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리엔은 리벨이 벨로서 틸라 상단주의 집에 간다는 것도, 시스테인이 감찰로서 오래 전부터 그곳을 수사하고 있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이 그곳에서 만날 거라는 걸, 두 사람보다 먼저 알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 사실을 말해 준 리엔이 웃었다.
“그래서, 몰래 한 데이트는 어땠니?”
“그게 데이트였나요?”
리벨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리엔이 손을 펼쳐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 같이 할 일, 스킨십에 스릴까지. 이 네 가지면 데이트로 충분하지.”
스킨십까진 알겠는데 대체 스릴은 왜 필요한 겁니까?
의문을 가지는 리벨의 눈을 리엔이 가리켰다.
“변신한 상태였다며. 이런 눈은 나도 살면서 처음 본 특이한 눈이거든.”
리엔은 그녀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시스는 원래 잠입했을 때 증거를 남기지 않아. 당연히 네 존재도 지워졌어야 했지. 그런데 거기서 시스가 널 해치지 않았다는 건…….”
리엔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화사한 미소도 아니고 그 미소는 또 뭔가요?
리벨은 슬그머니 고개를 뒤로 물렸다. 결코 좋아 보이는 미소는 아니었다.
“그래서, 진전은 있니?”
그런 그녀에게 리엔의 시험이 뚝 떨어져 내렸다.
“네, 네?”
리벨이 말을 더듬자 리엔이 그녀와 문 밖을 가리켰다.
“두 사람 사이. 아니면,”
그러다가 리벨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앉았다.
“내 부탁.”
그 말에 리벨의 등 뒤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그그그거는! 리벨이 입을 벙긋거리다가 말했다.
“죄죄죄죄송합니다.”
구라 치지 말랬다! 짱구 굴리지 말했다! 리벨은 눈을 꽉 감은 채 머리를 박았다.
리엔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리 죄송해?”
그녀의 손이 리벨의 어깨를 톡톡 털어 주었다.
“내가 보기엔 있는 것 같은데.”
“네?”
리벨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리엔은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평소 짓던 해사한 미소도, 묘한 미소도 아닌 그저 순수한(?) 웃음이었다.
“아, 맞다.”
웃고 있던 리엔이 등 뒤에서 상자를 하나 집어 올렸다. 화려하게 장식된 검은 상자에는 황가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거 주려고 불렀어. 내 아가, 열심히 노력해 주는 것 같아서.”
리벨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녀의 다리 위에 길쭉한 상자가 놓여졌다.
“이건…….”
리벨이 상자를 열어 보려는 때였다. 리엔이 상자 위에 손을 얹었다.
“이건 가면서 열어 보고.”
쉿 하라는 듯, 검지를 제 입술에 대어 보인 리엔이 속삭였다.
“별거 아니니, 부담 가지진 말고.”
그녀는 정말 그렇게 가볍게 말했다.
“이만 가 보렴.”
그렇게 티타임이 끝나고, 마차에 타기 전까지 리벨은 그렇게 방심(?)하고 있었다.
―덜컹!
그리고 마차에 타서 상자를 열어 본 리벨은 기함했다.
“별게 대체 뭔데?!”
상자 안에는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큼직한 펜던트는 정밀한 세공이 되어 있었다.
경악하는 리벨의 품으로 상자 뚜껑에 끼어 있던 쪽지가 똑 떨어져 내렸다.
[앞으로 있을 연회에 하고 나가렴. 아무리 귀한 물건이라도 아끼면 소용이 없지.
물건은 쓰일수록 좋아한다는 걸 알아두렴.]
리벨은 그 긴 쪽지가 한 문장으로 보였다.
안 걸고 나오면 아주 실망할 거야!
그렇게 말하는 리엔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리벨은 슬그머니 상자를 닫았다.
“그래…… 사교계 연회에 사람들 비싼 거 한두 개 하고 나오는 것도 아니고…….”
이거 하나 했다고 눈에 띌 리는 없겠지!
리벨은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했다. 연회에 갈 때까지.
* * *
황가 의전원.
의전원 사람들은 원래 황가의 의식을 주도하고, 귀족들의 경조사를 관리하는 부서였다.
당연히 남의 눈치를 볼 일이 없었다.
황성 부서인 데다 경조사 날짜를 다루는 곳이다 보니, 귀족 입장에서도 잘못 보여 봐야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의전원은 황가의 부서.
당연히 황가의 안주인인 황태후의 입김이 짙게 닿아 있는 곳이었다.
덕분에 의전원 사람들은 곧 죽을 귀족의 이름을 알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리엔에게 ‘찍힌’ 귀족들이 누군지 안다는 의미였다.
물론 의전원 사람들은 다음에 자기 차례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기에, 그걸 함부로 발설하지 않았다.
리벨이 이 상황을 알았다면, 이곳을 저승 문이라고 불렀을 터였다.
“자, 회의 시간입니다.”
의전원 사람들이 회의실로 우르르 들어가는 날. 매주 첫날 오전 열 시.
그들은 요즘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들이 머릿속에는 디엘렌과 알레로라는 이름만 돌아다니고 있었다.
속히 말해 이번에 황태후 폐하께 ‘찍힌’ 가문의 이름.
그건 다른 가문들과는 달랐다. 이전까지는 아무리 황태후의 마음에 들지 않는 가문이 있어도 직접 명령이 오는 일은 없었다.
대신 그 가문의 경조사마다 리엔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아가가 원하니, 디엘렌과 알레로를 아주 귀찮게 해 주렴.]
그건 황태후에게서 직접 온 명령이었다.
그렇게 전달받은 의전원은 긴급 회의까지 열었다.
“대체 어떻게…… 두 가문을 귀찮게, 합니까?”
한 의전원 사람이 입을 열었다. 모두의 머릿속에 들어찬 것이었다.
아가라면 대공비 전하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황태후 폐하께서 황제 폐하나 대공 전하를 그렇게 부르진 않으셨으니까.
게다가 직접 명령까지 하시는 걸 보니 어지간히 대공비 전하를 아끼시는 게 분명했다.
다시 말해, 다음으로 사교계를 주름잡을 실세는 당연히 대공비 전하가 될 것이란 말이었다.
“디엘렌과 알레로라…….”
그 사실을 새삼 떠올린 의전원 사람들의 얼굴에 비장함이 깃들었다.
대공비에게 밉보인 저 두 귀족가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의전원의 위상도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덕분에 그들은 어떤 독창적인 방법으로 두 귀족 가문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을까로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저번에는 단체로 자리를 비웠었죠. 두 시간이나 의전원 바깥에서 기다리게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러면 너무 티가 날 겁니다.”
의전원 사람들은 의논에 의논을 거듭했다.
“아, 그럼 차라리…….”
그러던 중 의전원 막내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낸 의견은 곧바로 채택되었다.
그렇게 채택된 지 3주.
“하, 진짜 당신 때문에 무슨 망신인지 모르겠어요!”
의전원 건물을 나오자마자 베니카 알레로가 소리쳤다.
당연히 그 말을 듣는 건 함께 의전원으로 소환된 롤란드 디엘렌이었다.
“누군 망신 안 당하고 있는 줄 알아?”
그들은 3주째 주에 한 번씩 의전원에 불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의전원에 올 때마다, 대체 어떻게들 아는 건지 그렇게 기자들이 몰려들어서 그들의 사진을 찍어 가곤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두 사람도 기자들 눈치가 있으니 싸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3주씩이나 되자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특히 오늘은 더욱 그랬다.
‘흐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두 사람의 혼인 진행 의사가 있는지, 절차는 어떠했고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를 자세히 살펴 지난 판례들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무슨 범죄자 심문하듯 대질심문까지 하며 결혼식 당시의 상황을 꼬치꼬치 캐묻던 의전원 사람들은 아주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드디어 이번 주로 이 지긋지긋한 일도 끝나나 싶었던 두 사람 앞에서.
‘2주 후에 뵙겠습니다.’
‘그 후에 다시 결정해 보도록 하죠.’
이게 말이냐고! 롤란드 디엘렌과 베니카 알레로는 딱 미치기 직전이었다.
참았던 것이 폭발한 것도 그 얼토당토않은 말 때문이었다.
“뭐라고요? 이미 우리 가문 상단하고 거래를 끊으려는 가문이 몇인지 알아요?”
베니카가 소리를 질렀다. 이제 기자들이 몰려오고 자시고 신경 쓸 것도 없었다.
―찰칵! 찰칵!
셔터 소리가 울리든 말든 베니카가 신경질을 냈다.
이 이상 깎여 나갈 가문의 명예도 없는데 뭘 기자를 신경 쓴단 말인가?
“그러게 그딴 인터뷰는 왜 해 가지고 사람 불려오게 해?”
롤란드도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
“그냥 결혼했다고 하고 몇 주 저택에 박혀 있었으면 죄다 잊어버렸을걸!”
그의 말은 기자들의 수첩에 빠짐없이 쓰이고 있었다.
―찰칵!
그리고 셔터 소리에 롤란드가 뭐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아차.
방금 말은 기사로 나가면 좀 곤란했다.
“이건…….”
변명을 덧붙이려고 했지만 기자들은 수첩에 펜을 든 채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하든 들어 줄 기색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그의 말을 받아 적어 기사화하려고 하기 바빴다.
“……젠장!”
결국 욕지거리를 내뱉은 롤란드가 자리를 먼저 떴다.
‘두 가문이 이렇게나 입장이 다르니, 2주 후까지 서로의 마음이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보죠.’
의전원은 그렇게 말했다. 마음이 변하긴 개뿔!
만날 때마다 안 좋아지는 것 같은데 마음이 변하는 걸 왜 지켜보고 앉아 있어? 이대로 이혼 처리 하라고!
이제 디엘렌 가도 알레로 가와 이어져 봐야 좋을 것도 없었다.
두 가문은 매주 쏟아져 나오는 기사와 함께 주요 사업의 거래처를 잃어 가면서 사이좋게 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롤란드 디엘렌 영식!”
“한마디만 해 주십시오!”
“의전원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베니카 알레로 영애와의 혼인 사실에 대한 의견은 변함이 없으십니까?”
우르르 쫓아오는 기자들을 피해 간신히 마차에 올라탄 롤란드가 소리 질렀다.
“당장 출발해!”
―덜컹!
당황한 마부가 말도 못 하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흔들리는 마차에서 롤란드가 씹어 뱉듯 성질을 냈다.
“지들만 피해인 줄 알아? 우리는!”
디엘렌 가의 연회 이후로 연락이며 거래가 끊긴 가문은 셀 수도 없었다.
슬슬 빚을 냈던 상단에서도 사람을 보내오는 게, 조만간 빚내서 연회했다는 사실이 기사로 올라오게 생겼다.
“이…….”
롤란드가 마구잡이로 머리를 헤집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 하면 역시 리벨 이벨라, 아니 디란타 대공비부터였다.
“대체 디란타 대공은 걔의 뭘 보고 결혼을……!”
성질을 내던 롤란드가 문득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지.”
제가 얼마 전에 했던 일을 떠올린 그가 씩 웃었다.
남녀 사이에 의심이 끼어드는 순간, 그 관계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롤란드 디엘렌의 웃음이 짙어졌다. 디란타 대공이 남자라면, 제가 보낸 것을 보고도 리벨을 의심하지 않을 리가 없다.
딱 제 수준다운 생각을 한 그가 더 짙게 웃었다.
제 여자가 제 영역 밖에서 무엇인지 모를 일을 하면서, 다른 자들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
“디란타 대공도 남잔데. 그럼.”
의심하지 않을 리가 없지!
그렇게 생각하던 롤란드는, 저택으로 돌아와 예상외의 인물과 마주쳤다.
그리고 입을 떠억 벌렸다.
아니…… 예상보다 반응이 너무, 빠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