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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80)화 (80/167)

제80화

시스테인의 손이 리벨의 볼을 천천히 쓸었다.

리벨이 눈을 크게 뜬 사이, 시스테인이 옅게 미소 지었다.

“좀, 낫군요.”

늘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에 표정이 한 겹 덧씌워진 것만으로도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편안해 보이는 웃음.

“……아.”

리벨은 그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저번처럼 지적하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다.

그럼 금세 그는 저 미소를 거둘 테니까. 저 햇살 같은 따스한 미소를.

“괜찮아졌어요?”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이 숨을 조금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아직 안심할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리벨은 문득 디엘렌 연회에서의 그를 생각했다.

그때도 그랬지.

내게 닿으면, 나아지는 것 같다고.

그때도 그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도, 화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

“…….”

리벨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마력적인 문제라면, 대공인 그의 위치에서 얼마든지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침묵을 가르고 리벨이 입을 열었다.

“의사가 소용없을 것 같다면, 마법사를 불러 보거나, 아니면 황태후 폐하께 말씀드려 볼까요?”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아무런 외부적인 도움 없이 견디게 둘 순 없었다.

무엇보다 황태후 리엔, 그분이라면 대륙을 뒤집어서라도 시스를 치료할 방법을 찾으려 하실 터다.

하지만 그 말에 시스테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게.

“안 됩니다.”

목소리 역시 또렷했다. 다소 다급하게 들리기도 했다.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마법사요? 아니면…….”

황태후 폐하께 알리는 것조차도?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은 짧게 답했다.

“둘 다.”

마법사도, 황태후 폐하도 안 된다고? 리벨은 눈을 깜빡였다.

“마법사들이야 외부인이 다수일 테니 그렇다 치고, 황태후 폐하께는 왜……? 가족이잖아요.”

그것도 나와 이벨라 자작 같은 사이도 아니고, 황태후 폐하께서는 시스를 아끼고 계시지 않은가.

“설마 황제 폐하 때문에……?”

리벨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분명 황제 폐하께서는 시스를 경계하고 계셨지.

그것 때문인가?

만일 시스테인이 능력 없는 사람이었다면 황제 카리스도 그를 경계하지 않았을 터였다.

마력 없이도 무예며 두뇌 등 어디 한 군데 빠지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거기에 강대한 마력까지 가지고 있다고 하면.

“…….”

하지만 시스테인은 침묵했다. 리벨이 그를 살폈다.

아까보다 조금은 혈색이 돌아왔지만 식은땀을 흘리는 건 그대로였다.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폐하가 신경 쓰인 것은 맞습니다. 황위 때문은 아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폐하’라는 호칭은 일부러 카리스와 거리를 두는 것 같았다. 리벨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황위 때문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 때문에?

“……왜인지, 물어봐도 돼요?”

그 말에 시스테인이 눈을 떴다. 오늘따라 짙어 보이는 그의 푸른빛 눈동자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일단 앉아요.”

리벨은 여전히 책상에 팔을 짚고 서 있는 그를 의자에 앉혀 주었다.

그러자 시스테인이 짧게 숨을 내뱉었다.

“…….”

잠시간의 침묵. 그동안 리벨은 그를 살폈다.

그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이내 한참 만에 눈을 감고 있던 시스테인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폭주하기 직전이 되면, 폐하가 떠오릅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릴 적의 그분이.”

어릴 적? 리벨이 그의 말에 집중했다.

시스테인이 제 손을 들어 보였다. 리벨은 문득 그 손을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언젠가 마법 필름이 닿자마자 사진이 인화되어 우수수 떨어져 내렸던 그 손.

어지간한 마력으로는 인화하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그는 손이 스치는 것만으로 아주 선명하게 사진을 인화해 냈다.

엄청난 마력이 흐르고 있었다는 거다.

“어릴 때는, 제게 잠들어 있는 마력이 그저 좋은 능력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가 제 손을 천천히 쥐면서 말을 이었다.

“점점 양은 늘어만 갔고, 폐하를 위해 좋은 마법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죠…….”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릴 때의 그는 안이했다. 그가 자조하듯 웃었다.

“그분께서 경계하시더라도, 제가 잘 처신하면 자연스럽게 풀리리라 생각했습니다.”

안 그랬을 것 같은데. 리벨이 생각했다. 그 결과 아직도 카리스는 시스테인을 경계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애초에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리벨은 카리스를 생각하며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런데 열 살이 되던 해, 일이 생겼습니다.”

시스테인이 손을 내렸다.

“제가 마력을 제어하는 능력보다 마력이 늘어나는 속도가 더 빨랐고, 그건 제 몸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럼 제어가 안 됐다는 뜻이다. 리벨은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것 같았다.

“……폭주한 거예요?”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조금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저는 그때의 기억이 대부분 없습니다. 단편적인 기억들뿐.”

그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기억 속 어린 폐하께서는…… 충격과 공포가 뒤섞인 얼굴로 저를 보고 계셨습니다.”

무엇에? 그렇게 되묻기도 전에 시스테인의 낮은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피범벅인 팔을 붙잡은 채로요. 그 뒤로는 반파된 별장이 보였습니다.”

“아…….”

리벨이 탄식했다.

“폐하를…… 공격한 거예요?”

“아마도요.”

시스테인은 눈을 감았다.

“폭주하면 눈앞에 있는 것들을 가리지 않고 공격합니다.”

어떻게든 제 몸에서 마력을 빼내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그가 짧게 숨을 내뱉었다.

그 덕에 그들을 모시던 별장의 시종과 시녀, 기사들까지 모조리 죽어 버렸다.

그 난장판에서 카리스가 살아남은 건 기적이었다.

“폐하께 더 폐를 끼치지 않은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시스테인의 낮은 목소리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당시, 시스테인의 폭주가 제어 불가능한 마력 때문이란 걸 알게 된 리엔은 마법사를 불러 자문을 구했다.

하지만 마법사는 ‘자라시면 몸이 마력을 감당해 해결할 일’이라고만 했다.

그렇다면 다시 말해, 몸이 자랄 때까지는 사고를 막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그 사실을 알자 리엔은 일단, 사실을 아는 마법사의 입부터 빠르게 막았다.

마법사를 죽임으로써.

그리고.

“……그리고, 자진해서 청했습니다.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시스테인은 디란타 가문의 문장을 보다가 말했다.

“디란타에 가겠노라고.”

원작에 따르면 당시 디란타는 대공령이 아니었을 것이다. 시스테인이 대공위를 받은 건 10대 후반의 일이었으니까.

리벨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빠르게 맞추어졌다.

그 당시 괴물들의 땅인 디란타는 황가 소속의 땅이었다. 한 마디로 그곳을 가지려는 귀족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마물과 몬스터가 날뛰는 무법지대였을 것이고, 그곳을 막는 데에 제국의 병력이 꽤 들어갔다고 했다.

“그곳엔 괴물들이 많으니, 제가 폭주하더라도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시스테인의 담담한 말이 이어졌다. 열세 살이 하기에는 너무 아픈 생각이었다.

리벨은 그 말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잇는 시스테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머니께서는 기꺼이 저를 보내 주셨습니다. ‘안정을 되찾고’ 돌아오라 하시면서요.”

리벨은 살짝 입을 벌렸다. 황태후 리엔의 저 말은, 다시 말해 마력을 제어할 힘을 가질 때까진 돌아오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황태후와 만난 지 불과 몇 달 안 된 자신보다, 열세 살의 시스테인이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디란타에 가서도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마력을 풀어놓아도 마력이 몸에 쌓이는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에.”

그는 조금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다 언젠가 깨달았습니다. 제가 마력을 제대로 제어할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리고,”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디란타는 너무 외로운 곳이라는 것을.”

그때 그는 고작 열세 살이었다. 카리스를 공격한 건 시스테인 자신도 놀란 일이었을 텐데, 제대로 마음을 정리하기도 전에 그는 디란타령으로 떠난 것이다.

이런 잔인한 내용은 원작에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서술되지 않았다.

리벨은 그의 파리한 얼굴에 저도 모르게 손을 얹었다.

시스테인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3년이 지났습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덤덤한 목소리가 다시 과거를 끄집어냈다.

둘째 황자가 긴 시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건 귀족가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화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병이 있는 건 아니냐는 말부터, 디란타의 ‘괴물’이 되어 버린 건 아니냐는 온갖 뒷소문들까지.

그리고 그 사실은 빠짐없이 시스테인에게 전해졌다.

황성을 나서 있으면서도 외부의 소식에 완전히 어두워서는 곤란했기 때문에. 그랬다가는 마치 격리되듯 디란타로 떠났다는 것을 귀족가에 알리는 꼴이었기 때문에.

어린 그는 그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는 그 뒷말들에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건 반격할 수 없는 가해였고, 그는 그저 견뎌야만 했다.

어느새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작은 뒷이야기 하나가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지, 그는 앉은 자리에서 스스로에게 들려오는 말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것에 그가 괴로워할 때쯤, 당시 황후였던 리엔은 둘째 아들이 돌아오길 바랐다.

그때는 막 카리스가 황좌에 앉았을 시기였다.

“이만 돌아오라는 편지에 저는 회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런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어린 그는 다시 폭주했다.

아직도 마력을 제어하지 못하는 제게 화가 나서. 그리고 형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서.

“그리고 그 순간 알았습니다. 무엇이 저를 폭주시키는지.”

그가 손을 펴 보였다.

“감정의 흔들림이 문제였습니다. 처음 폐하를 공격했을 땐, 그분과 사소한, 아주 사소한 다툼이 있었고.”

그가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가 말했다.

“어머니께 편지가 왔을 때는, 어머니와 형을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가 속삭였다.

“나는 영원히 이 괴물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것들과 다름없는 괴물이라는 사실에 절망했던 것 같습니다.”

리벨은 슬슬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알 것 같았다.

시스테인은 왜 자신이 폭주하는지를 알았고, 여전히 제대로 제어할 순 없지만, 수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용인들은 물론 주변에 제 마력에 대한 사실을 풀어놓은 적이 없었다.

그 마력을 조절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리벨 자신만을 제하면.

“그때쯤 귀족가에서는 제가 디란타에 간 이유로 온갖 것을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제가 광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같은 피를 타고난 폐하께마저 폐를 끼칠 수 있는 상황이었죠.”

“……아.”

하긴 그랬을 것이다. 언제 미쳐서 날뛸지 모르는 ‘병’을 가진 동생.

그와 같은 피를 받은 형 카리스.

황태후의 말과 원작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황제의 사망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정확히는 황태후인 리엔의 짓이었지만.

아무리 리엔이 사실을 감추는 데에 능하다고 해도 미심쩍은 부분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런 때 황가에 약점이 생겨서는 곤란했을 것이다.

리벨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그때 필사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시스테인의 말이 울렸다.

“괴물이, 사람들 사이에 섞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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