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76)화 (76/167)

제76화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나인이 다가왔다. 리벨은 그가 너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있는 통에, 순간 이곳의 하인인 줄 알았다.

“이쪽은 도박장이고 저 천 안쪽은 일종의 ‘살롱’인 듯합니다. 그런데 허가받지 않은 자는 출입도 불가능할뿐더러 사용인들 역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리벨은 빠르게 속삭여진 말에 미간을 좁혔다.

허락받지 않은 자는 출입이 불가? 근데 거기에 쥬리 백작 영애가 들어간다?

불길함이 심화될 때였다. 나인이 기름을 끼얹었다.

“그리고 ‘살롱의 주인’이라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 말에 리벨은 머릿속이 번쩍하는 기분이었다.

쥬리 백작 영애에,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살롱의 주인까지.

잊고 있던 원작이 주르륵 떠올랐다.

살롱의 주인 옆에 있는 게 만일 쥬리 백작 영애라면? 그리고 둘이 연인 관계라면?

게다가 저 천.

황성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황성 부서 사람들이나 후작들까지도 공손한 모습으로 나오는 저 천 너머.

저곳에 있을 만한 사람이면…….

일단 리엔 황태후 폐하와 황제 폐하는 아닐 터였다. 그분들이 이렇게 은밀하게 사람을 모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렇다고 시스테인일 리는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저렇게 공손하다는 건 저 안에 있는 ‘살롱의 주인’이라는 자가 그만큼의 권력을 이미 가졌거나, 가질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다시 말해, 원작에서의 정보에 따르면, ‘살롱의 주인’이 될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필레 공작.

리벨은 눈앞이 까마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점점 확실해지고 있었으니까.

쥬리 백작 영애는 원작에서 필레 공작과 반역을 꾸미는 인물.

그리고 비밀스러운 마법 초대장으로 연결된 이 장소.

살롱 안쪽으로 오가는 수상한 고위 인사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몰라도, 적어도 저 안쪽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리벨이 이마를 짚었다.

반역이다! 파아아아국이다!

*  *  *

디란타 대공령.

원래 대공령이 되기 전에는 그저 ‘저주받은 디란타 고개’라고만 불렸던 곳이었다.

100년 전 대륙을 습격한 마족과의 전쟁 끝에, 그 흔적이 남은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는 이곳에는 기이한 일이 자꾸 발생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마물들이었다.

그리고 그 마물들의 먹이가 되는 마력이 땅 전체에 만연했다.

그 덕에 이 땅에서는 어지간히 마력을 사용해도 티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과거에는 이곳에 마법사를 포함한 제국의 병력이 엄청나게 투입되곤 했다.

딱, 디란타 대공 시스테인이 이 땅을 차지하게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마물과 몬스터들이 섞여 돌연변이까지 출몰하는 땅. 그 땅에 가겠노라 자원한 건 시스테인이었다.

‘제가 제국을 위협하는 그 몬스터 무리를 막겠습니다. 제국의 철옹성이 되겠습니다.’

그가 그렇게 디란타 대공령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 13세, 그리고 본격적으로 대공이 되어 땅을 관리하게 된 것이 18살의 일이었다.

그 후 제국은 많은 것이 달라졌다.

시스테인은 제 말을 완벽하게 지켜 냈던 것이다.

그는 그야말로 제국의 철옹성이 되었고, 그가 디란타령을 맡게 된 이후로 마물은 단 한 마리도 제국령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했다.

제국이 시작된 이래, 여느 때보다 몬스터의 위협이 적은 시기가 지금이었다.

‘역시 디란타 대공 전하이십니다.’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능력을 보이셨다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그중에는 그의 힘과 피를 이용해, 폭군인 지금의 카리스 황제를 몰아내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시스테인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황제이자 제 형인 카리스를 반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선을 그었다.

‘하지만 사람 속은 모르는 일이지 않소?’

‘일단 지금은 황권이 강하니…….’

물론 그 말을 믿느냐 마느냐는, 개인마다 달랐다.

“…….”

시스테인은 대공령에 올 때마다 불쾌한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가 제국의 철옹성이 되겠노라 말했던 13살.

그보다도 전에 그는 이미 이 땅에 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기억은 그에게 너무나도 괴로운 것이었다.

―쾅!

그의 손끝에서 정제되지 않은 마력이 터져 나갔다. 눈앞에 있던 부러진 나무가 밑동까지 날아가며 땅에 거친 파편을 남겼다.

―크오오오!

몰려오던 몬스터들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 나간 건 물론이었다.

제국령 한가운데였다면, 비록 몬스터 앞이라도 해도 쓰지 못했을 정도의 강대한 마력이었다.

“…….”

그는 말없이 다시 마력을 휘둘렀다.

―쿠콰콰쾅!

―콰쾅!

손에 든 검은 그저 마력이 어디로 향할지 조정해 주는 지팡이에 불과했다.

검 끝에는 마물의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그는 마물 무리를 휩쓸고 있었다.

그가 몇 달 동안 오지 않아 대공령 이곳저곳에 똬리를 튼 몬스터들이었다.

“…….”

시스테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좀 더 제국에 머물러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곳의 병력은 충분히 훈련되어 있었다.

디란타가 대공령이 되기 전, 제국 이곳저곳에서 징집되어 오던 체계 없는 제국군이 아니었다.

오직 디란타의 마물들만을 상대하기 위한 기사와 병사들이 이곳에 있었다.

그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철옹성은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는 결국 이 지긋지긋한 디란타 대공령이 필요했다.

‘제가, 대륙으로 오는 그 마물들을 막겠습니다.’

그 말을 한 이후, 이곳은 그를 위한 공간이었다.

몸에 들끓는 마력을 얼마든지 풀어놓아도 되는 곳. 눈앞이 붉게 물들어 폭주하더라도 사람을 해칠 일이 없는 곳.

게다가 이 땅에 항상 머무는 마력 때문에, 그가 폭주하더라도 근처를 어지럽히는 마력이 그의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었다.

심지어 그의 사용인들조차도.

‘여긴 디란타니까.’

‘그럴 수도 있지.’

이전부터 갑자기 없던 강이 생기거나 언덕이 솟는 등, 기이한 일이 많았던 땅이다 보니 어지간한 일로는 디란타 사람들은 놀라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린 그는 더더욱 이곳을 선택했다.

‘괴물은 괴물만이 막을 수 있다.’

13살의 그가, 이곳을 선택하게 만든 생각이었다.

인간의 손이 닿은 것보다 힘에 으스러진 자연의 흔적이 더 많은 이 땅에선, 얼마든지 그의 흉포한 마력을 터뜨릴 수 있었다.

―크르르르!?

몬스터들은 늘 이랬다.

처음에는 인간의 영지를 벗어난 모처럼의 먹잇감인 줄 알고 우르르 달려든다.

그러다가 시스테인의 힘에 몇 무리가 날아가고 나면, 슬그머니 꼬리를 말고 숨어 버린다.

힘의 차이를 실감하는 것이다.

그때쯤에는 그의 날뛰려던 그의 마력도 가라앉곤 했다.

―우우웅!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시스테인이 인상을 썼다. 원래 이맘때쯤엔 충분히 제어 가능할 만큼 진정한 마력을 잠재우며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몬스터들은 숨었지만 그의 마력이 날뛰는 건 여전했다. 중간중간 의식이 끊기며 시야가 붉게 변하는 것도 그대로였다.

“……이 정도면 풀려야 하는데.”

그가 뇌까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력은 아무리 써도 가라앉지 않았다.

원래 이 정도면 풀리고도 남아야 했는데. 지금까지와는 양상이 달랐다.

―쿠콰콰쾅!

그는 한껏 힘을 모아 숲 쪽으로 마력을 내질렀다.

―콰지지직! 콰직!

나무들이 우르르 꺾이며 그 사이에 있던 몬스터와 마물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숲 일대를 쓸어 버릴 만큼 강대한 마력을 한 번 더 방출했는데도, 그의 붉은 시야는 원상태로 돌아올 줄을 몰랐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군.”

그가 불편한 얼굴로 뇌까렸다.

괜찮아진 줄 알고 돌아갈까 싶으면, 또다시 마력이 들끓어 이성을 빼앗긴 것이 벌써 여러 번이었다.

이번에도 붉은 기가 침투해 오는 시야를 가라앉히기 위해 그는 심호흡하고 있었다.

“…….”

그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참을 수 없는 갈증이 그를 목마르게 했다.

처음에는 마력을 쓰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콰앙!

그래서 마력을 더 풀어내어 보았다. 평소보다 무리한다 싶을 정도로 폭풍 같은 마력을.

하지만 마력과는 상관없는 듯했다.

갈증은 더욱 심해지고, 의식은 더욱 자주 끊겼다.

마치 몸이 무언가, 다른 것을 원하는 것처럼. 그것은 이곳에 없다는 것처럼.

―우우웅!

다시 마력이 뒤흔들리면서 시야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잠시 의식을 잃고 눈을 떴던 그는 이번엔 완전히 초토화된 숲 한가운데에 있었다.

숲을 이렇게 만들기까지의 기억은 당연히 없었다.

폭주하면서 기억이 끊긴 것이다.

“…….”

그렇게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기를 여덟 번째쯤.

그는 불현듯 누군가를 떠올렸다.

‘다치지 말고 돌아오셔야 해요.’

반짝이는 자줏빛 눈동자. 늘 맑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던 사람.

자주 당황하고, 뭔가를 숨기는 듯하지만 아직까지 말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은 사람.

자꾸만 걸어 잠근 마음 앞을 서성거리는 사람.

“……리벨.”

그가 그 사람의 이름을 뇌까렸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제 갈증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그는 오랜만에 사람의 온기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10살 때의 사고 이후 줄곧 밀어내려 했던 온기였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제 그것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단 한 사람만의 온기가.

리벨, 그녀의 온기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