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리벨은 리엔과 시선을 마주치고 확신했다.
어차피 모든 걸 알고 물어보시는 거다.
하긴, 어차피 취재 간 걸 숨길 생각도 없었다.
리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거기서 시스를 만났어요…… 아.”
말하던 그녀는 중요한 것이 생각났다. 그녀는 포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
그때까지 리엔은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듯, 웃으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내가 무슨 말 할 건지 다 알고 계신 거 아니야?
리벨은 그녀를 살피며 입을 뗐다.
“그때 거기서 나인하고 다른 기사들이…….”
“나인?”
리엔의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 이것도 알고 물으시는 거죠? 예?
“붙여 주신 그림자들에게 이름이 없대서, 이름을 지어 줬거든요.”
리엔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마음에 안 드시는 겁니까? 리벨은 슬그머니 다시 덧붙였다.
“밖에서 109번이라고 부를 순 없잖아요.”
“그야 이상하긴 하겠지만.”
리엔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이름이 있는 아이들이 더 생겨난 거구나.”
역시 알고 있었던 듯했다. 리벨은 가늘게 뜨인 리엔의 눈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안 되는 건 아니죠?”
혹시 그림자에 이름 붙이면 불법? 그런 법 있는 거 아니죠?
아니, 없던 법도 만들 수 있는 게 눈앞의 리엔 황태후였다. 긴장한 리벨에게 리엔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안 될 거야 없지. 그 아이들이, 제 할 일만 잘한다면 말이야.”
리엔이 포크를 들어 올리며 리벨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런데 이번 취재에서 실수를 한 것 같은데. 아니니?”
역시 다 알고 계신 거다! 리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좀.”
숨길 수 없다면 차라리 다 털어놓는 게 낫다.
리벨은 틸라 상단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세세하게 이야기했다.
리엔은 그 긴 이야기를 손 한번 움직이지 않고 흥미롭게 들었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
그리고 그 이야기가 끝난 후에야 찻잔을 들었다. 다소 식은 차를 마신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칵.
그 소리는 유독 방 안에 크게 울렸다.
“그니까 아가의 생명이 위험했었다는 거지?”
그 말에 리벨은 바로 답했다.
“그건 맞지만,”
오면 말하려고 했는데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상대는 리엔 황태후였다. 그림자들의 생명도 중요했지만 리벨 자신의 모가지도 당연히 엄청나게 중요했다.
비록 그녀는 시스테인이 마음을 열 때까지 ‘비호’해 주겠다고 했지만, 그녀가 마음을 바꿔 먹는다면 리벨 쪽에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죽는 것 말고는.
“맞지만?”
리엔이 되물었다. 이미 뒷이야기가 있다는 것처럼 운을 떼 버렸으니 여기서 물러날 수도 없었다.
리벨은 결국 입을 뻐끔거리다가 말했다.
“저는, 처벌을 원하지 않아요.”
리엔은 그 말에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다행히 화가 난 표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은 리벨의 예상 범위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하자가 있는 것에게, 언제 또 실수할지 모르는 것에게 아가를 맡기라는 거니?”
하자가 있는 것.
그 말은 유독 귀에 박혀 들어오는 듯했다. 리벨이 멈칫했을 때였다.
리엔이 손을 펼쳐 보였다. 그녀의 손에서 화려한 반지가 눈부시게 반짝였다.
“난 내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어. 하자 있는 것들은 필요가 없다고.”
그녀는 새빨갛게 칠해진 제 손톱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너희들이 물려받은 이 귀한 피에 불완전한 것이 있을 리 없으니…… 감히 완벽하지 못한 것들이 옆에 있으려면, 적어도 하자는 없어야 할 거라고 말이야.”
리벨은 그 말에서 기묘하고 견고한 벽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리엔 황태후의 마음의 벽.
이 벽을 넘어서지 않는 ‘완벽하지 못한’ 사람은 그녀의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 같은.
완벽하지 못하다면 언제든 내쳐질 수 있다는 것 같은.
리엔은 말을 이었다.
“그건 아가를 보필하는 것들도 마찬가지야. 완벽하지는 못해도 하자는 없는 것들이어야, 내가 안심하지 않겠니?”
저부터 하자 덩어리인 것 같은데요? 리벨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말했다.
“하자가 없는 것도 좋지만…….”
이대로라면 ‘대공비의 목숨을 위험하게 한’ 실수이자 하자가 있는 나인과 그림자 몇은 이대로 세상에서 지워질 터였다.
리벨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번엔 상대가 시스였잖아요. 만약 그림자들하고 시스가 싸웠으면,”
그녀의 말을 리엔은 가볍게 잘랐다.
“그럼 어쩔 수 없이 죽었어야겠지. 그 아이들이 시스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근데 그렇게 싸웠으면, 저도 위험했을 거예요.”
리벨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 것 같긴 했다. 마차를 타고 오면서 그림자들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열심히 머리를 굴린 끝에 나온 결과가 이것이었다.
리엔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그들을 처벌할 것 같았으니까.
어떻게든 빠져나가게 해 주려고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물론 늘 그랬듯 리엔 앞에 서자마자 머릿속은 새하얘져 버렸고, 뒤늦게 생각난 것이었다.
“네가 왜 위험해지지?”
리엔은 그 말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리벨이 말했다.
“그때 전 변장하고 있었잖아요. 아무리 눈 색은 안 변한다고 해도, 전 그때 남자 모습이었거든요.”
리벨이 볼을 긁적였다.
“보통 변신 마법은 성별까지 바꿔 주진 않으니까, 만약 나인이 시스를 공격하면서 저를 지키려고 했다면 시스는 저까지 적으로 판단했을 거예요.”
그럼 황태후 폐하께서 원하시는 참사랑 대신 참사밖에 안 남지 않았을까요?
리벨은 뒷말을 뱉을 뻔하다가 간신히 삼켰다. 리엔은 그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렇구나. 그래서.”
그녀는 직접 찻주전자를 들어 기울였다. 리벨은 차를 따를 타이밍을 놓쳐 괜히 손을 잼잼거렸다.
황태후 폐하 앞에서 예의범절과 정신머리를 동시에 차리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그 아이들을 살려 달라는 말을 하려고 열심히 생각해 온 핑계가, 그거니?”
“…….”
그것도 알고 계셨습니까? 사실 우린 대화할 필요가 없었던 게 아닐까요?
열심히 짱구 굴린 것도 들켰겠다, 결국 리벨은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그냥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게 좀, 불편하고 무섭기도 해서요.”
리엔은 그 말에 잔을 들다 말고 내려 버렸다. 그러고는 밝은 웃음을 지었다.
나왔다, 그 무서운 미소!
“드디어 솔직해지는구나. 어차피 숨길 수 없는 일이라면, 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낫다는 걸 빨리 깨닫길 바라, 아가.”
리엔의 말에 리벨의 얼굴도 머릿속도 하얘져 버렸다.
“머리를 굴리다 보면,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게 되지. 그러다 보면 원하는 걸 얻기는커녕, 네가 갖고 있는 것도 잃을 수 있단다.”
리엔의 포크가 리벨을 가리켰다가 내려갔다.
그 서늘한 분위기도 잠깐, 리엔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좋아. 그 아이들을 벌하지는 않을게. 아가가 그것들을 기억하려 이름까지 지어 준 거 같으니.”
그것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사실 제 머리 위에 앉아서 라X뚜이처럼 머리카락 잡고 조종하고 계신 거 아니죠?
리벨이 허망함을 느끼는 사이 리엔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가서 시스를 만났다면…….”
말을 잇던 그녀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시스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았겠구나?”
그그그거 알면 안 되는 거였습니까?
사실 난 지뢰를 피한 게 아니라 이미 밟고 있었던 거? 발 한번 떼면 발모가지뿐만 아니라 모가지까지 날아가는 상황이었던 거?
리벨의 뒷목에 식은땀이 주룩 흘러 내려갔다.
“본, 본의 아니게 알게 된 것 같기도 한―”
“뭔데?”
리엔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장난기가 묻어나 있었다.
시스테인의 정체를 생각해볼 때 이건 맞춰도 문제였고, 못 맞히면 못 맞히는 대로 리엔이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을 테니 함정이었다.
사면초가다! 사면초가!
리벨이 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그렇다고 리엔이 답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정답은 아닐 터였다. 그쪽은 함정보다 더한 구렁텅이였다.
결국 리벨은 제 생각을 토해 냈다.
“감찰기사…… 아닌가요?”
리엔은 그 답에 박수를 쳐 주었다.
“우리 아가는 눈치도 좋지.”
아니, 그걸 어떻게 모릅니까? 리벨은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게…… 어떻게 거기서 만날 수 있었는지 생각하다가 알아 버렸어요.”
그러고는 슬며시 리엔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알면 안 되는 건가요?”
그 말에 리엔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시스는 감찰기사단장이야.”
“네?”
그냥 감찰기사도 아니고 감찰기사단장이었습니까?
리벨이 입을 떠억 벌렸다.
하지만 들으니 이해가 갔다.
그가 이전에 보라며 주었던 사건 기록들. 서부의 사건 기록까지 있었던 것이 이해가 갔다.
감찰기사단장이라면 당연히 서부의 사건도 그의 손을 거쳤겠……는데, 잠깐만.
이성을 거치지 못한 리벨의 말이 결국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런 사람 옆에 저를 붙여 놓으신 건지…….”
역시 내가 벨인 걸 들키기만 기다리는 거지! 그게 최고의 유희였던 거죠! 리벨의 머릿속이 소리 없는 절규로 가득 찼다.
“괜찮아. 들켜도 내가 살려 줄 테니.”
가볍게 말한 리엔이 눈부시게 웃었다. 리벨은 그 시선을 마주하면서도 말을 차마 이을 수가 없었다.
정말 괜찮은 거죠? 수상한 일이면 다 파헤치는 감찰기사단장한테 찍힌 상태지만 어쨌든 괜찮은 거죠?
리벨의 얼굴에 아련한 미소가 떠올랐다.
“벌써 걸린 건…… 아니겠죠……?”
그 말에 리엔은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시스가 반응이 없잖아.”
알았으면 벌써 뭐라도 했을걸? 리엔의 이어지는 말에 리벨은 이대로 하늘로 승천하고 싶었다.
“그 애는 네 생각보다 어릴 때부터 감찰 일을 맡았거든.”
리엔은 쿠키를 하나 집어 들며 말했다.
“내 그림자들이 음지에서 적법하지 못한 방법으로 적들을 베어 낸다면, 그 애는 적법한 방법으로 황가의 적을 베어 내는, 햇빛 아래의 검으로서.”
―바삭.
리엔이 쿠키를 먹는 소리가 선명하게 방 안을 울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리벨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겠다.
생각해보면 폭군 카리스와 그보다 더한 폭군 위의 폭군 리엔이 있는 나라다.
다시 말해 황권이 하늘을 찌르는 이 나라에서 감찰기사단장의 정체가 시스테인 외에 다른 사람이어도 이상할 것 같았다.
적법하지 못한 일은 황태후 리엔이 가장 많이 하니까!
사실상 귀족 견제를 위한 단체인 감찰기사단의 단장이 시스테인 말고 다른 사람일 리가 없지.
리벨이 알기로 이 소설에서 비중 있게 다뤄진 황가의 다른 수족들은 없었으니 확실했다.
“……근데,”
리벨은 너무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바람에 뒤늦게 중요한 걸 알아차렸다.
“감찰기사단장 정체는 비밀…… 맞죠?”
“비밀이지.”
나 지금 들으면 안 되는 비밀 들은 거? 보통 이건 사망 플래그 아닌가요?
너무 많은 걸 알았으니 이만 죽어 줘야겠어?
세차게 흔들리는 리벨의 눈동자를 보며 리엔이 물었다.
“혹시 말하고 다닐 거니?”
리엔이 크라이베리 신문을 가리켰다.
“혹시, 내일 1면?”
“아아아아닙니다!”
미쳤습니까, 제가? 리벨은 손 발 고개까지 마구 저으면서 부인했다.
절대 비밀이죠, 절대!
제가 벨인 것만큼! 리벨이 거듭 고개를 흔들었다. 리엔의 웃음소리가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