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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85)화 (85/167)

제85화

그런 그에게 나는 일방적인 가해를 한 거다. 리벨이 뇌까렸다.

그게 내 뜻이든 아니든, 그에게는 명백한 가해였다.

리벨이 일자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기사를 쓰지 않았든가, 만나지 않았든가 둘 중 하나는 해야 했다.

하지만 이미 만나 버렸으니.

평생 기사를 썼다는 사실을 숨기고 살 수 있을까?

리벨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물론 숨기려고 했다. 하지만 언젠가 들켜 버린다면?

이건 리벨 제 목이 달아나는 걸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리벨은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이전에는 제가 ‘그 기사를 쓴 벨’임이 들킨다면 시스테인이 제게 분노를 쏟아 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는 분노보다도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

자신을 어릴 때에 이어 온갖 뒷소문의 주인공으로 만든 벨 기자, 그게 나였다는 것에.

지금까지 그런 자신을 숨겨 왔다는 것에.

“내 앞에서만은 편하다고 했는데…….”

리벨이 거듭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유일한 안식처가, 그에게는 사라지는 것이다.

평생.

평생 안 들킬 자신이 있어, 리벨?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녀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지금까지 줄줄 샌 것만 해도 들키기 직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툭.

마차 바닥에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울 사람이 내가 아닌데 왜 울어?

리벨은 눈물을 닦으면서 생각했다.

차라리 그의 마력을 가라앉혀 주는 능력이 내게 없었어야 했다. 다른 사람에게 있었어야 했다.

그럼 우린 그냥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아.”

다른 사람도 있을까? 리벨이 문득 얼굴에서 손을 뗐다.

지금이라도 그의 마력을 가라앉혀 줄 다른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찾을 수 있다면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게 내게 배신감을 느끼기 전에 먼저, 그가 나에 대해 더 알기 전에, 그가 차라리 나를 싫어했으면 좋겠다.

리벨이 눈을 감았다.

나라는 사람이 지긋지긋해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내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고, 마음을 서서히 열 수 있었으면 좋겠다.

“…….”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리벨은 이 일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필요 가치’가 없어진 자신이 리엔에게 어떻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리벨은 멈출 수가 없었다.

그에게 미움받는 방법을 생각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  *  *

리벨의 마차가 디란타 별저로 돌아가는 길은 길었다.

리벨은 충분히 속을 진정시킨 후에야, 다시 마차 문을 두드렸다.

다시 속력을 높이라는 뜻이었다. 눈치 빠른 나인이 마부에게 신호를 주자 마차의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히히힝!

마차의 흔들림이 조금 더 심해졌지만 리벨은 이제 견딜 만했다.

그래, 방법을 찾아보는 거야.

생각을 굳혔으니까.

―덜컹!

그렇게 속력을 높이고 얼마나 되었을까, 마차 창문을 열고 있던 리벨은 문득 저 앞에, 흙먼지가 이는 것을 보았다.

“?”

고개를 살짝 빼고 보니 앞에는 웬 마차 하나가 달리고 있었다.

“저 마차는 뭐야?”

리벨의 질문에 나인이 곧바로 답했다.

“한참 전부터 이동 경로가 겹치고 있습니다.”

“이쪽으로 가면 우리 저택밖에 없는데?”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나인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그 너머의 다른 영지로 향할 가능성도 있긴 합니다만,”

그는 탐탁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그건 리벨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보이는 마차 뒤에 아무런 짐이 딸려 있지 않은 것을 보면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다른 짐마차도 없는데, 아무것도 안 챙기고 먼 영지로 떠나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저 마차, 우리 저택으로 향하는 것 같지?”

“예.”

손님인가? 리벨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녀는 손님을 초대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시스테인이 초대했을 리도 만무했다. 그는 지금 사람을 만나면 곤란한 상황이니까.

그렇다면 초대도 없이 남의 저택에 마음대로 가고 있다는 소리인데…….

리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예의 없네.”

간혹 급한 일이 있으면 허락 없는 손님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디란타 대공가에는 대외적으로 급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

“저게,”

어느 가문 문장이지? 리벨은 눈살을 찌푸리고 자세히 살폈다. 하지만 이 거리에서 보일 리가 없었다.

결국 리벨이 물었다.

“어느 가문 마차인지 혹시 보여?”

마차에 문양이라도 새겨져 있을 것이다. 가라, 인간 망원경!

리벨의 머릿속 성원에 힘입어, 나인은 눈살도 찌푸리지 않고 답했다.

“예. 쥬리 백작가의 문양입니다.”

뭐뭐뭐라고?

리벨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저기에 과연 쥬리 백작 부부가 앉아 있을까요, 쥬리 백작 영애가 앉아 있을까요?

난 왜 후자 같지? 왜 백작 영애가 찾아오는 것 같지?

기겁한 리벨이 마차를 삿대질했다.

“저거!”

“예?”

리벨이 다급하게 말했다.

“저거 따라잡아!”

“예?”

나인은 답지 않게 두 번 되물었다.

그래, 너도 당황스럽겠지!

무슨 영화에서 범인 추격하는 신도 아니고, 마차 타고 남의 마차 따라잡으라는 게 당황스럽겠지.

하지만 리벨은 급했다. 이쪽도 이유가 있다고!

시스테인하고 쥬리 백작 영애가 만나면 안 돼!

리벨이 다급하게 외쳤다.

“당장 따라잡아! 멈춰 세워, 저거!”

원작에서의 쥬리 백작 영애를 생각하며, 리벨이 거듭 외쳤다.

하필 이곳은, 디란타 별저까지는 얼마 남지도 않은 지점이었다.

*  *  *

때아닌 추격전이 벌어졌다.

쥬리 백작가의 마부는 당황했다. 당연히 말도 당황했는지 마차의 흔들림이 커졌다.

그러는 사이 속력을 높이던 디란타 대공가의 마차에서, 말을 탄 기사 여럿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두 마차가 가로지르고 있는 길옆으로, 말 몇 마리가 빠르게 지나갔다.

―히히힝!

그리고 그 말들은 쥬리 백작가의 마차가 갈 길을 가로막아 버렸다.

“!!”

길이 막히자 쥬리 백작가의 마차가 급히 멈춰서는 게 보였다.

리벨은 그 모습을 보면서 입을 멍하니 벌렸다.

아니, 너무 본격적으로 멈춰 세웠는데?

하지만 따라잡으라고 한 건 리벨 자신이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쥬리 백작가의 기사들이 당황한 얼굴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일단 세우긴 세웠다. 근데 세워서 뭐 어쩌려고 내가 이랬지?

“…….”

리벨이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원작에서의 그 전개만큼은 막아야 했다.

원작대로라면 시스테인은 쥬리 백작 영애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상처받고, 더욱 마음을 걸어 잠그게 된다.

아니, 아무리 내가 나 말고 다른 사람 만나서 행복했으면 하긴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보란 듯이 오답이 튀어나오면 곤란하지!

“워워.”

―히히힝!

이내 리벨이 탄 마차도 서서히 멈춰 섰다. 두 마차는 이제 나란히 같은 선상에 서 있었다.

리벨은 일단 창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린 상태였다.

뭐라고 하지, 근데?

저쪽은 대외적으로는 어쨌든 그냥 가문의 손님이었다.

아니지, 엄연히 따지면 아직 손님은 아니지.

난 초대도 한 적 없고 시스가 사람을 초대했을 리도 없지.

리벨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렇다면 저쪽은 뭐 거래 같은 걸 핑계로 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좋아! 안 사요 전법으로 간다!

결심하는 순간이었다.

―달칵.

쥬리 백작가의 마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으아악 나온다!

리벨이 침을 꼴깍 삼켰다. 창문 블라인드를 살짝 젖혀서 보니, 아니나 다를까 마차에서 나와 걷고 있는 건 쥬리 백작 영애였다.

그녀는 좀 당황했으면서도,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있는 얼굴이었다.

뭘 기대하는 거야, 지금?

“……혹시, 디란타 대공 전하이신가요?”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리벨은 어이가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거 기대한 거였어?

아니 그런데 길 가다가 남의 남편 만난다고 저렇게 좋아할 일인가?

시스테인은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공평하게 딱딱하게 대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반가워한다고?

저건 십중팔구 원작에서처럼 그의 마음을 사려고 온 것이 분명했다.

일단 입은 옷부터 뭔가 거래가 있거나 급한 일이 있어서 온 게 아니었다.

“얼씨구, 혼자 사교회 열렸네.”

이 시대에도 ‘꾸민 듯 안 꾸미는’ 게 있다면 그녀 같은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엔 다 보인다. 일단 드레스나 액세서리부터 신경 써서 고른 게 눈에 보였다.

“저걸 콱!”

넌 신문 안 봐? 사교계 안 나가니?

나랑 시스가 결혼했다는 소식이 대문짝만하게 박힌 지가 언젠데, 그때 머리 깎고 절에라도 갔었니?

너무 대놓고 목적이 또렷한 옷을 입고 온 거 아니냐?

내 눈은 뭐, 옹이구멍이야? 어?

“어이가 없네?”

―탕!

순간 열이 확 받은 리벨이 마차 문을 걷어차 열어젖혔다.

“!”

문을 열려고 했는지, 나인이 급히 물러나는 게 보였다.

“앗, 쏴리.”

“?”

쏴리고 sorry고 뭔 소리인지 알 리가 없는 나인이 멈칫하는 가운데, 리벨의 구두가 바닥을 디뎠다.

몇 걸음 내디디니 마차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쥬리 백작 영애의 얼굴이 보였다.

오.

리벨은 순식간에 환희에서 분노와 짜증으로 치달았다가, 다시 사교적 미소로 회복되는 영애의 현란한 표정 변화를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왜? 잘못 걸렸다 싶니?

감이 좋은 애구나? 응? 리벨이 화사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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