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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92)화 (92/167)

제92화

“뭐라고?”

카리스의 예상은 모조리 깨져 나갔다.

그는 오늘 밤에 화려한 선전 포고를 듣든지 내지는 시스테인이나 이 맹랑한 대공비의 야망이나 욕망이라도 엿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 인간이 권력의 맛을 알게 되면 더 많은 것을 탐내기 마련이지.

그간 내가 불태웠던 수많은 어리석은 놈들처럼.

너희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그는 제 생각이 와장창 깨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흔치 않게 멍하니 되묻고 있었다.

모태솔로 카리스와 함께하는 뜻밖의 연애 상담이 시작되고 있었다.

“시스는 저 사람한테 정말 전혀 관심 없거든요? 근데 얼마 전부터 저게 자꾸 시스한테 연락하려고 하는 거예요. 아니, 얼마 전에는 저택으로 쥬리 백작가의 마차가 오더라고요.”

리벨이 줄줄이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번에 두 분하고 티타임이 끝난 날이었어요. 그날 티타임이 좀 일찍 끝났잖아요.”

“그랬지.”

카리스는 저도 모르게 말을 받아 주고 있었다.

리벨의 말은 청산유수처럼 이어졌다.

“그날 제가 늦게 저택에 돌아갈 걸 알았는지, 그날 저택으로 쥬리 백작 영애가 마차를 타고 오고 있었다니까요? 딱 마주쳤어요!”

“초대를 받은 건 아니고?”

카리스는 당연히 일반적인 상황을 제시했다. 하지만 리벨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게 간이 부었나,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리벨의 말이 카리스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시스가, 사람을 저택에 초대해요?”

“그럴 리가 없지.”

카리스는 순간 리벨이 왜 그런 불손한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했다.

그렇다고 눈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디란타 대공비 리벨이 쥬리 백작 영애를 초대한 건 아닐 터였다.

“알고 보니 초대장도 없이 우리 저택으로 오고 있었던 거였어요! 시스의 퇴근 시간에 맞춰서!”

리벨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카리스가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혹시, 뭔가 긴히 할 말이 있었던 건 아닌가?”

리벨은 순간 그 말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

사람이 감이 왜 이렇게 좋은데?

하지만 열변을 시작한 이상 끊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이 대화를 이끌어 가는 분노는 반 정도는, 아니, 대부분이 진심이었다.

그녀의 파도 같은 분노가 곧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뭔 말을 하려는지 몰라도 애초에 기혼 귀족 남성한테, 초대장도 없이 가는 게 말이 돼요? 그것도 신혼인데!”

리벨이 제 무릎을 탁탁 내리치며 외쳤다.

“게다가 그 뒤로도 계속 몰래 오려고 했다니까요? 문양 없는 마차까지 빌려서? 그것도 모자라서 나중엔 기사단으로 사람을 보내기까지 했어요!”

그건 모두 반역 모의를 제안하려는 것이었지만, 리벨은 그 정보를 교묘하게 피해 전달하고 있었다.

원작을 안 봤으면 그녀 자신도 몰랐을 테니까.

이건 겉으로 보기엔 누가 봐도 기혼 귀족 남성에게 관심을 보이는 파렴치한 귀족 영애의 이야기였다.

“시스는 관심도 없는데!”

리벨이 재차 강조했다. 카리스가 턱을 매만졌다.

“흠, 결혼한 걸 모를 리는 없는데.”

“그죠! 게다가 제가 마차 마주친 날 분명히 그랬거든요? 신혼부부 저택에 올 땐 좀 더 조심하라고! 그 정도면 알아들어야죠!”

리벨이 분노하며 말했다.

“그랬는데도 저렇게 들이댄다고?”

카리스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리벨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미쳤나 봐요!”

그녀의 분노와 진심을 담은 말이 튀어나왔다.

카리스는 동생의 아내가 내뱉는 절절한 상담 내용을 듣다가, 불쑥 물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내게 하는 이유가 뭐지?”

……잘 들어 주다가 찬물 끼얹는 거 반칙 아닙니까?

리벨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이유? 그야 간단했다.

시스는 권력에 관심도 없고 반역엔 더더욱 관심이 없으며, 쥬리 백작 영애가 일방적으로 들이댄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카리스는 의심이 많았으니, 반역 문제가 터지고 나서도 이런 이유로 시스테인을 용의선상에서 빼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정보력으로 다시 한번 조사를 할 것이다. 정말 시스테인과 쥬리 백작 영애가 따로 접촉한 정황이 없었는지.

그럼 그들에 의해, 시스테인은 정말 쥬리 백작 영애와 관련이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

하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고, 지금은 뭐라고 답하지?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이나?”

카리스의 서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니, 방금 전까진 흥미롭게 듣고 있었으면서! 재밌는 부분 다 지나갔다 이거냐!

물론 속내를 내뱉을 순 없었으므로, 리벨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건 당연히 아닙니다!”

“그럼?”

숨 막힐 듯 빠른 답이 돌아왔다.

덕분에 리벨의 머리를 반만 거친 답이 튀어나갔다.

“황제 폐하께서는 모든 귀족들의 생활을 내려다보시는 분이시잖아요?”

여기서 아닌데? 하면 할 말도 없고 X되는 거다! 리벨이 긴장했을 때였다.

카리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리고 그 기다렸던 답이 나오자마자, 리벨은 환호성 대신 헛소리를 내뱉었다.

“이건 풍기 문란입니다!”

이이이게 아닌데! 무슨 풍기 문란 타령이야! 조선 시대냐고!

“…….”

“…….”

리벨의 말 뒤로 아득한 침묵이 지나갔다.

X됐다…….

리벨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아하하하하하…….”

카리스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웃다 못해 배를 잡고 소파에 쓰러져 버렸다.

“폐, 폐하?”

혹시 웃긴 게 아니라 숨 막히신 거? 나 지금 의사 불러야 하는 거 아냐?

이 동네에도 산소호흡기 같은 거 있나? 없으면 인공호흡? 그럼 감히 황제 폐하께 인공호흡한 주둥이는 사형?

리벨의 머릿속이 새하얘졌을 때였다.

소파를 팡팡 내리치며 웃던 카리스가 간신히 웃음을 진정시켰다.

“좋아, 알았어. 풍기 문란이란 말이지.”

그는 황가 법도를 설명하는 지루한 책에나 있는 단어를 실제로 뱉어 내는 영애는 난생처음 보았다.

그리고 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그 어색한 단어는 그를 웃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단 알아둬.”

그가 웃음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난 대가 없는 호의는 안 베풀어.”

그는 여전히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면서 말했다.

리벨은 눈을 깜빡였다.

대가는 둘째 치고 호의를 베푸신 적 있습니까?

뜬금없이 뭔 대가?

혹시 나 까인 건가? 쥬리고 주둥이고 알아서 처리하라는 건가?

리벨의 머릿속이 복잡해진 순간이었다.

카리스가 손짓했다.

“내가 처리할 테니 신경 쓰지 마라.”

“처처처리요?”

이 집안에서 처리란 말이 나오면 보통 모가지 아니냐?

“죽이는 게 간단하겠지만, 그런 간단한 건 너도 할 수 있겠지.”

카리스가 팔짱을 끼었다.

아아아뇨 못 하는데요?

고개를 빠르게 설레설레 내젓는 리벨의 불안한 시선이 카리스를 향했다.

또 어떤 독창적인 일을 하시려고요?

아니, 어떻게든 쥬리 백작 영애가 시스테인에게 들이대지만 않게 되면 오케이이긴 했다.

리벨이 침을 꼴깍 삼킬 때였다.

“근데.”

카리스가 연회장 쪽으로 턱짓했다.

“넌 얼른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재밌는 거 다 들었다고 쫓아내시는 거? 이게 바로 토사구팽, 아니 리사구팽?

카리스는 당황한 그녀 앞에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테라스 들어간 지 5분 됐군.”

“으아아아악!”

리벨이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나오는데, 둘 다.”

그가 리벨을 올려다보았다. 리벨은 이미 그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가가가가보겠습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문을 열고 튀어 나가고 있었다.

카리스는 흥미롭게 연회장을 지켜보았다.

정무 중에 연회 소식을 듣고 심기가 불편했던 참이었다.

정말 이 연회에 정치적인 목적이 없는지는 좀 더 살펴봐야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블랙스트리트에 실리려나?”

그는 치정 불륜 로맨스에 관심이 많은, 불륜 전문 신문 블랙스트리트의 익명의 후원자였다.

한마디로 이 상황이 매우 흥미로웠다.

*  *  *

시스테인이 보기에, 오늘따라 리벨은 아주 이상했다.

‘연회를 열고 싶어요.’

물론 그날부터 이상했다. 아니, 그 전부터 이상했다.

전 같지 않게 자신을 피하는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시스테인은 흔들리는 저를 붙잡으려고도 했다.

오랜만에 마음을 연 자신이, 리벨에게 너무나도 쉽게 휩쓸리고 있다는 걸 저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잠깐 닿은 곳에조차도 온 신경이 쏠릴 정도로, 그녀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 그의 감정은 널을 뛰고 있었다.

제가 예민하다는 걸 알기에, 그는 리벨의 작은 행동들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연회를 열자는 그녀는 명백히 이상해 보였다.

‘성대하게.’

‘700명쯤?’

시스테인이 알기로는 리벨도 연회를 좋아하지 않았다.

함께 초대장을 불태운 게 머나먼 과거도 아닌데, 뜬금없이 연회는 왜 연단 말인가?

‘…….’

하지만 자줏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올려다보는 그 시선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눈가에는 붉은 기까지 차올라 있었다.

그녀가 울 것 같다는 사실을 인식하자마자 그는 저도 모르게 연회를 열자고 말해 버렸다.

그렇게 울 것처럼 간절하게 열었던 연회였다.

그런데…… 그 연회에서 리벨은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티안 자작가에서는…… 따로 준비하신 게 없나요?”

그녀가 연회장에서 하는 말은 그녀답지 않은 말이 대부분이었다.

그 증거로 그녀의 속눈썹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내키지 않는 것을 할 때의 그녀의 습관이었다. 아마 그녀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주의 깊게 본 적이 많은 시스테인은 그녀의 그 무의식중의 습관을 알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실까.

그녀의 이상한 일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오, 과연 유서 깊은 가문답군요.”

이번에 그녀가 무안을 주고 있는 건 다른 귀족이었다.

“그런데 이름이 뭐라고 했죠?”

눈썹을 파르르 떨며 귀족들에게 무안을 준 그녀는, 그들이 뒤를 돌아 갈 때 미안한 듯한 시선을 던지고는 했다.

“……?”

시스테인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몇 가지 정보와 정황만으로도 쓸모 있는 결론을 도출해 내는 데에 능한 사람이었지만, 정말 이번에는 알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리벨의 수상한 행동을 보면서도 아무런 가능성도 생각할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 범법자들의 도주로 따위는 잘도 계산하면서, 리벨 단 한 명의 생각만큼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는 정작 제가 알고자 하는 건, 정말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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