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시스테인은 그날 이후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목록 속의 사람들이 무슨 목적으로 그런 수상한 공간에 모였는지, 그 공간은 정확히 어디인지 조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감찰기사단이 건드리기에도 거물들이 많아, 접근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며칠 후 밤, 시스테인은 결국 리벨에게 말했다.
“한동안 야근이 잦을 것 같습니다.”
그야 당연히 그럴 것 같았다.
짐작하지 못했을 리 없는 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죠.”
일거리를 안겨 준 것 같아서. 리벨은 조금 미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시스테인은 그녀의 말을 받았다.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벨.”
시스테인의 입가가 아주 옅은 미소를 그려냈다.
침대가의 옅은 조명에 빛나는 그의 얼굴은 조각같이 반짝였다.
“…….”
리벨이 순간 말을 잊을 정도로.
늘 무표정하게, 담담하게 가라앉아 있기만 하던 얼굴에 생기가 깃들 때마다 리벨은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저 미소가 금방 어색하다는 듯 들어가 버리고 만다는 걸 알기에.
“리벨?”
그녀가 멍하니 저를 보자, 시스테인이 그녀를 불러왔다.
“네, 네?”
리벨은 화들짝 놀라 답했다. 그러면서 어이가 없어 생각했다.
아니, 사람이 이렇게 숨 쉬듯이 유혹하는 게 어딨지?
이 사람이 안 웃은 건 사실 웃으면 오만 사람을 다 홀리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흠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리벨은 애써 그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침대 위에서 한 바퀴 굴러 그에게서 슬쩍 떨어지기까지 했다.
“…….”
이쯤 되면 시스가 침대 조명을 끌 때가 됐는데?
하지만 시스테인은 미동도 없었다.
……너무 대놓고 피했나? 하지만 지금 와서 그를 돌아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밤에 그를 거절한 건 어제가 처음이었다.
‘……시스도 피곤할 것 같아서요.’
반역 정황이 포착되었으니 그와 거리 두기는 잠시 미뤄 두겠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이 이상 가까워져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툭.
“잘 자요, 리벨.”
결국 조명이 꺼지면서, 그의 굿나잇 인사가 들려왔다.
리벨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도 그를 억지로 밀어내면서, 아쉬워서 잠들지 못한 건 자신이었던 것이다.
오늘도 아마 그럴 터였다.
―포옥.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시스테인이 그녀를 등 뒤에서 조심스럽게 안아 왔다.
그것까지 차마 뿌리칠 순 없어, 리벨은 그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
정확히는 차마 뿌리칠 수 없는 게 아니라, 뿌리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에게 조용히 안겨 있고 싶었다. 지금도, 내일도, 언제든지.
리벨이 눈을 감았다.
온기 때문일까, 리벨은 어제와는 달리 빠르게 잠들었다.
* * *
그리고 다음 날.
“……벌써 출근하셨다고?”
리벨은 시스테인이 출근하고도 세 시간 후에나 눈을 떴다.
자도 너무 푹 잔 거 아니냐? 어떻게 사람이 일어나도 모르지?
리벨은 제 볼을 탁탁 쳤다. 하녀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정신 차리자, 리벨.”
그에게서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온기에 밑도 끝도 없이 풀리는 건, 오히려 저 자신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무엇보다 쥬리 백작 영애는 원작과는 약간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원래는 시스테인이 미혼이었고, 쥬리 백작 영애의 접근을 막을 사람이 없었으니 당연히 시스테인을 먼저 유혹했다.
하지만 지금은 리벨이 시스테인에 대한 접근을 막은 탓인지, 필레 공작과 미리 안면을 터 두었으면서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원작에서 필레 공작과 만나자마자 얼마 있지 않아 연인 관계로 발전했던 것과는 다른 전개였다.
“…….”
시스테인과 필레 공작, 어느 쪽이 더 황위를 가질 승산이 있는지 재어 보고 있는 건가?
확실히 현 황제 카리스의 동생인 시스테인이 필레 공작, 현 황제의 사촌보다는 계승 서열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의 생각인데…….
당연히 시스테인은 황좌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그 사실을 쥬리 백작 영애가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의 없는 권력욕에 불을 붙여 보려고 접근하려는 거고.
다 부질없다, 친구야.
리벨은 쥬리 백작 영애를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쥬리 백작 영애의 시도는, 리벨의 생각보다 더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 * *
그날 저녁.
야근이 잦을 것 같다는 제 말대로 시스테인은 늦게 귀가했다.
그리고 리벨은 돌아온 그와 간단한 식사를 들었다.
그런 그녀에게, 시스테인이 문득 입을 열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십니다, 리벨.”
식당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네?”
반쯤 생각에 잠겨 있던 리벨은 포크를 놓칠 뻔했다.
“아, 좀 생각할 게 있어서요.”
사실 생각할 거야 많았지만 지금은 쓸모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그와 함께 식사하는 시간도 그와 가까워지면서 늘어난 것이었다.
이것도 언젠가는 줄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끊어야 할 것이다.
그를 위해서.
하지만 리벨은 그 결심을 단단하게 먹기가 쉽지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그때 시스테인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어어어엄마야!”
리벨은 화들짝 놀랐다.
―탁!
허공으로 튀어 오른 포크를 잡은 시스테인이 다시 그녀의 손에 포크를 쥐여 주었다.
그러면서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셔서, 제가 오는 줄도 모르십니까?”
“그게.”
리벨이 포크를 슬쩍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올려다본 시스테인의 입가에는 아주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말을 뭐라 이으려던 리벨은 입을 닫아 버렸다.
시스테인은 근래, 조금씩 더 감정 표현에 적극적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감정을 억누르던 그가 변해 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웃어 보이거나, 뒤늦게 어색한 표정을 짓는 등.
지금도 그랬다. 의아함과 호기심을 띤 시선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
그리고 이런 그를 볼 때마다 리벨은 조바심이 들었다.
그가 마음을 여는 건 좋았다.
하지만 그 대상이 자신이어서는 안 됐다.
나중에 리벨 자신의 정체를 알고 더한 배신감에 시달릴 그를 위해서라도.
“…….”
리벨은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그에게 내가 더 상처를 주기 전에, 그가 나를 싫어하게 됐으면 좋겠다.
“……아,”
리벨은 저도 모르게 울먹이는 숨이 터졌다. 코끝이 시큰해졌다.
“리벨?”
시스테인이 눈을 크게 뜨는 게 보였다. 리벨은 재빨리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나를, 싫어하게 됐으면 좋겠다.
그녀가 지금 가장 원하면서도 원치 않는 뜻을 담은 그 문장은 그녀를 금방이라도 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별건 아니에요.”
리벨은 재빨리 손을 내저으면서 생각했다.
사람에게 정떨어지게 하는 방법이 뭐가 있지?
안전이별엔 돈 빌려 달라고 하는 게 최고라던데, 그건 너무 현대적인 발상이었다.
아니, 무엇보다 이 사람은…… 빌려줄 돈은 충분히 많을 사람이었다.
심지어 빌려주고 안 돌려줘도 된다고 할 것 같아서 더 무서웠다.
한마디로 씨알도 먹히지 않을 방법이란 소리다.
그렇다면…… 돈 빌리기 이세계 로컬라이징 버전으로 간다!
“시스.”
“예.”
가까운 곳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리벨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가 싫어하는 것은 시끄러운 것과 사람 많은 것, 그리고 쓸데없는 허례허식이었다.
그 외에도 많겠지만 대표적인 건 저 세 가지였다.
그리고 이 세계에는 그 세 가지가 모두 갖춰진 완벽한 것이 존재했다.
“연회가 열고 싶어요.”
그건 바로 연회였다!
“……예?”
아니나 다를까, 시스테인은 그 말에 멈칫했다.
물론 연회 한 번으로 시스테인이 제게 질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 의외의 면을 보고, 거기서 미운털이 박히기 시작하면 마음이 홱 돌아서는 것도 순식간이다.
이번 연회는 그 틈을 열어 줄, 작은 기회에 불과했다.
리벨은 그가 멈칫한 걸 못 본 것처럼 손을 펴 보였다.
“이 저택에서, 아주 성대하게요. 한…….”
몇 명이면 기겁할까? 황성 연회가 800명 정도이니 그렇게 많아서는 곤란했다.
리벨은 슬그머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700명쯤?”
“…….”
시스테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상 일개 귀족가에서 열기에는 엄청난 규모의 대연회였다.
물론 대공가에서 소화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사교계에 파란이 될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드는 돈도 천문학적일 터였다. 아마, 대공가의 재정에서도 무시할 수 없을걸?
시스테인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누가 봐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기색이었다.
“어때요?”
리벨이 은근히 물었다.
미운털이 박히기 위해 그가 싫어하는 연회를 연다.
언뜻 보기에는 엉성하기 그지없는 이 계획에, 리벨이 의외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건 대공가의 연회가 원작에 나온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원작에서 쥬리 백작 영애와 시스테인이 연애하고 있을 때.
조금씩 마음을 열어 가던 시스테인이 쥬리 백작 영애에게 마음을 딱 닫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성대한 연회였다.
‘저를 그간 무시했던 자들에게 시스테인, 당신의 힘을 보여 주세요.’
‘이 디란타 대공가가 얼마나 위대하고, 내가 곧 될 디란타 대공비라는 자리가 얼마나 높은 자리인지 그들에게 직접 보여 줄 거예요.’
쥬리 백작 영애가 개최한 연회는, 그녀에게 딱 두 가지 의미였다.
자신이 곧 대공비가 되어 사교계의 정점에 서게 된다는 걸 알리는 자리.
그리고 그런 제게 알랑거리는 귀족들을 보며 마음껏 비웃고 군림하는 것.
그리고 시스테인은 그 모습에서 쥬리 백작 영애에게 매우 실망했다.
‘난 야망 없는 남자는 싫어요!’
그리고 그 전설의 대사가 나온 것도 연회가 끝난 후였다.
쥬리 백작 영애는 연회 때 사람들을 사귀기는커녕 극도로 접촉을 꺼리는 시스테인을 보면서, 그가 정말로 권력에 관심이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를 뻥 차 버린다.
아오, 그걸 콱!
순간 원작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차오르지 않던 분노가 리벨을 뒤덮었다.
“……알겠습니다.”
그때 시스테인이 입을 열었다.
원작에서도 그는, 연회를 열자는 쥬리 백작 영애에게 이렇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연회장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그녀와 파국을 맞았다.
그러니 내가 이번 연회에서 할 일은, 쥬리 백작 영애처럼 연회를 아주 신나게 즐기는…… 것이다!
그가 내게 질릴 수 있도록.
원작에서의 시스테인이, 마음을 열어가던 쥬리 백작 영애에게서 한 번에 마음을 돌려 버렸던 것처럼, 내게도 그럴 수 있도록.
리벨이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작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