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아버지?”
롤란드가 저택에 오자마자 본 건 마치 집사처럼 서 있는 디엘렌 백작이었다.
이 양반이, 집에 돈이 없어지니까 집사 자르고 대신 일하려는 건가? 아니면 미쳤나?
어이없는 표정으로 마차에서 내린 롤란드는 뒤늦게 저택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마차 안에서의 좁은 시야로는 미처 보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대, 대공 전하?”
그건 다름 아닌 시스테인 폰 디란타 대공이었다.
“전하, 일단 들어가시지요.”
디엘렌 백작은 곤란해하고 있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왜 여기에 서 계시기만 하시는 건지…….”
“용건이 왔으니 들어갈 수 있겠군.”
디란타 대공은 롤란드를 일별하고 몸을 돌렸다.
서늘한 시선이 꽂히자 롤란드는 눈을 크게 떴다.
“……뭔가 실수한 거라도 있는 게냐?”
디엘렌 백작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롤란드는 고개를 저었다.
움찔한 것도 잠깐, 그의 얼굴엔 화색이 피어나고 있었다.
예상보다 일찍 때가 온 것이다!
“일단 들어가죠.”
롤란드의 걸음이 자신감을 얻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스테인의 주변에서는 서리가 걷힐 줄을 몰랐다.
때문에 디란타 대공가의 기사들은 물론이고 백작저의 사람들까지 긴장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딱, 롤란드 디엘렌 한 명을 제하면.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렇게 열 받아 있는 것도 당연하지.
제 아내가 바람피웠을지도 모른다는 증거를 눈으로 봤을 테니까.
* * *
시스테인이 디엘렌 저택에 가기 전.
그는 제도기사단 본부에 있었다. 이맘때쯤 되면 본부 주변에 피는 화사한 꽃들에 유독 시선이 가서.
“…….”
그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건 자줏빛 꽃잎이었다.
근래 그는 이 잎이 아주 신경 쓰였다.
외근을 다녀오고서는 유독 더 그랬다.
제도기사단 본부를 가득 메운 이 꽃은, 평소에도 늘 봤던 것이었다.
하지만 요즘따라 이상하게도 눈에 띄었다.
이것과 비슷하지만 좀 더 진한 자줏빛의, 반짝이는 보석 같은 무언가가 생각나서.
“…….”
그가 눈을 가늘게 떴을 때였다. 부기사단장이 다가와 그에게 물었다.
“단장님,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십니까?”
그 질문에 시스테인은 불쑥 답했다.
“자줏빛.”
“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부단장이 되묻자, 시스테인이 꽃잎을 가리켰다.
“어디서 봤지? 이런 색.”
그 말에 부기사단장 역시 고민 없이 답했다.
“대공비 전하……를 마주하실 때 보았던 색 아니겠습니까?”
진한 자줏빛.
흔한 색도 아닐뿐더러, 시스테인 폰 디란타의 최근 동선을 생각하면 생각나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부기사단장은 시스테인이 가리킨 꽃을 가리켜 보였다.
“그분의 눈동자가 이것보다 더 짙은 자줏빛이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시스테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부단장도 그런가?”
“예?”
“나도 그런데.”
나도 그녀 생각이 나. 시스테인이 뇌까렸다.
그녀만 생각이 나. 그녀에게서만 본 것 같아, 이 색.
……그 하인을 제외하면.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틸라 저택에서 본 하인, 그 역시도 같은 색의 눈동자를 지녔다.
뿐만 아니라 마력을 가라앉히는 힘 역시.
그가 생각에 빠지려는 때였다.
“전하.”
이 호칭은 제도기사단장 시스테인을 찾는 게 아니라 디란타 대공 시스테인을 찾는 것이었다.
시스테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대공저의 기사가 급히 달려온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시스테인의 손짓에 부단장이 물러났다. 충분한 거리가 확보되자, 대공저의 기사가 말했다.
“대공비 전하의 사진을 몰래 찍어 보낸 자가 누군지 알아냈답니다.”
“누구지?”
기사는 잠시 멈칫하다가,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롤란드 디엘렌입니다.”
시스테인이 미간을 좁혔다.
사진을 보내온 그 저급한 의도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불쾌했다.
……매우, 불쾌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우웅!
심장 근처에서 요동치던 마력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
시스테인의 손이 저도 모르게 심장 근처를 부여잡았다.
“전하?”
놀란 기사가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시스테인은 기사에게 손을 펴 보여 제지했다.
접근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순간 온몸의 감각이 예민해지면서, 조금만 흔들려도 금세 폭발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하.”
그가 짧은 숨을 터뜨렸다. 여기서 폭주해선 곤란했다.
여기는 다른 곳도 아니고 수도 한가운데였다.
“…….”
하지만 눈앞이 점점 붉게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마력에 이성을 빼앗길수록 시야가 붉게 흐려진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이미 어릴 때 한번 겪어 보았기에.
“……하, 전하? 괜찮……까?”
옆에서 뭐라고 하는지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는 숨을 최대한 고르게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간신히 운을 뗐다.
“일단,”
그는 말하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상태였다. 대공저의 기사가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
“일단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아니.”
시스테인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부르지 마라.”
“하지만―”
누가 봐도 대공의 건강에는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래도 시스테인은 기사를 제지했다.
“절대로 부르지 마.”
의사를 불렀다간, 특히 그 의사가 마력에 예민한 의사라면 디란타 대공이 무슨 비밀을 가지고 있는지 단번에 알게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대체 이렇게 상태가 안 좋으신데, 왜?
하지만 기사는 감히 주인의 명령을 어기진 않았다.
기사가 고개를 숙이자, 시스테인이 입을 열었다.
“일단, 무슨 생각으로.”
그는 리벨의 사진이 찍혀 있던 것을 떠올렸다.
시야가 다시 붉게 물드는 것 같았다. 안 된다.
그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입술을 깨문 그가 말했다.
“알아보지.”
“예? 뭘 말씀이신지…….”
기사는 앞뒤가 맞지 않는 주인의 말에 당황했다. 시스테인의 푸른 눈이 기사를 향했다.
“……?”
기사는 주인의 눈에서 기묘한 빛이 감돈다고 생각했다. 햇빛…… 때문인가?
“롤란드 디엘렌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
아, 그 말씀이셨군. 기사는 깍듯이 묵례했다.
“그건 이미 알아보라고 사람을 보냈습―”
“직접.”
“예?”
기사가 당황했다. 직접 알아보신다고?
그가 당황스러워하는 것을, 시스테인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리벨의 사진을 찍었는지.”
롤란드 디엘렌이 어떤 저급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든, 그 죄를 확실히 물을 것이다.
시야처럼 붉게 물들어 버린 머리가 이성적인 생각을 제한하고 있었다.
* * *
디엘렌 저택으로 출발한 건 좋았다.
하지만 시스테인은 마차에 타고 가는 내내 들끓는 마력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디엘렌 가에 도착할 즈음에는, 이성의 끈을 놓친 기분이었다.
이미 이 근처에 있는 라이아 약초란 라이아 약초는 죄다 폐사했을 터였다.
“…….”
하지만 그래도 진정되지 않았다.
마치 기름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순식간에 타오른 마력은 잠잠해질 줄을 몰랐다.
너무 많은 마력이, 너무 큰 자극에 의해 뒤흔들리고 있었다.
저를 자극하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차리기에는, 그는 정신이 없었다.
그야말로 폭주 직전이었으니까.
마력이 폭발하지 않도록 속을 가라앉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덜컹.
그 덕에 디엘렌 가에 도착한 줄도 몰랐다.
“디란타 대공 전하……?”
그리고 디란타 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온다는 소식에 헐레벌떡 달려 내려온 디엘렌 백작과 마주쳤다.
그의 볼일은 이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다.
“…….”
때문에 시스테인은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마차에 기대어 마력을 진정시키는 데에 집중했다.
“일,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이.”
그런 그를 보고 디엘렌 백작은 안절부절못했다.
대체 갑자기 찾아와서 저택 앞을 막아서다시피 서 있을 건 무엇이란 말인가?
“…….”
하지만 시스테인은 침묵한 채로 일관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히히힝……!
마력이 폭주 직전까지 끌어올려지면서 몇 배나 예민해진 그의 청력에, 마차가 오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 왔다.
그건 롤란드 디엘렌의 마차였다.
그의 마차는 거침없이 저택 앞까지 달려오다가, 손님이 있는 것을 보고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마부는 시스테인을 보고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안에 타고 있던 롤란드 디엘렌은 아직 시스테인을 보지 못한 듯했다.
“아버지?”
뭐 하느냐는 듯 디엘렌 백작을 부른 롤란드는 그제야 시스테인을 발견했다.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일, 일단 들어가시지요, 대공 전하. 제가 모시겠습니다. 왜 여기에만 서 계시는 건지…….”
디엘렌 백작은 이제 곤란하다 못해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시스테인에게서는 묘한 압박감이 묻어났던 것이다.
디엘렌 백작이 조금만 더 수련을 했더라면 그게 살기라는 것을 알아챘을 터였다.
“…….”
시스테인은 그 말에도 반응이 없었다. 대신 그의 시선은 롤란드 디엘렌에게 꽂혀 있었다.
“전하……?”
디엘렌 백작이 뭐라고 하든 말든 시스테인은 롤란드 디엘렌을 쏘아보기만 했다.
그를 보니 더욱 마력이 날뛰기 시작했다.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울 정도로.
이건 리벨을 봤을 때와 전혀 다른 상태였다.
그리고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분노.
이건 마력을 가라앉혀야 하는 그가 제일 피해야 하는 감정이었다.
기묘하게 빛나는 푸른 눈이 저택 쪽으로 돌려졌다.
“용건이 왔으니 들어갈 수 있겠군.”
그의 걸음이 몇 시간 만에 디엘렌 저택 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