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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86)화 (86/167)

제86화

“대공비 전하……?”

쥬리 백작 영애의 표정 변화는 변화무쌍했다. 짜증 난 표정 분명히 봤다. 밑장 빼지 마라, 응?

리벨이 해사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아쉽게도, 시스가 아니라 나예요.”

그 참 안된 소식일세. 리벨의 미소가 더 환해졌다.

그녀는 쥬리 백작 영애의 반응을 보고 확신했다.

얘, 분명히 내가 황성 들어갔다는 소식 듣고 온 거다.

평소보다 티타임이 빨리 끝났으니 99.9% 확실했다.

이건 기자의 감, 여자의 감이다!

“실망했나요?”

리벨의 말에 쥬리 백작 영애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럴 리가요. 대공비 전하를 이렇게 뵐 줄은 생각지도 못해서…….”

그럼 시스를 이렇게 볼 거는 열심히 상상하고 있었고?

쥬리 백작 영애에게는 슬픈 소식이지만 시스테인은 격식을 갖춰야 할 때를 제하고는 마차를 잘 타지 않았다.

한마디로, 제도기사단 본부에서 퇴근할 때는 그냥 기사들이랑 말 타고 퇴근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길에서 만나는 디란타 가 마차는 십중팔구 나라는 말씀.

리벨이 빙그레 웃었다.

“저도 이렇게 쥬리 백작 영애를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이왕이면 우리 집 얼씬도 하지 말지?

리벨이 말을 받자, 쥬리 백작 영애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대공저에 무슨 일이 생겼나요?”

일이라면 여러 가지로 있지만 일단 가장 큰 문제는 리벨의 눈앞에 있었다.

있지. 너, 바로 너!

리벨은 생각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별다른 일은 없답니다.”

“그런데 왜……?”

쥬리 백작 영애가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디란타 가의 기사, 정확히는 그림자들을 보는 그녀의 시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야, 여우주연상감이다! 연기 끝내준다! 확 태워서 연기로 불살라 버리고 싶네!

“이렇게…… 놀라서 마차를 세웠던 적은 처음이에요.”

쥬리 백작 영애가 어깨를 움츠렸다. 무섭다는 듯이.

그래, 나도 이렇게 본격적으로 멈춰 세울 줄은 몰랐단다. 리벨이 웃는 낯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쪽도 할 말은 이미 준비해 온 참이었다.

“대공저에는 부르지 않은 손님이 오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이라서요. 게다가,”

리벨이 말을 자연스럽게 받았다.

확실히 디란타가 쥬리 백작가의 마차를 과잉 진압(?)한 건 맞지만, 이건 또 할 말이 있었다.

“대공령에 대해 아신다면 이해하시겠지만, 저희 가문의 기사들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강하게 경계하도록 교육하고 있답니다.”

리벨의 말에 쥬리 백작 영애가 멈칫했다.

대공령. 몬스터들이 가득한 기이한 땅. 그 땅의 기사들이 경계심이 많은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몬스터가 많은 땅이란 건 알고 있지만, 몬스터가 마차를 타고 오진 않을 것 같은데요…….”

얼씨구, 이게 따져? 일반론을 펼쳐 보시겠다?

하지만 디란타는 아쉽게도 일반적인 말이 통하지 않는 동네였다.

직접 가 본 적이 없어도 원작을 보았으니, 리벨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마차는 몰라도 몬스터들이 온갖 상상도 못 한 형태로 쳐들어오곤 하죠.”

올걸? 아마 그럴걸? 안 가 봤지만 가 본 척하기!

리벨이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이해해 주시길 바라요. 쥬리 백작 영애.”

그러고는 아주 살짝 고개를 까딱여 주는 걸 잊지 않았다. 숙인 듯 안 숙인 듯! 사과하는 것 같진 않지만 예의는 차리는 척!

정말 예의 차리고 싶지 않은 상대였지만 사교계의 매너는 지켜 줘야 했다.

매너는 이쯤 했으면 됐고. 리벨은 서서히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었다.

가장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쥬리 백작 영애는,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오신 거죠? 연락은 못 받았는데.”

초대도 안 했는데 쳐들어오는 거 실례인 거 모르니?

마차를 막은 것도 문제지만 초대도 안 했는데 쳐들어오는 것도 만만찮은 실례였다.

“……아.”

그 말에 쥬리 백작 영애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저희는 디란타 대공저로 가는 것이 아니었답니다.”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지. 리벨은 짐마차 하나 없이 깔끔한 쥬리 백작가의 마차를 보면서 생각했다.

“그렇다면요?”

그래서 짱돌 굴려서 무슨 핑계를 생각해 냈는지 어디 한번 들어 볼까?

리벨의 질문에 쥬리 백작 영애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저 너머의 슈아 영지로 가고 있었어요. 자작님을 만나러요.”

오……. 변명엔 50점 드리겠습니다.

리벨은 속으로 혀를 찼다.

디란타 대공비로서 일하면서, 그리고 기자 벨로 일하면서 슈아 영지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거긴 여기서 꽤 북부로 올라가야 했다.

“슈아 자작가 저택까지 가려면 쉬지 않고 달려도 내일 정오에나 도착할 텐데, 이렇게 짐마차도 없이 단출하게요?”

리벨이 마차 뒤쪽을 가리키자, 쥬리 백작 영애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급한, 일이 있어서요.”

음, 그 변명도 할 줄 알았어요, 친구.

리벨이 해사하게 웃었다.

“슈리 자작은 사교 시즌에 수도 별저에 머무르는 걸로 알고 있답니다.”

기자로도 뛰는 덕에 이걸 해냅니다. 리벨은 사교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본의 아니게 사교계 소식에 밝을 수밖에 없었다.

“네?”

쥬리 백작 영애는 그쯤 되자 멈칫했다. 표정 관리 나름 한다고 하는 것 같은데 다 보인다.

내가 호구냐?

리벨의 웃음이 더욱 환해졌다. 그러자 쥬리 백작 영애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아, 세상에.”

그녀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름 열심히 연기하고 있지만 쏘울이 안 담겼어요, 영애.

리벨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런 실수를……, 돌아가자.”

쥬리 백작 영애가 제 가문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예?”

“그…….”

쥬리 백작 영애와는 달리 연기에 익숙하지 않은 백작가의 기사들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정말 돌아가자는 말인지 의아해하는 듯했다.

역시 오늘 대공저에 들를 생각이었던 거지! 리벨이 주먹을 꽈악 쥐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대공비 전하.”

쥬리 백작 영애는 파르르 떨리려는 목소리를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손에 힘을 푼 리벨이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요. 저희 가문의 저택에 연락도 없이 들르려 하신 게 아니라면.”

그거만 아니라면 난 신경 안 써.

리벨은 손을 펴 보였다.

“만일 신혼부부의 저택에 들를 때는 좀 더, 교양 있는 대처를 해 주시길 바랄게요. 쥬리 백작 영애.”

그녀의 말은 사실상 ‘네가 디란타 저택에 가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눈감아 주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 말에 얼굴이 빨개진 쥬리 백작 영애가 부리나케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게 어디서 밑장을 빼려고.

리벨이 어깨를 으쓱했다.

*  *  *

쥬리 백작 영애와 리벨의 마차가 길에서 만난 이후.

그 후로도 쥬리 백작 영애가 디란타 별저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여러 번 발견되었다.

혹시나 해서 그림자를 붙여 두었던 리벨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상대가 유부남인 거 알고 들이대는 거지?

아무리 쥬리 백작 영애가 권력욕이 강하고, 시스테인이 황위 계승 서열 1위인 데다, 원작에 따르면 쥬리 백작 영애가 소속된 나름의 큰 세력이 있다고는 해도.

그래도 유부남한테 이런 식으로 들이대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

반역 같이 하자면서 접근할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원작에서와는 달리 시스테인은 지금 엄연히 리벨과 결혼한 기혼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접근한다고? 리벨은 황당하다 못해 열이 올랐다.

그녀는 쥬리 백작 영애의 같잖은 시도가 네 번쯤 더 발견된 후로부터, 아예 디란타 저택에 눌러앉아 버렸다.

오더라도 시스테인 앞에서 반역의 ‘ㅂ’ 자도 못 꺼내게 해 주지!

그렇게 저택에 눌러앉은 지 며칠, 시스테인이 그녀를 의아하게 보기 시작했다.

“요즘 취미는 쉬고 계십니까.”

“그건 아니고……, 다른 일이 있어서요.”

식사 시간, 그의 질문에 리벨은 간단히 답했다.

그러면서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정확히는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는 틀림없이, 엷은 웃음을 짓고 있을 테니까.

리벨 그녀하고만 있을 때 짓는 그 미소를.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습니다.”

시스테인의 말에 리벨이 멈칫했다. 결국 올려다본 시스테인의 얼굴은 역시 조금 부드러워 보였다.

평소의 딱딱한 표정이 아니다.

그날 밤 이후로, 그는 더욱 이랬다. 감정을 드러내는 데에 어색하고, 표정을 짓는 자신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듯 가끔 입가를 매만지곤 했지만.

점점 그는 익숙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게 나여서는 안 된다. 리벨은 숨을 한번 조용히 크게 들이마시고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리벨이 디란타 별저에서 쥬리 백작 영애가 못 오도록 가드(?)를 치는 동안, 가만히 저택에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을 수소문해 찾고 있었다.

그녀 자신을 대체할 만한, 마력을 가라앉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찾는 데에 꽤 걸리겠지?’

‘예. 아무래도 눈에 띄는 능력이 아닌 데다, 사람들이 좀처럼 찾지 않는 능력이라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몇 달 정도?’

나인은 리벨의 질문에 가볍게 답했었다.

‘2주 정도입니다.’

아니, 무슨 인터넷도 없는 나라가 정보가 이렇게 빨라?

물론 그만큼 그림자, 즉 황태후 리엔의 정보망이 전국 곳곳까지 촘촘하게 퍼져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음…… 만일 계획대로 시스한테 차여서 황태후 폐하를 피해 도망친다고 하면.

외국으로 튀기도 전에 잡히겠군.

리벨은 잿빛으로 가득 찬 미래를 생각하며 은은하게 웃었다.

“…….”

안 무섭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시스테인의 마력을 진정시킬 사람을 제대로 찾는다면?

시스테인이 폭주하려고 할 때마다 가라앉혀 줄 수 있는 사람을 그의 옆에 붙여 준다면, 그럼 점점 이 사람도 마음을 풀 수 있지 않을까?

이미 열리기 시작한 마음의 문을 더 활짝 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황태후 폐하께서 날 설마 죽……이시……진 않을……걸……?

“리벨?”

“아.”

저도 모르게 식사를 멈추었던 리벨이 다시 나이프를 들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날 즈음.

리벨이 쥬리 백작 영애가 사방팔방으로 들이대는 걸 차단하던 나날.

마침내 쥬리 백작 영애는 디란타 별저 공략을 포기했다.

그리고 대담하게도 시스테인의 근무지인 제도기사단 본부로 찾아갔다.

“제도기사단 본부로?”

보고를 들은 리벨은 혀를 찼다.

어떻게 인간이 예상을 하나도 안 벗어나냐?

그녀가 그림자, 엘브에게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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