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달칵.
홀에서 서빙을 담당하는 하인들의 업무는 파악하기 쉬웠다.
사람들이 쉽게 이성을 잃고 도박에 빠지도록, 그들의 잔에 끊임없이 와인을 따라 주는 것.
그러면서 그들이 도박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없는 사람처럼 행동할 것.
이미 온갖 곳의 사용인으로 변장해 본 리벨은 물론이고, 잠입에 익숙한 미엘과 나인이 그것조차 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덕분에 그들은 도박장의 하인으로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이곳을 오가는 귀족을 모두 체크할 것.
그리고 특히, ‘살롱의 주인’이 있는 것으로 예상되는 저 붉은 천 뒤를 오가는 귀족들을 중점적으로 체크할 것.
펜과 수첩을 꺼내 이름을 적으면 가장 좋겠지만, 여차하면 의심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펜을 꺼낼 순 없었다.
리벨은 그 때문에 머릿속이 터져라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고 있었다.
그때였다.
“잠깐, 너.”
한 하인이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지?”
이럴 때 당황하면 삼류다. 사용인들 사이에서 이런 일은 의외로 흔히 있는 일이었다.
특히 가문의 규모가 클수록, 하녀장이나 집사들도 제 휘하에 있는 자들의 얼굴만 잘 알고 마주칠 일이 없는 다른 건물의 사용인들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 살롱은 그러기에는 너무나 작았지만, 변명할 거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리벨은 지금까지 살롱과 붉은 천 너머를 살피면서 느꼈던 것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러면서 답했다.
“제 주인이 이곳의 ‘손님’ 되십니다.”
그 말에 하인이 멈칫했다. 리벨은 붉은 천 쪽을 한번 돌아보았다.
“혹시 제 소속을 밝혀야 하나요?”
여긴 십중팔구 수상한 곳이었다. 그리고 손님이란 원래 귀한 사람이지.
하인은 거듭 멈칫했다.
리벨의 예상대로였다. 이런 수상하기 짝이 없는 곳에서 귀한 사람의 신분을 함부로 밝히라고 했다간, 어떤 불똥이 튈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건 하인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크흠, 아니.”
하인은 총책임자인지 옷에 배지 비슷한 걸 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곤란한 얼굴로 이쪽의 정체를 못 묻는 걸 보니, 이자도 붉은 천 안쪽까지 오가지는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모르는 자를 의심하라는 임무는 충실히 띠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초대장’은 있겠지?”
여기서 초대장을 꺼내면 또 이류다. 리벨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주인께서 가져가셔서…….”
입장권이나 다름없는 초대장을 하녀 따위가 갖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녀의 말에 조금 의심의 눈을 푼 하인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어딜 통해서 왔지?”
리벨은 그 질문에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곳으로 통하는 통로는 매번 다른 곳에 열리는 모양이다.
이번에 루엘라 후작가에 열렸던 것처럼.
“제 주인께서는 ‘별장 최상층, 왼쪽에서 네 번째 문’을 통과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정보는 이 살롱의 사용인들 사이에 공유될 것이 분명했다. 마치 암호처럼.
그 말에 경계를 푼 하인이 손짓했다.
“확실하군. 가 봐. 서투르게 일해서 실수하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
“넵!”
리벨은 깍듯하게 답하고 하인 앞을 스쳐 지나갔다. 이때 부리나케 도망치면 그 사람은 또 하류다.
리벨은 그 자리에서 옆 테이블의 잔까지 술로 모두 채워 주고 나서야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의 완벽한 하녀로서의 모습에 하인은 경계를 완전히 푼 듯 돌아섰다.
그래도 오래 있으면 안 되겠다.
오랜 잠입 취재로 다져진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리벨은 마지막으로 홀을 한 바퀴 더 돌아보기로 결심했다.
“여기. 잔 하나만 더.”
그때 가까운 테이블에서 한 명이 그녀에게 손짓했다.
이자는 리벨도 아는 자였다. 의전원 사람이었으니까.
잔을 채워 준 리벨은 트레이를 끌며 결론 내렸다.
이건……. 그냥 기삿거리가 아니다.
[루엘라 후작가에 열린, 비밀스러운 살롱!?]
……같은 제목으로 기사를 냈다간 벨 기자의 목이 날아갈 터였다.
물론 벨 기자 목이 곧 리벨 폰 디란타의 목이니 그림자들이 막아 주겠지만, 아무튼 기자 한 명 선에서 정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듯했다.
이건……, 감찰기사단이 필요했다.
귀족들을 조사하고 처벌할 권한을 가진 그들이.
“거의 돌아본 듯합니다.”
그때 그녀의 옆을 스치며 미엘이 말했다.
“응, 좀 있다 나가자.”
리벨은 짧게 답했다.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스쳐 지나가며 나눈 대화였다.
“거기 너, 밖에서 새 잔 더 가져와.”
그리고 그때쯤, 나갈 기회는 자연스럽게 생겼다.
바쁘게 일하는 그녀를 보면서 가장 낮은 지위의 하녀라 생각했는지, 하인 하나가 일을 시켜 온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리벨은 트레이를 이끌고 문 쪽으로 향했다. 조금 불안한 건 이 문이 처음 들어왔을 때 들어온 문이 아니란 거였다.
하지만 나가는 사람들이며 사용인들이 다 이곳으로 오가는 걸 보면 나가는 문은 이쪽임이 분명했다.
우리가 통해 온 마법 문은 쌍방 통행이 아니라고도 했고.
그렇게 결론 내린 리벨이 문을 밀었다. 그러면서 홀을 흘끗 돌아보았다.
이미 나인과 미엘은 연기처럼 사라진 뒤였다.
그러니까 땅에 숨는 건지 천장에 숨는 건지 하여튼, 그거 어떻게 하는 건지 가르쳐 달라고 하면 가르쳐 주려나?
……배우려고 해도 몸치는 못 배우겠지?
―딸랑!
리벨이 문을 밀고 나가자, 문에 걸린 종이 흔들리면서 청명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눈앞에 지하 통로가 펼쳐졌다.
“……?”
리벨이 눈을 깜빡일 때였다. 미엘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대로 직진하시면 됩니다. 위험 요소는 없습니다.”
“제가 뒤에서 호위하겠습니다.”
뒤이어 들린 건 나인이었다. 정말 여러 번 생각하지만 신출귀몰한 사람들이었다.
―드르륵.
트레이를 끌며 리벨은 통로를 걸었다. 생각보다 통로가 길다고 생각할 때쯤, 통로 끝에서 옅은 빛이 보였다.
그렇게 통로 밖으로 나오자, 그곳은 웬 작은 방이었다.
처음 루엘라 후작가의 문으로 나왔을 때처럼, 문 하나밖에 없는 방.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의 문은 손잡이도 잘 보이지 않게 벽지와 똑같은 무늬로 위장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달칵.
문을 닫은 리벨은 더는 필요 없어진 트레이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좁은 방문을 열었다.
문밖에서는 미엘이 깍듯한 표정으로 묵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는 온갖 옷들이 보였다. 그녀가 나온 곳은 ‘FITTING ROOM’이라고 쓰인 곳이었다.
―달그락.
그리고 그녀가 잡고 있는 문에서는 [수리 중]이라는 나무판이 흔들렸다.
“의상실이야?”
“예. 시내의 의상실로 파악됩니다.”
미엘이 답했다. 바깥을 살핀 나인이 말했다.
“크라이베리 신문사에서도 멀지 않은 장소입니다.”
“뭐?”
그럼 정말 수도 시내 한가운데라는 건데?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한밤중이라 시내라도 사람은 없었다. 리벨이 의상실을 한 바퀴 둘러보는 사이, 나인은 그녀가 끌고 온 트레이를 의상실 한쪽 구석에 밀어 놓았다.
그곳에는 같은 모습의 트레이 몇 대가 모여 있었다.
원래, 이곳과 저 기묘한 도박장이 연결되어 있는 곳이란 증거이리라.
“……나가자.”
리벨은 안쪽에서는 [영업 중], 밖에서는 [자리 비움]으로 걸려 있을 문패를 보며 의상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후우.”
차가운 밤공기가 세 사람을 맞이했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리벨은 눈을 크게 떴다.
“여긴…….”
[렐라 의상실]
세 사람이 나온 의상실은, 리벨도 아는 곳이었다.
* * *
―덜컹!
한밤중이었지만 마차는 곧 준비되었다. 그림자들이 준비한 마차를 탄 채 변신을 푼 리벨은 생각에 잠겼다.
“렐라 의상실하고 연결된 도박장에…… 살롱까지 있단 말이지.”
리벨이 뇌까렸다.
“아무리 봐도 수상하지, 거기?”
리벨의 말에 마차에 같이 타고 있던 나인이 고개를 숙였다.
“예. 적법한 의도로 만들어진 공간은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도 그래.”
그리고 이 세계에서 법이란 곧 황가를 뜻한다.
쥬리 백작 영애가 보였던 것도 그렇고, 마치 다른 세상인 것처럼 바깥의 신분과는 상관없이 ‘붉은 천’ 근처에서만큼은 공손해지던 사람들.
“……그런데 상관없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어.”
하지만 도박장에 있는 모두가 같은 의도를 가지진 않은 듯했다.
여유롭게 그저 놀이처럼 도박을 즐기는 자들이 있나 하면, 눈 밑이 시커메져서는 득달같이 달려드는 귀족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이벨라 자작을 들 수 있겠다. 리벨이 이마를 짚었다.
“그 얼간이를 미쳤다고 비밀 공간에 초대할 리는 없고…….”
“아마 공간이 들킬 만약의 상황에 대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리벨은 그 말에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냥 불법 도박장이었다, 정도로?”
“예.”
하긴 그럼 신고당해도 강한 벌금만 맞고 말았을 것이다.
귀한 신분의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만큼 붉은 천 뒤에서는 그들이 따로 노는 공간이 있다고만 말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 붉은 천 안팎을 오가는 사람들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는 그곳이 그저 도박장만은 아니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이건 아무래도 기사로 쓸 일이 아닌 것 같아.”
―덜컹!
마차가 다시 흔들렸다. 마차는 디란타 별저로 향하고 있었다.
디란타 사람들은 또 리벨이 ‘취미’ 때문에 나갔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이번 건, 시스한테 말해야 할 것 같아.”
하지만 짜잔! 그 취미가 어쩌다 보니 가주님을 돕는 꼴이 됐습니다!
“대공 전하께는 왜……?”
그때 나인이 물었다. 리벨이 아차 했다.
시스테인이 감찰기사단장인 건 비밀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행동을 봐서는 나인과 그림자들도 시스테인의 감찰기사단장이라는 비밀 신분을 모를 가능성이 높았다.
‘말하고 다닐 생각이니?’
그렇게 말하며 해사하게 웃었던 리엔 황태후를 떠올린 리벨이 저도 모르게 목을 가다듬었다.
“……어쨌든 여긴 제도고, 뭔가 수상한 일이 있으면 제도기사단장인 시스테인도 알아야 할 거 아냐.”
나인은 그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한 기색이었다.
“…….”
리벨은 그사이 수첩을 펼쳤다.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기억나는 이름들을 줄줄이 써 놓은 것이었다.
[쥬리 백작 영애
필레 공작
페티아 후작
롤란드 디엘렌
…….]
얼굴은 몰라도 어디서 본 것 같은 유명 인사들까지 곳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은 나인과 미엘이 이름을 알고 있어 목록에 추가되었다.
그들의 기억까지 합해지니 수첩은 정말 한가락 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대부분인 공간이 되어 버렸다.
“아무리 봐도 이건…….”
시스가 오자마자 말해야겠다. 거기까진 좋은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 사람한테…… 거기 갔던 일을 뭐라고 설명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