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연회 갔다가 길을 잃어서 우연히 비밀 공간에 가 버렸다고?
그럼 거기에 디란타 대공비가 떴었다는 소식이 사람들 사이로 알음알음 퍼지는 게 당연하고, 감찰기사단장인 그가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이번 잠입은 완벽했다.
대외적으로 디란타 대공비는 머리칼 한 올이라도 도박장에 가기는커녕 디란타 대공저로 일찍 귀환해 버렸다.
직접 봤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변신 능력을 들켰다간…….
‘꽉 잡아.’
리벨은 틸라 상단주의 저택에서 본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벨 기자는 이날 저택에 온 것도 모자라……, 저택을 활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던 그의 모습도.
비록 그땐 남자 모습이었다고 해도 변신 능력이 있다는 걸 들켜 봐야 좋을 건 없었다.
리벨은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그냥,”
황태후 폐하께 찌를까?
어차피 나인과 다른 그림자들도 알고 있으니 보고는 올라갈 것이다.
그런 불법 도박장이 있고, 수상쩍은 자들이 붉은 천 안팎을 오갔다는 것 정도는.
라인업을 보니 원작에서 나온 반역이 확실한 것 같은데. 거의 100%…… 아니, 98%는 되는 것 같은데.
문제는 황태후 리엔에게 말한다고 해도, 이들을 반역자라고 말할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나인과 그림자들도 이들을 반역자라고 보고하진 않을 터였다.
하지만 리벨이 보기엔 앞구르기 하고 봐도 뒷구르기 하고 봐도 반역자 라인업이었다.
이걸…… 사실 제가 원작을 봤습니다! 할 순 없으니 적어도 이 사람들의 최근 동선이 겹치는 부분이 있는지, 뭔가 꾸미는 게 있는지 실마리라도 잡아다가 들이대야 했다.
“…….”
그걸 알기 위해서는 역시 감찰기사단이……. 리벨이 머리를 싸맸다.
“근데 하필 렐라 의상실이었단 말이지.”
리벨은 눈살을 찌푸리며 뇌까렸다.
그 크라이베리 1면 신문 기사의 땜빵으로 나왔던 게 이 렐라 의상실이었다.
이런 비밀스러운 공간과 통하는 의상실을, 굳이 대외적인 광고에 올린다고?
물론 신문에 뜬 광고를 눈여겨보는 사람이야 거의 없다. 하지만 그런 장소일수록 없는 듯 있는 게 낫지 않은가?
리벨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그곳은 만들어진 지 몇 달 되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오가는 자들은 오래전부터 오갔던 것처럼 체계가 잡혀 있더군요.”
나인이 말했다. 리벨이 그를 돌아보았다.
“특히 그 붉은 천 너머로 들어갈 수 있는 자와 아닌 자가 자연스럽게 나뉘는 분위기는, 그 몇 달 사이에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그랬지.”
리벨도 그건 느꼈다. 그리고 롤란드는 놀랍게도 그 붉은 천 뒤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지만 이벨라 자작은 들어가지 못했다. 리벨은 눈을 가늘게 떴다.
생긴 지 몇 달 되지 않은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명확히 정해진…….
잠깐만.
“그럼 다른 장소에서 옮겨 왔을 수도 있다는 거네?”
“예.”
깍듯하게 답한 나인이 말을 이었다.
“보통 그런 모임은 비주기적으로 장소를 옮기는 특성을 보입니다. 특히, 들켜서는 곤란하다면 더더욱.”
“그렇다면…….”
리벨이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인의 말대로라면 아귀가 맞았다.
만약 크라이베리 신문에 땜빵용인 듯 실렸던 광고가, 위치가 바뀌었다는 신호였다면?
리벨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광고가 있는 신문을 버린 게 한이었다.
짐작대로라면 거기에 그 도박장에 오가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어떤 표식이 있었을 것이다.
“흐음.”
리벨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크라이베리 신문이 어떻게 광고를 채택하는지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터였다.
기자 일하는 사람이나 신문사 사람이면 모를까.
한마디로 거기에 뜬금없이 나타난 의상실 광고를 이상하게 여긴 사람은 거의 없었을 거라는 뜻이다.
그냥 렐라 의상실이 돈 좀 줬구나, 했겠지.
그리고 그 모임을 쫓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나 양지로 나온 곳이 수상한 짓을 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 효과를 노릴 수도 있었다.
리벨이 입가를 매만졌다.
“일단 오늘 저녁이면 시스가 온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황태후 폐하도 같이 뵈러 가기로 했으니까. 그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
“자료나 정리해 놓자. 그리고 그…… 자료를 내가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꾸며 내야 하는데.”
역시 작은 거짓말이라도 한번 하면 둘러대야 할 것이 점점 늘어나는 법이다. 으윽.
리벨은 떫은 표정으로 나인에게 손짓했다.
“그럴 방법도 좀 찾아봐.”
“안전 문제로 저택 전체를 수색하던 도중에 발견한 것으로 처리하면 대공 전하께서도 의심하지 않으실 듯합니다.”
리벨이 고민하던 답은 나인에게서 바로 튀어나왔다. 역시 전문가(?)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고 자료 정리부터. 알았지?”
“예.”
준비도 끝냈겠다, 얼른 오세요! 사안이 아주 급하답니다!
리벨은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한 채 저택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날 저녁, 시스테인은 귀환하지 않았다.
리엔과의 티타임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도, 마찬가지였다.
* * *
다음 날, 결국 리벨은 리엔과의 티타임에 혼자 갈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시스테인과 같이 들르겠다는 연락을 받았던 리엔은 의아해했다.
“너희, 싸웠니?”
같이 온다던 사람이 없으면 물어볼 법한 질문이긴 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입니까?
“시스하고 제가 싸울 리가요.”
리벨이 볼을 긁적였다. 리엔이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일 때문에 대공령에 가서, 아직 안 돌아왔어요.”
그 말에 리엔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번엔 같이 온다더니.”
그으것이 제가 구라를 친 것이 아니옵고. 리벨은 슬쩍 리엔을 살폈다.
다행히 리엔은 의아해할 뿐 불편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약속보다 늦네요.”
그럴 사람이 아닌데. 리벨이 중얼거렸다. 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그러고는 준비된 자리에 앉으며 미소 지었다.
“근래에는 대공령에도 안 들르는 것 같더니, 혹시.”
그녀의 미소가 리벨이 두려워하는 그 해사한 웃음으로 변했다.
“혹시 네게 흥미를 잃은 건 아닐까?”
그그그럼 제 미래가 앞으로 어떻게 되나요? 리벨은 반짝이는 리엔의 눈을 보면서 슬그머니 고개를 저었다.
“아닐……걸……요? 쉬고 온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리엔의 눈은 여전히 반짝였다. 리벨이 손을 펴 보였다.
“쉬고 온다. 돌아온다. 요컨대 제게 다시 돌아오신다는 뜻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관심이 식은 건 아닌 것 같으니 그 초롱초롱한 시선 좀 거둬 주시겠습니까?
시스가 흥미를 잃었다고 하면 황태후의 흥미로운 장난감이 될 위기에 처한 리벨은 슬그머니 뒤로 고개를 물렸다.
리엔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럼 대체 뭘까?”
그녀가 즐거워할 때였다.
―쿵쿵!
다소 급하게 들리는 노크 소리가 울렸다. 리벨이 문을 돌아보았다.
대체 어떤 간이 비대한 사람이 황태후 폐하의 방문을 이렇게 거세게 두드린단 말인가?
“삶이 지루한 아이가 있나 보구나.”
그 생각은 리엔도 같은 듯했다. 살벌한 말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아가가 불렀니?”
“네?”
아뇨, 제가 돌았습니까? 리벨이 고개를 홱홱 저을 때였다.
“대공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들일까요?”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리엔의 눈부신 미소와 그걸 지켜보는 리벨의 불안한 눈빛이 부딪혔다.
“저정말아닙니다.”
“……그럼 무슨 일이 있는 거로구나.”
리엔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문은 바로 열렸다.
문밖에 있는 ‘삶이 지루한 아이’는 다름 아닌, 나인이었다.
“……나인?”
리벨이 눈을 깜빡일 때였다.
황태후가 손짓하자 나인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대공 전하께서, 대공비 전하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누가 뭐가 필요하다고? 리벨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필요?”
시스테인과 어울리지 않는 그 단어를 그녀가 뇌까릴 때였다. 리엔이 소리 없이 웃었다.
“외근 후에는 아내가 여러모로 보고 싶은 법이지.”
아뇨? 그런 므흣한 전개가 아닌 것 같은데요?
리벨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가 나를 찾을 만한 이유.
대공령에 가기 전의 그는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설마?
마력 폭주?
내가 가까이 있으면 나아진댔으니까?
근데 나로 진정이 될 거면 대공령은 왜 갔는데?
뭔가 일이 있는 건 확실했다.
“가 보렴.”
그때 리엔이 말했다.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아직 폐하와 이야기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는걸요.”
“그건 나도 아쉽지만,”
리엔이 나인을 가리켰다.
“시스가 네가 ‘필요’하다지 않니. 원하는 것이 그리도 없던 아이가.”
그러게요. 리벨은 나인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리엔을 보았다.
“어서 가 보렴. 자리는 다시 만들면 되니까.”
“정말 가 봐도 되나요?”
리벨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이미 일어난 상태였다.
시스테인의 불안정해 보이던 그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설마 내가 내 아들 일로 경을 칠까.”
리엔의 말에 리벨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그그그렇죠?
슬그머니 리엔에게 인사한 리벨은 재빨리 그녀의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궁을 빠른 걸음으로 걸어 벗어나다가, 이내 뛰기 시작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져도 담담할 것 같던 그 사람이 흔들린다고 생각하니 너무 불안했다.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서.
그 생각에 마차에 날듯이 올라탄 리벨은 문득 멈칫했다.
걱정된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완벽한 사랑으로 시작된 부부관계가 아니라도, 몇 달을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정이 드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득, 그녀는 걱정 이상의 불안감을 느꼈다.
“……대체 왜 이렇게 불안하지?”
그는 저택으로 어쨌든 돌아왔으니, 괜찮을 것이다. 무슨 일로 나를 필요로 하는지는 몰라도.
하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혹시 그가 잘못되면 내 대공비라는 위치가 흔들릴까 봐 그런 거 아닐까?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만 리벨은 저택이 가까워질수록, 그런 계산적인 생각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죽어도 나는 대공비다. 남편을 잃은 사람이 될 뿐이지.
하지만 그 전에 그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나아가 웃고 울었으면 좋겠다.
저를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리벨은 담담하게 ‘쉬고 오겠다’라던 시스테인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주인도 모르게 스며든 감정이 그녀를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