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2면. 나름 비싼 자린데. 리벨은 그 기사를 보고 생각했다.
종이야 미안해!!!
아련한 문체로 쓰인 그 기사, 아니, 롤란드 디엘렌의 회고는 아주 가관이었다.
[(칼럼) 지난날에 대한 회고
- 롤란드 디엘렌]
아니, 칼럼 칸 이딴 개인적인 일로 쓰지 말라고!
[지난 일을 후회한다. 함부로 입을 놀리던 철없는 시절이 있었다.
인간의 정신적 성장은 일정한 속도가 아니며,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그리고 사람마다 성장할 계기를 하나씩은 겪곤 한다.
그 일이 내게는 몇 달 사이에 일어났다.
사랑스러운 연인과의 갑작스러운 다툼, 가문의 위험…….]
크라이베리에 돈을 얼마나 줬으면 이런 구린 회고를 2면에 실어 준단 말인가?
리벨은 십 년 전에 먹은 수프가 넘어오는 기분이었다.
몇 달 전의 저를 무슨 사춘기 청소년이 질풍노도의 시기에 실수 한번 한 것처럼 포장해서 올리는 게 아주 가관이었다.
“어휴.”
진짜 이런 수준 떨어지는 놈이랑 내가 결혼하려고 했단 말이야?
리벨은 그 기사가 실린 크라이베리 신문을 깨끗하게 불태워 버렸다. 더 보다간 눈이 썩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실린 신문이 크라이베리인 만큼 귀족가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 기사를 보게 되었다.
당연히 시선은 리벨에게로 쏠렸고, 현 대공비가 기사에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해했지만…….
리벨은 그냥 연회에 나가지 않았다.
“내가 왜 나가?”
제가 관종이긴 하지만 내향적 관종이거든요?
제 기사에 관심 가져주는 건 고마운데 제게 관심 가져 주는 건 노땡큐거든요?
게다가 마침 황태후 폐하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이야기가 식기도 전이었다.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동안 사교계 연회 참석을 쉬려고 해요.]
덕분에 줄지어 오는 연회 초대장에는 다 비슷한 답을 써서 보냈다.
원래 개인 사정이라고 하면 따로 더 안 묻는 게 예의 아니냐?
하지만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은 때로는 예의를 이겨 버리고는 했다.
‘대공비 전하께서 아프신 건 아닌지…….’
‘몸이 안 좋으시다고 하던데요.’
‘게다가 최근 대공 전하께서도 보이지 않으시는데 혹시 대공 부부께 무슨 일이 생기신 건 아닌지…….’
자꾸 이딴 소문 낼 거야? 소문에 대한 보고를 들은 리벨은 인내심에 금이 가는 걸 느꼈다.
이래서! 내가! 나한테 관심 주는 거 말고! 내 기사에 관심 주는 거 좋아하는 내향적 관종이랬지!
……라고 속으로 외쳐 봐야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그 소문들을 전해 준 집사 헬리아가 물었다. 리벨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긴. 한 번이라도 얼굴은 비춰야지. 이왕이면 규모 큰 곳에서.”
두 번 갈 일 없게. 나 멀쩡하고 시스랑도 멀쩡하다는 거 보여 주게!
그녀가 살짝 눈썹을 치켜올린 채 말했다.
헬리아는 난감한 듯 웃다가 말했다.
“그럼 최고 100명 이상의 참여자가 있는 연회의 연회장만 추려 오겠습니다.”
“부탁해.”
그것도 추려 올 정도로 많은 거야?
사교 시즌이라더니, 쏟아지는 초대장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렇게 리벨은 헬리아가 고르고 고른 초대장 몇 장을 받게 되었다.
“테인 백작가, 루엘라 후작가…….”
리벨은 초대장을 보낸 자들의 이름부터 살펴보았다.
유능한 집사 헬리아는 각 집안이 어떤 사업을 주로 벌이는지, 규모가 어느 정도의 집안인지까지 모두 조사해 초대장 옆에 붙여 두었다.
두 백작가는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상단의 모체가 되는 가문들이었다. 그 외에 눈에 띄는 가문들은 주로 후작가들이었다.
“미티아 후작가?”
여긴 규모도 좀 있는 데다 무엇보다 커다란 광산을 끼고 있는 가문이었다.
그리고 디란타 대공령과도 거리가 가까웠다.
“오는 사람도 많고…….”
이런 데 한번 들러서 얼굴 비치고 오는 게 나으려나?
리벨은 습관적으로 화로로 다가갔다. 나머지 초대장을 태우려는 버릇이 나온 것이었다.
헬리아가 있었다면 회신을 해야 한다며 말렸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서류를 전해 주고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화륵!
루엘라 후작가의 초대장에 불이 붙은 순간이었다.
“어?”
리벨은 그 위로 무슨 빛이 반짝이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불길을 받은 편지지 위로 어떤 글자가 빠르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어어?”
리벨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쥘부채를 집어 들고 화로 안에서 초대장을 빼냈다.
“아뜨뜨뜨!”
화르륵! 초대장 대신 쥘부채가 희생되었지만 멀쩡한 초대장은 꺼낼 수 있었다.
―팍! 팍!
열심히 밟아서 초대장에 붙은 불을 끈 리벨이 초대장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불이 붙으면 글자가 나타나게 하는 마법도 있나?”
안 그럼 아까 그 빛도, 갑자기 생긴 글씨도 설명되지 않았다.
리벨의 시선이 초대장을 살폈다.
[루엘라 후작가의 사교회 ‘인연’
루엘라 후작가의 별장에서 열릴 이번 사교회에 귀한 인연이 될 손님을 초청합니다.]
그 아래에는 일시와 장소. 다른 초대장과 다를 바 없는 구성이었지만 불이 붙으면서 나타난 글자만이 달랐다.
맨 아래에 드러난 새파란 글자.
[별장의 최상층, 왼쪽에서 네 번째 문]
여기에 뭐가 있는데? 리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봐도 숨겨 놓은 글자였다. 게다가, 귀족가에선 초대장을 불태우는 것 자체가 비매너였다.
“…….”
물론 리벨 자신은 불태웠지만, 아무튼 불태우는 게 일반적인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특정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끼리 종이를 불태우면 모임 장소가 나오도록 약속했을 가능성이 컸다.
“흐음.”
냄새가 난다. 뭔가 냄새가 나. 리벨은 눈을 가늘게 떴다.
기자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좋아, 여기로 간다.”
리벨은 루엘라 후작가의 초대장을 제외한 나머지를 싹 태워 버렸다.
혹시나 해서 봤지만 마법 글자가 나타나는 초대장은 없었다.
* * *
리벨은 일단 디란타 대공비로서 루엘라 후작가의 연회에 참여했다.
“세상에, 이곳까지 찾아 주실 줄이야.”
루엘라 후작 부인은 그녀의 방문은 생각지도 못했던 듯 반가워했다.
“오신다는 회신에 가슴이 뛰었답니다. 그런데 정말 뵙게 될 줄이야.”
그녀는 연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대공비가 사교회에 참여해 주는 것만으로 이 사교회의 격이 올라가니 당연했다.
“반가워요. 저도 이렇게 반겨 주시니 기뻐요.”
리벨은 오늘 화려한 노란빛 드레스에 챙이 넓은 깃털 모자를 쓰고 있었다.
오늘은 특별히 의상실에서 새로 주문한 드레스였다.
디란타 대공비가 사교 활동을 하긴 한다는 소문을 내려면 가장 좋은 건 역시, 의상실에서 비싸게 옷을 해 가는 것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신문 기사도 떴다.
[디란타 대공비, 다시 사교 활동 시작하나?]
음, 동종 업계 친구들 아주 소식 빨라요.
“그럼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자…….”
기뻐하며 그녀를 안내하는 루엘라 후작 부인은 별로 수상해 보이는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상하지 않은 건 아니지.
리벨은 저택을 살피며, 저를 따라온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아마 보이지 않게 따라온 그림자들까지, 약속된 대로 저택을 수색하기 시작할 것이다.
“대공비 전하께서 오신다고?”
“몸이 안 좋으시다고 들었는데…….”
그리고 그러는 사이, 리벨은 연회장에서 시선이란 시선은 다 끌었다.
“저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바로 소문의 그?”
“너무 예뻐요!”
시선 끌기엔 제격인 리엔 황태후와의…… 커플 목걸이를 한 채로.
나 왔다! 나 멀쩡하다! 소문 좀 내 줘라!
내면의 외침을 삼킨 그녀는 몰려드는 귀족들과 한 시간은 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그 뒤로 두어 시간은 사교회에 모여든 귀부인들에게, 요즘 사교계를 도는 염문에 대해 주워듣고 있었다.
“오…… 세상에.”
“기사와의 로맨스라니, 너무 로맨틱하지 않나요?”
“그런데 귀족가 영애라면 가주의 반대가 심할 텐데…….”
보통 신분 차를 넘어선 로맨스가 대부분이고, 기삿거리가 될 만한 건 없다……고 생각하던 리벨은 직업병이 도졌음을 자각했다.
“후우. 슬슬 돌아가야겠어요.”
그리고 그 말을 꺼낸 건 리벨이 연회장에 온 지 세 시간이 좀 넘었을 때였다.
“이렇게 잘해 주시는데 먼저 자리를 뜨는 게 좀 미안하지만…….”
리벨은 바깥을 가리켰다.
“늦게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요.”
벌써 밖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귀부인들은 아쉬운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래도 조금 더 계시다 가시지요.”
“맞아요.”
하지만 리벨은 고개를 저었다.
“그이가 보고 싶어서요.”
보통 ‘그이가 걱정을 해서요.’ 같은 대사를 쳤겠지만 리벨의 남편은 하필 시스테인 폰 디란타였다.
그가 걱정을 한다고?
귀족가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입을 떠억 벌릴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디란타 대공 전하께서는 요즘 어떠신가요?”
그때 귀부인 중 하나가 물었다.
나 멀쩡한 거 알렸고, 그이가 보고 싶다는 말로 우리 사이가 멀쩡한 것도 알렸으니 이 사교회에서 마지막으로 알려야 할 건 저거였다.
“디란타 대공령을 잠시 돌아보고 있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거기서 몬스터를 샌드백처럼 패고 있어서 문제지.
“아, 디란타 대공령을…….”
“그런데 대공비 전하께서는 같이 가지 않으시고요?”
그 말에는 내가 또 할 말을 준비해 왔지. 리벨이 안타깝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디란타 대공령에는 위험한 몬스터가 워낙 많으니까요. 그이가 자주 가지 못하게 하고 있답니다. 아직 안전 확보가 안 됐다고요. 다른 사용인들은 잘 보내면서…….”
아쉬운 척 시선 내리기! 시무룩해하기!
“그런…….”
“역시 대공 전하는 말씀은 없으시지만 배려 넘치시는 분이군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벨은 그런 그들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사실 자주 가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니라 안 오는 걸 추천하는 거지만!
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다.
이 말은 ‘디란타 대공비는 대공령에 들러 보았지만, 그녀의 안전을 염려하는 디란타 대공이 대공령에 자주 가지 못하게 한다’ 정도로 소문이 퍼질 터였다.
대공이 대공비를 디란타 대공령에 못 가게 한다고 하는 게 아니라, 자주 못 가게 한다고 했으니까.
디란타 대공비 주제에 대공령에 한 번도 안 가 본 거냐는 구설수를 피하기 위한 발언이었다.
그래도 글밥 먹고사는데 이 정도는 기본이지!
“그럼 다음에 또 뵈어요.”
리벨의 말에 모여앉아 있던 귀부인들이 우르르 그녀를 배웅하러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