 눈동자와 그의 푸른 눈이 마주쳤다.
리벨은, 내가 대공령에 가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을까?
물론 대공령에서 직접 불러온 헬리아와 다른 사용인들은 물론이고, 지금 대공령에 있는 자들조차 제대로 된 이유는 몰랐다.
그는 그 사실을 숨겨야 했으니까.
그 때문에 그는 몬스터와의 전장에 늘 혼자 갔으니까.
“…….”
하지만 광포한 마력이 휩쓴 자리를 몇 번이나 오갔을 기사들이나 디란타령의 사용인들이 아무 것도 모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집사인 헬리아는 더더욱.
“시스?”
리벨이 무슨 일 있느냐는 듯 그를 살폈다. 두 사람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가라앉아야 할 마력이 도리어 더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차라리 눈을 감아.
그게 낫다는 걸 알면서도 시스테인은 그런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헬리아가, 무언가 언질이라도 한 건가?
그래서 이렇게 묻는 걸까?
“왜…….”
리벨이 입을 뗄 때, 시스테인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더 가까워지면 마력이 폭주해 버릴 것 같아서.
“……아.”
그가 짧은 숨을 토해 냈다.
긴장감 때문에 당장이라도 폭주해 버릴 것 같은 마력을 어떻게든 가라앉혀야 했다.
때문에 당장이라도 묻고 싶어도 물을 수가 없었다.
혹시 당신은 내가 뭘 숨기고 있는지 알고 계신지.
당신은, 나를 괴물이라고 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렇게 내게 가까이 다가오는지.
내가 당신을 다치게 하지 않을 것 같다고 자신하기 때문인지. 그렇다면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그만큼 나를 믿는 건지.
……나는, 나를 믿지 못하는데. 나는 내가 나를 제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탁.
그는 항상 굳어 있던 제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지기 전에, 방의 불을 꺼 버렸다.
덕분에 리벨이 본 건 그의 얼굴이 남긴 잠깐의 잔상이었다.
“시스?”
분명 뭔가…… 평소답지 않은 표정을 지은 것 같았는데.
그렇게 생각할 때, 시스테인이 어둠 속에서 말했다.
“아무래도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말했다. 아까는 안 간다는 것 같더니. 리벨은 갑자기 말을 바꾼 그를 보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 * *
“그 애는 늘 바쁘지.”
리엔은 혼자 궁으로 찾아온 리벨을 보고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시스테인이 늦게나마도 오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크게 섭섭해하지 않았다.
“우리 아가랑도 보고 싶었으니 괜찮아, 특히.”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화사하게 웃었다.
“우린, 비밀을 공유한 사이잖니.”
그 소름 돋는 발언에 리벨은 마네킹처럼 굳어 버렸다.
그그그렇죠. 우리가 비밀을 나눴죠. 예.
―달칵.
리엔과 그녀를 또각또각 따르는 마네킹이 자리한 방으로, 곧 달콤한 디저트들이 놓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엔은 그런 것에는 일절 관심 없다는 듯 포크를 들지도 않았다.
그 상태로 리벨만을 바라보았다.
리벨은 그 덕에 앞에 맛있는 게 있든 말든 포크도 들 수가 없었다.
“왜 안 먹니?”
리엔이 빤히 쳐다보다 물었다.
“그…….”
리벨이 입을 벙긋거렸다. 예의범절 심각하게 따지시는 분 앞에서 제가 먼저 포크를 어떻게 들겠습니까?
리벨은 조금 침묵하다 말했다.
“예법이…….”
“쓸데없이 말 꾸며서 할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리엔이 다시 눈부시게 웃었다.
“혹시 우리 아가가, 잊었을까?”
잊지 못하도록 머리에 박아 줄까? 그런 말이 환청으로 들리는 것 같았다.
리벨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위아래가 있지 제가 어떻게 먼저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악! 뱉어 버렸어! 뱉어 버렸다고! 정제된 말! 생각을 거친 말! 제발 좀!
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리벨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버렸다.
그녀를 지켜보던 리엔이 웃음을 터뜨렸다.
“맞다. 그런 황궁 예법이 있기는 했지. 그런데 그런 것도 신경 썼니?”
리엔이 포크를 집어 드는 소리에, 그제야 리벨은 두 손을 얼굴에서 떼었다.
“신경 안 쓰는 사람들이 혹시 이 방을 죽어서 나가진 않았는지…….”
그러면서 생각만으로 끝나야만 할 말을 중얼거렸다.
줄줄 샌다, 아주!
리벨이 속으로 절규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리엔이 재차 웃었다.
녹아내리듯 달콤한 케이크를 먹은 리엔이 빙그레 웃었다.
“글쎄.”
그녀가 손을 펴 보였다.
“모르겠는데. 마음에 안 드는 아이들이 내게 무슨 결례를 범했는지까지, 내가 기억해야 할까?”
“그그런 쓸데없는 곳에 뇌 용량을 낭비하실 순 없죠.”
리벨은 고개를 홱홱 저어 보였다. 방금 먹은 케이크가 넘어올 것 같다!
체할 것 같다!
그런 리벨에게 리엔은 많이 먹으라는 듯 접시를 밀어 주었다.
리벨은 눈앞이 까마득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음식이라도 먹자! 계속 황태후 폐하하고 눈 마주치고 있는 것보단 낫잖아!
그녀가 모처럼 전투적으로 포크를 든 순간이었다.
“참, 이번 신문 기사 봤단다.”
“쿨럭!”
리벨은 하마터면 리엔의 면전에 대고 기침을 할 뻔했다.
간신히 위기에서 목숨줄을 건져 낸 리벨이 좀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
“그, 보, 보셨군요.”
“응. 내 아가 기사는 늘 흥미롭게 보고 있잖니. 그런데…….”
리엔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시스와 같은 날에, 같은 저택에 갔던 것 같던데.”
그녀는 마치 현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처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