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덜컹!
리엔은 리벨이 나간 후 테라스에 서 있었다.
그곳에서는 리벨이 급히 타고 나가는 마차가 잘 보였다. 저 마차는 황궁을 벗어나 곧장 디란타 별저로 향할 것이다.
“흐음.”
그 마차를 내려다보며, 리엔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아가가 뭔가를 숨기는 것 같단 말이야.
리벨은 이 티타임에 처음에는 공포를 느꼈다.
그러다가 리엔이 분위기를 풀어 준 후에는 마치 다른 데서 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풀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처럼 여겼다.
통통 튀는 기자의 시선으로 본 바깥세상은 신선했다. 리엔은 그녀가 전해 주는 잠입 취재 이야기나 시스테인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흥미롭게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전 같았으면 긴장한 얼굴에, 빠른 속도로 뇌를 거치지 않은 말을 내뱉다가도 눈치를 몇 번이고 살폈을 리벨은 오늘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비록 짧은 시간 있었지만 알 수 있었다.
리벨은 티타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곧 둑이 무너진 것처럼 말을 쏟아 내곤 했으니까.
그 사실을 아는 리엔이 보기엔, 오늘의 리벨은 더욱 이상했다.
“대체 무슨 일일까.”
하지만 그녀는 한 번쯤은 추궁하지 않아 주기로 했다. 아직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아가를 위한 건지, 아니면 시스를 위한 건지…….”
그게 후자라면 거듭 지켜봐 줄 용의가 있었다.
리엔은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아는 건, 없니?”
그녀의 말에 지금까지 숨어 있던 그림자 한 명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그녀는 리벨 옆에서 하녀로 일하기도 하는 그림자였다.
“112번.”
리엔이 말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리벨이 엘브라는 이름을 붙였다지.
“죄송합니다. 두 분께서 말씀을 나누실 때는 주변을 모두 물리십니다.”
112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신혼부부 근처에 있어 봐야.”
눈을 가늘게 뜬 그녀가 웃었다.
“게다가 시스, 그 아이는 예민하니까.”
누군가 제 근처에 숨어 있는 걸 싫어할 터였다.
결론적으로 리벨에게 붙여 놓은 그림자들로도 정보를 얻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거라는 뜻이었다.
“억지로 알아낼 수야 있겠지만…….”
리엔은 손등을 매만지며 작게 말했다.
“아직까지는, 괜찮아.”
지켜볼 만해, 아가. 리엔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사이, 리벨의 마차가 리엔의 시야에서 벗어나 먼 곳으로 사라졌다.
* * *
시스테인은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힌 상태였다. 대공령에서 엄청난 양의 마력을 풀어놓고도 그랬다.
그는 리벨에 대한 갈증을 알아채고, 그게 더욱 심해지자 결국 제국령으로 돌아왔다.
이대로 리벨을 만나면 그녀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처음엔 자제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날 생각을 하니, 놀랍게도 눈앞이 조금은 맑아지는 듯했다.
대공령에 들어선 내내 붉게 물들어 있던 시야가 조금쯤은 맑아진 것이다.
“대체.”
그가 짧게 숨을 내뱉었다. 그는 열 살 이후 처음으로, 제 변화를 알아챌 수 없었다.
객관적으로 저를 들여다보는 데에 익숙한데도 그랬다.
대체 무엇 때문에 마력이 날뛰다가도 죽은 듯이 잠잠해지는지, 그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다른 건 괜찮아도 리벨이 관련되면, 도통 알 수가 없어졌다.
“…….”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평소 눌려 있던 게 제대로 날뛰기 시작하자 제어하기가 배로 힘들어졌다는 점이었다.
“후.”
그가 답답한 마음에 넥타이를 잡아당겨 느슨하게 풀었을 때였다.
―덜컹!
―히히힝……!
바깥에서 마차 소리가 들려 왔다.
온다.
그가 뇌까렸다. 들끓는 마력 때문에 예민해진 그의 기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가 갈증을 느꼈던 사람은 그가 감지할 수 있는 범위 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이 사태를 해결할 ‘정답’이었다는 듯이, 들끓던 마력은 잠잠해지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떠나기 전에는 그녀를 볼 때마다 마력이 들끓어서 참을 수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가라앉는다고.
“…….”
이상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이마를 짚었다.
그때쯤 저택 앞에 멈춰선 마차에서 리벨이 급히 내리고 있는 게 보였다.
“앗,”
그러면서 마차 턱에 걸려 넘어지려는 걸, 기사가 받아 주는 게 보였다.
저 기사를 리벨이 나인이라고 불렀지.
시스테인은 심장을 조이는 것 같았다.
아니, 그녀가 넘어지려는 순간 꽉 조였던 심장이, 나인이라는 그림자가 그녀를 붙잡아 주는 순간 확 불타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주변이, 그녀의 행동이 하나하나가 기폭제가 되어 그를 날뛰게 했다가 진정시키길 반복하고 있었다.
“…….”
눈을 감은 그가 다시 마력을 잠재우려 애쓸 때였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지금이라도 의사를 부를까요?”
문밖에서 헬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다.
그녀는 아까 리벨을 부르러 황가에 사람을 보낸 후로 줄곧 문 앞에 서 있었다.
황태후와의 티타임에 간 그녀를 불러오라는 말에 헬리아는 놀랐지만, 시스테인은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대신 헬리아에게 방 밖으로 나가라 명령했다.
‘전하,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도 시스테인은 축객령을 거두지 않았다.
한눈에 봐도 제 상태는 안 좋아 보였을 터였다. 목 뒤가 식은땀으로 젖을 지경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어떤 자극이든 줄여야 했다. 때문에 헬리아뿐만 아니라 기사들까지, 모든 사용인들을 방에서 내보냈다.
“전하!”
헬리아가 거듭 그를 불렀다. 시스테인이 눈을 감았다 떴다.
“아니, 들이지 마라.”
그가 답했다. 그러자 밖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전하!”
그건 가문 주치의의 목소리였다. 헬리아가 결국 부른 건지, 아니면 제가 알아서 온 건지 몰라도 들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뜨거운 이마를 짚은 시스테인이 숨을 내뱉었다.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지금 필요한 건 의사가 아니니, 물러가라.”
그가 채 가라앉히지 못한 살기까지 묻어난 말이었다. 그 말에 문밖이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
시스테인은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억누르지 못한 탓에 문밖의 사용인들은 살기뿐만 아니라 마력까지 느꼈을 가능성이 컸다.
아무리 디란타 대공령에서 온 사용인들이, 대공령에서 그의 전장을 보며 그에게 ‘기이한 힘’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고 해도, 그들은 결정적인 걸 몰랐다.
그가 폭주할 수도 있다는 것.
시스테인이 그것만큼은 필사적으로 숨겼기 때문이었다.
제게 광기가 있고, 그가 황제와 같은 피를 이은 이상 그 사실이 알려져 봐야 황가에 누가 될 뿐이었다.
게다가 이 능력은.
“…….”
시스테인이 재차 숨을 들이마시며 속을 가라앉혔다. 눈을 감자, 문득 어린 시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건 제 모습이 아니었다.
피범벅이 된 형 카리스의 어린 얼굴이었다.
―우우우웅!
그의 마력이 다시 기억에 반응해 날뛰기 시작했다. 그가 입술을 짓씹을 때였다.
―탁, 탁, 탁, 탁…….
리벨이 저택 로비에 들어서고, 급히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시스?”
문밖에서 리벨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번 더, 심장이 조이는 듯했다.
“리벨.”
그가 짧게 답하자, 문이 열렸다.
―달칵.
열린 문틈으로 살짝 고개를 내민 리벨이 물었다.
“괜찮아요? 들어가도 돼요?”
그렇게 묻던 리벨이 그의 안색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 * *
리벨은 시스테인의 안색을 보고 놀랐다.
누가 봐도 아픈 얼굴이잖아! 새하얘진 얼굴에 파리해진 입술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쉬고…… 온다고 하셨잖아요.”
거 뭐더라, 정신 수양도 하신다면서요?
근데 이건 누가 봐도 정신 수양 내지는 휴가를 보내고 온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리벨은 저도 모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달칵.
그녀의 뒤로 다시 문이 닫혔다.
아차.
리벨은 시스테인이 허락하기도 전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늦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시스테인이었다.
“괜찮아요?”
리벨은 밭은 숨을 내쉬고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평소와는 다르게 넥타이까지 거칠게 풀어 헤쳐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늘 판에 찍어 낸 것처럼 완벽한 매너와 복장을 갖추고 있던 그였는데.
그만큼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뜻이리라.
대체 무엇 때문에?
분명 떠나기 전, 그는 폭주할지도 모르는 마력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이내 그의 앞에 도착한 리벨이 재차 물었다.
“대공령에 가면…… 괜찮아지는 거 아니었어요?”
리벨은 새삼 휑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사용인들은 모두 문밖에서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서 있었다.
가문의 주치의까지 있는 걸 보니 불려오긴 했지만 방 안에 들어오지 못한 걸로 보였다.
이 방에 들어오는 걸 허락받은 건 사용인들과 집사 헬리아, 주치의들을 포함해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리벨 혼자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조차도 시스테인의 상태를 제대로 모르는 듯했다.
시스테인은 이 상태를 비밀로 하고 싶은 걸까.
리벨은 그에게 작게 물었다.
“의사는 안 불러도 괜찮아요?”
그 말에 시스테인은 짧게 숨을 내뱉었다.
“……알리고 싶지 않습니다.”
역시 그랬나 보다. 리벨은 그의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리벨이 그에게 속삭였다.
“폭주할까 봐 그러는 거죠?”
그 말에 시스테인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긴 시간 그를 모셔 왔을 디란타의 사용인들조차도 이것을 몰랐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리벨은 그를 살피다 물었다.
“만약에, 여기서 폭주하면…… 어떻게 하려고요?”
그럼 폭주 사실을 숨길 수도 없게 된다. 하지만 그는 대공령으로 떠나기 전보다 더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지 않기 위해,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드러내지 않기 위해, 리벨이 필요했습니다.”
리벨은 그 말에 살짝 입을 벌렸다.
“대공령에서는요?”
시스테인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대공령에서 마력을 풀어놓는 게 정답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조금 다급하게 말하던 그가, 탁한 숨을 내쉬었다.
“갈증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갈증? 리벨이 눈을 크게 뜬 순간이었다.
시스테인이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매만졌다.
“당신이 오기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