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맞아, 이게 내 것이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카리스가 제 머리 위를 가리켰다.
지금은 없지만 황제의 관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씹어 뱉듯 말했다.
“알아서 사라지겠다고 했지.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시선에서는 의심과 분노가 느껴졌다.
그가 가리킨 상처 부위를 생각하면 카리스는 당시 사경을 헤맸을지도 몰랐다.
어린 시절의 그에게는 공포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시스테인의 능력을 경계하는 그는 시스테인에게 공격받아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시스테인은 폭주하면 이성을 잃고 눈앞의 모두를 공격한다고 했다.
당연히 카리스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고, 죽을 뻔한 기억은 그에게도 강렬하게 남았을 것이다.
“……그랬군요.”
리벨이 말을 간신히 받아 냈다. 카리스는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려 버렸다.
반응을 보아서는, 카리스는 확실히 모르는 듯했다.
시스테인의 상태도, 그가 대공령을 자진해서 맡은 이유도.
그사이 리엔이 입을 열었다.
“그것도 있지만, 그 애는 끝까지 디란타령을 책임지고 싶어 했어.”
그녀가 손을 펴 보였다.
“황가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돌아가겠다고 했지. 처리되지 않은 것들이 많다고.”
리엔의 얼굴에서는 다소간의 섭섭함이 드러났다.
“그리고 괴물들을 막을 방법을 찾은 것 같다고, 말이야.”
“아…….”
리벨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저 말이 시스테인이 한 말을 그대로 옮긴 거라면, 시스테인이 말한 괴물은 대공령의 마물이나 몬스터들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그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 때문에 아가가 불편했던 거구나.”
시스테인의 가족들은 정말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시스테인이 감추고 감추었다는 것이다. 필사적으로.
황태후 리엔의 그림자들도 그렇고, 황제 카리스가 가지고 있을 정보 라인을 생각해 보면, 시스테인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그 사실을 숨겼을지 짐작이 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용인들에게조차 숨겼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피나는 노력으로 감춘 것이다. 괴물이 되고 싶지 않아서.
내지는 괴물이라는 이름으로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
언제든 제가 폭주해서, 또다시 형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그럼에도 수도 인근에라도 머무르면서, 이들과 가끔이나마 만나고 싶어서.
리벨은 외로웠다던 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시스테인은 그렇게 해서라도 이 사람들 근처에 남고 싶었던 모양이다. 제 마음을 걸어 잠그고 폭주를 억누르면서.
리벨은 소리 없이 탄식했다.
그녀는 리엔 황태후가 원하던 정답을 찾은 셈이었다.
시스테인이 마음을 닫은 이유를, 알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말할 수는 없었다.
“……네, 조금…….”
리벨은 카리스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카리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손을 펴 보였다.
“네가 한 것도 아니잖아. 시스테인이 한 거지. 물론,”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다른 생각을 한다면, 내 입장도 좀 달라지겠지만.”
뭐뭐뭐뭘 상상하시는지 몰라도 전혀 나쁜 생각 안 하거든요?
리벨은 고개를 흔들었다.
“저 아무 생각 없습니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쩌렁쩌렁 외치자, 리엔과 카리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자랑이다.”
카리스가 어이없어하는 가운데, 리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 * *
리벨만 살벌했던 티타임이 끝난 후, 그녀는 타고 왔던 마차를 타고 다시 돌아갔다.
“네가 있으니 아가가 긴장하잖아.”
리엔은 다시 차에 따뜻한 물을 부으며 말했다.
카리스가 의자에 늘어졌다.
“잘못한 것이 없으면 떨 이유도 없죠.”
그 말에 리엔이 눈을 가늘게 떴다가 웃었다.
“그러게. 그건 그렇지.”
유독 떤다면 그 이유가 있는 법이지.
카리스가 있는 것도 이유겠지만……. 리엔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리벨을 이미 여러 번 만나면서 그녀에 대해 충분히 파악한 상태였다.
리벨은 뭔가를 알아낸 게 분명했다.
하지만 말하지 않고 간 거다. 그것도 모자라…….
“어릴 때의 일이라.”
리엔이 뇌까렸다. 그 이야기를 꺼낸 건 단순히 충격이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떠본 것이다, 이쪽을.
그녀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광증을 앓았던 시스테인의 어린 시절.
그에게는 당연히 감추어야 할 일이었고, 사용인들은 물론이고 그 어디에도 말한 적이 없다고 들었다.
게다가 그 이후로 폭주한 적도 없었다. 그를 주기적으로 검사하는 의사나 마법사들도 그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당연히 마력적인 문제도 없다는 거겠지.
그런데 이미 지난 이야기를 굳이 꺼냈다고?
그 이야기까지 시스가 할 줄은 몰랐다. 그건 명백한 그 아이의 ‘하자’였으니까.
리엔이 찻잔을 기울였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래…….”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시스와 결혼했지, 나와 결혼한 것은 아니지 않니.”
멀리 마차 떠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머니?”
카리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리엔이 빙그레 웃었다.
“칼.”
아주 어렸을 때나 불렸던 애칭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어머니와 거리를 두고 나서는 더더욱.
“시스에게 비밀이 생긴 것 같아.”
“비밀이요?”
카리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고개를 끄덕인 리엔은 깍지를 낀 손에 턱을 괴었다.
“시스에게, 비밀이라.”
게다가 그걸 감춰 주는 깜찍한 아가까지.
시스에게 심어 놓은 내 카드가, 내 것이 아니게 되었다는 말이지.
리엔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건 마냥 좋지 않은 소식만은 아니었다. 희소식이기도 했다.
그만큼 시스테인이,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거니까.
직접 이야기해 줄 날을 기다리마.
리엔이 창밖을 돌아보았다.
마차 소리는 이제 거의 들리지 않았다.
* * *
“와.”
리벨은 방금 전까지 먹은 걸 다 토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음식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위에서 시위를 하고 있었다.
저희는 아직 소화될 준비가 안 됐어요! 바깥세상을 더 탐험하고 싶어요!
개뿔, 들어가!
―덜컹!
마차를 타니까 더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천천히, 천천히 가.”
나에겐 지금 안락한 승차감이 필요해! 리벨이 숨을 간신히 골랐다.
리벨이 창문을 탕탕 치자, 나인은 용케 그녀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마부에게 사인했다.
곧 마차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바람이라도 쐬자.
리벨이 간신히 숨을 고르며 창문을 열었다.
“많이 피곤하십니까?”
창문 옆으로 말에 타고 있는 나인의 모습이 보였다. 리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아주 많이.”
역시 사람은 감추는 게 많을수록 인생이 조마조마해지는 법이다.
심장이 꽉 조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시스테인이 말하길 원치 않는 걸 마음대로 말할 순 없었다.
황태후 리엔이 처음 원했던 정보가 이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시스테인이 폭주의 위험도 무릅써 가면서, 어린 시절부터 피나는 노력으로 지켜 온 비밀이었다.
함부로 말할 수 있을 리가.
“후우.”
조금 숨을 가라앉힌 리벨이 창문을 닫았다.
―탁!
그리고 블라인드를 내려 버렸다.
햇살이 들어오지 않는 마차 안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
그래도 언젠간 두 분도 알아야 할 텐데.
리벨은 입맛이 썼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대화가 필요한 집안이었다.
시스테인이 저렇게 마음을 영원히 닫고 살 순 없으니.
리벨은 왜 제 앞에선 시스테인이 그나마 편해 보였는지 이제 완전히 이해했다.
처음에는 마력을 제가 가라앉혀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그녀의 앞에서는 조금쯤 조였던 마음을 풀어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안타까운 사람.”
리벨이 뇌까렸다. 짧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시스테인이 마음을 풀어놓아도 폭주하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그가 외롭지 않게, 마음 편히 가족과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옆에 있으면 괜찮다고는 했지만…….”
리벨은 마른세수를 했다. 그녀 혼자로는 부족했다. 아니, 시스테인을 가라앉히는 게 자신이어서는 안 됐다.
저번처럼 안 먹힐(?)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리벨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비밀을 들었던 밤부터 줄곧 했던 생각이 다시 끓어올랐다.
“하필이면.”
하필 왜 난 그날 바에 갔을까?
왜 하필 롤란드 그놈은, 그날 그딴 일을 터뜨려서 나를 바에 가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왜 하필이면, 카리스 폐하는 그에게 그딴 말을 해서 그날 바에서 나와 시스테인이 마주치게 했을까?
아니.
“……왜 취해서 내가 그딴 짓을.”
리벨이 얼굴을 싸맸다.
하면서 롤란드 그 쓰레기 이름 부른 거야 저만 쓰레기 되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그날 이후 이어진 리벨과 시스테인 두 사람의 관계였다.
그의 어릴 적 이야기에는 분명 상처가 묻어나 있었다.
아직 피가 흐르는 선명한 상처가.
그는 감정을 걸어 잠근 탓에 딱딱해 보였지만,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어린 그는 뒷이야기를 하며 마음대로 저를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일방적으로 듣기만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사실이 아닌 소문이 퍼져도,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디란타에 괴물들과 함께 갇혀서.
……리엔 황태후가 부를 때까지.
“난…….”
그리고 리벨은 그 험담을 한 사람들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작은 소문은 크게 부풀려져 어린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소문이란 것이 어떻게 퍼지고 사람을 좀먹는지는 리벨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소문을 던진 건 리벨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리벨의 기사가 뜨고 나서 디란타 가에서 반응이 없자, 눈치를 보던 기자들은 기사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김에 신문 한 부라도 더 팔려고 온갖 거짓 소문을 지어낸 건 물론이었다.
당시 시스테인은 그 말에도 반응이 없었다.
아니, 반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화가 나도 필사적으로 참았어야 했을 것이다.
수도 인근에서 폭주하면 모든 것이 끝이니까.
“…….”
그렇게 그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처럼. 그 상처 많은 시절의 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