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90)화 (90/167)

제90화

아니, 시작되는 줄 알았다.

며칠 후 리벨은 제가 시스테인의 얼굴에 홀려, 순간 멍청한 선택을 했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난 뇌가 없었나?

700명 규모의 연회가 불러올 여파를 정말 몰랐단 말인가?

그렇게 후회해 봐야 가까이에서 속삭이던 그의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리벨?’

그렇게 의아한 듯 제 이름을 부르던 그의 얼굴.

잊기엔 너무 잘생긴 얼굴이었아아아니야!!!

리벨이 머리를 싸맸다.

700명 규모의 대대적인 연회인 만큼 대공가의 사용인들은 연회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일정에 맞춰 착착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언제쯤이 좋겠습니까?’

시스테인의 그 질문에, 리벨이 홀린 듯 답했던 말 때문에 속도는 더욱 빨랐다.

‘최대한 빨리요.’

그야 더 정 붙기 전에 연회를 여는 게 좋으니까!

하지만 리벨은 그때의 자신을 매우 치고 싶었다.

앞으로 크라이베리 신문에 꼭 한번 칼럼을 기고하고 말 것이다.

[충동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 내일 아침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라는 제목으로. 아니면.

[인생을 뒤흔드는 거짓말 – 잠깐의 몰상식함이 불러오는 파란]

같은 제목으로……. 리벨은 인생을 돌아보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어서 오세요, 실리아 백작 부인.”

물론 손님을 맞이하느라 아련해질 틈은 별로 없었다.

그녀가 앞으로 맞이할 손님은 몇백 명이 넘었다.

[디란타 대공가, 이번 사교 시즌의 절정을 장식하다]

[지금껏 사교 활동을 피해 왔던 디란타 대공의 파격적인 변신!?]

온갖 신문 기사가 쏟아지면서 귀족들은 물론이고 기자들까지 대공가 근처로 몰려들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오지 마…… 그만 와…… S……T……A……Y…….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리벨이 이번 연회에 대해서 간과한 건 일단 네 가지였다.

하나. 700명 규모의 연회가 아무리 크다고 한들, 디란타 대공령에서 나오는 몬스터의 부속물과 마력석만 처리해도 가볍게 열 수 있는 규모다.

다시 말해 디란타 대공가의 재산엔 흠집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

“디란타 대공 전하, 제 살아생전 대공가의 연회를 볼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담담하게 손님을 맞이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스테인.

그는 생각보다…… 연회에 데미지가 없어 보였다.

아니 전혀 없어 보였다!

“세상에, 디란타 대공비 전하! 이렇게 가까이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차기 사교계의 꽃이라고 하시지 않나요?”

“이미 사교계의 절정이시죠!”

리벨 앞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쏟아내는 귀족들. 리벨이 원작 속의 쥬리 백작 영애처럼, 그들 앞에서 입이 째져라 웃어도 마찬가지였다. 시스테인은 정말 미동도 없었다.

아니 왜!?

“모쪼록, 앞으로도 잘 지내 봐요.”

슬쩍 고개 쳐들기! 앞으로도 잘 기라고 눈치 주기!

원작 속의 쥬리 백작 영애와 다름없는 짓이었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그런데 티안 자작가에서는…… 따로 준비하신 게 없나요?”

선물 없으면 사람 꼽 주기!

“헉.”

티안 자작 부인은 리벨의 말에 딸꾹질이 들려 버렸다. 원작에서 쥬리 백작 영애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같았다.

미안해요, 티안 자작 부인!

나중에 뭐라도 챙겨 줄게!

리벨은 미안함을 감추고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원작에서 쥬리 백작 영애가 그랬던 것처럼.

“디란타 대공가, 나아가 리엔 황태후 폐하께서는 예의범절을 중요시하시는데…….”

쥬리 백작 영애는 간이 크게도 리엔 황태후의 이름까지 팔았다.

리엔은 시스테인의 어머니였고, 그녀는 시스테인에게 호의적이니, 리엔 황태후의 권력까지 등에 업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리엔 황태후는 나중에 그게 불쾌했다는 이유로, 쥬리 백작 영애를 따로 처벌했다.

물론 그녀의 반역 혐의가 확실해진 뒤였다.

‘예의범절을 잘 안다는 저 아이에게, 죽기 전까지 고개를 들 수 없도록 등에 바위라도 짊어지게 해 주렴.’

그리고 그녀는 처형당할 때까지 그 바위를 낑낑거리면서 들고 서 있어야 했다.

“…….”

입 밖으로 뱉고 보니 리벨은 새삼 소름이 돋았다.

황태후 폐하, 전 안 그러실 거죠? 비호……해…… 주시는…… 거죠……?

애초에 이상한 짓이라도 하라고 한 건 리엔 황태후 폐하였다!

리벨은 애써 속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두 번 황태후 폐하의 이름을 빌렸다간 속이 남아나지 않을 듯했다.

“죄, 죄, 죄, 죄송합니다.”

한편 리엔의 이름까지 나오자,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건 다른 손님들의 이야기를 받아 주고 있던 시스테인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시선이 리벨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

리벨은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제 어머니의 이름을 파는 쥬리 백작 영애를 서늘한 시선으로 돌아보았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따끔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리벨은 기어코 마지막 대사를 뱉어 냈다.

“나중에 따로 뵙죠, 티안 자작 부인.”

파리 쫓듯 손짓하기! 자작 부인, 진짜 미안해요! 리벨은 울 듯한 자작 부인의 얼굴을 보고 같이 울고 싶었다.

나중에 사람이라도 보내서 따로 사과해야 할 것 같았다. 시스테인 몰래.

“아, 알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연회에 처음이라 경황이 없어서…….”

“네네, 다음.”

리벨은 티안 자작 부인에게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싸가지없이 살기도 힘들었다. 목 뒤에는 벌써 식은땀이 흘렀다.

“대공비 전하, 저희 가문에서 준비한 최상급 옥석입니다! 이 옥석으로 말하자면…….”

그 뒤로 들어오는 손님들은 죄다 리벨에게 제 선물을 자랑하기 바빴다.

“오, 과연 유서 깊은 가문답군요.”

리벨은 옥석을 자랑한 자가 린디아 백작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가문은 딱히 힘을 크게 쓰는 가문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름이 뭐라고 했죠?”

귀족가에서 상대가 제 이름을 구태여 소개하게 만드는 건 엄청난 결례다.

한마디로 난 너를 듣도 보도 못했다는 뜻이나 다름없는 말이었으니까.

“리샤 린디아……라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린디아 백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까 분명 선물을 내밀면서 의례적으로 인사를 했는데도, 무안을 주는 대공비의 태도 때문이었다.

순간 미안하다는 얼굴로 린디아 백작을 보던 리벨이 정신을 차렸다.

“아. 린, 린다 백작? 가 보세요. 옥석은 거기 놓고요.”

방금 들은 이름도 틀리기! 끝까지 싸가지 유지하기!

리벨은 무안함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물러나는 린디아 백작을 보면서도 속으로 외쳤다.

나중에! 사과할게요! 진짜 이건 제가 사정이 있어서! 진짜!

싸가지 말아 먹은 듯 행동하는 것도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리벨은 양심 때문에 심장이 조일 지경이었다.

“다, 다음!”

하지만 이 연기도 여기까지다!

왜냐면 시스테인은 원작에서, 이 모습까지 보고 연회장에서 빠져나갔거든.

리벨이 흘끗 시스테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간과한 두 번째 문제가 거기서 드러났다.

“대공 전하, 언제 와도 저택이 참 고풍스럽습니다.”

“디란타령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입니다.”

말을 받는 시스테인의 얼굴에선 불쾌함은 찾을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는 잔까지 나누며 다른 귀족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

???

?????

이쯤 되면 나가야 하는데? 나 진상 짓 몇 번 더 해야 하는 거야?

하지만 리벨이 원작에 없는 창조적인 진상 짓을 해도 시스테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

*  *  *

뭔가 잘못돼도 심각하게 잘못됐다.

리벨은 대공가에서 ‘베푼다’라는 이름으로 참여한 귀족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면서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이런 걸 저따위가 받아도 될지…….”

아까 무안을 준 티안 자작 부인과 린디아 백작에게는 몰래 실수인 척 세 개씩 챙겨 주었다.

하나에 금화 수십 개의 가치가 들어 있는 선물이었지만, 마음 같아서는 트럭으로 갖다 주고 싶었다.

물론 싸가지를 말아 먹는 건 잊지 않았다.

“가, 가져가요! 귀찮으니까! 다음!”

“이, 이거 세 개…….”

“……실수니까 가져가라고요!”

아, 아무튼 가져가라고!

본의 아니게 츤데레가 되어 버린 것 같지만 이제 아무렴 상관없는 일이었다.

원작의 쥬리 백작 영애보다 더한 싸가지에 진상을 부렸는데도, 시스테인은 연회장에 붙어 있었던 것이다.

“리벨, 힘드시면 제가 하겠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다가와 속삭이는 얼굴엔 질린 기색 하나 없었다.

혹시 내 진상 짓이 안 보였나?

그럴 리가 없었다.

“리벨?”

시스테인이 다시 부를 때였다.

그녀가 간과한 이 연회의 세 번째 문제가 들이닥쳤다.

“마님! 주인님!”

급히 리벨과 시스테인에게 달려와 그들을 부르는 건 집사 헬리아였다.

그녀는 좀처럼 이렇게 당황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뭐야, 불이라도 났나?

“무슨 일이야?”

돌아보는 리벨에게 헬리아가 다급하게 말했다.

“황,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뭐라고?

리벨이 입을 떠억 벌렸다.

댁이 여기서 왜 나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