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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93)화 (93/167)

제93화

시스테인이 그간 지켜본 리벨은 권력욕에 가득 찬 사람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대공비가 된 뒤 진작부터 권력을 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권력을 위한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공비라는 신분을 부담스러워하는 듯했다.

“대, 대공비 전하. 오늘 혹시 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셨는지…….”

“아뇨? 즐겁기만 한데요?”

그렇게 말하면서 손부채질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시스테인이 보기엔 너무나도 어색해 보였다.

“저, 저기 개수가 잘못된 것 같은데…….”

그것도 모자라서 그들과 마주하기 직전까진 미안한 표정을 간신히 감추다가,

“귀찮으니까, 가져가라고요!”

“아무튼 실수라고!”

그들에게 애써 선물을 더 쥐여 주기까지 했다.

대체 뭘 위해서 저러시는 건지.

그러면서 시스테인을 흘끗흘끗 몰래 살피는 것을, 시스테인 본인이 모를 리가 없었다.

“…….”

연회는 싫었지만,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건 질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시스테인은 긴 시간 연회장을 벗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난제였다.

불쾌하지 않은 난제.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짐작해 보는 것이 조금쯤 즐겁기까지 했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딱, 카리스가 연회장에 들어올 때까지.

“이런 큰 연회를 디란타 대공저에서 보게 될 줄이야.”

반갑다는 표정으로 다가온 카리스의 얼굴 이면에는 서늘함이 묻어 있었다.

시스테인은 그 표정을 최근에 본 적이 있었다.

리벨과 자신이 우연히 만났던 첫날. 그날의 낮에.

‘되도록 내 눈에 띄지 마.’

굳이 황성으로 그를 부른 그의 형은 그렇게 말했다.

‘보는 시선이 있으니 제도에 머무르는 건 괜찮아. 하지만, 그 이상의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으면 좋겠군.’

‘너와 나 사이에 남은 우애는 지켜야 하지 않겠나, 응?’

그날과 같은 얼굴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리벨과 함께 카리스를 만나려고 했다.

어차피 신분이 높은 손님이 오면 연회의 주인이 따로 맞이하는 것이 매너였으니까.

하지만 카리스는 그런 그를 에둘러 거절했다.

“번거로운 예를 취하는 건 대공비로 충분해.”

그렇게 말하며 웃는 카리스의 얼굴이 말하는 건 단 한 가지였다.

넌 빠져.

이전 같았으면 물러났을 것이다.

열 살의 그 사건 이후, 시스테인은 카리스의 말을 거스른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그건 그에 대한 사과의 의미이기도 했고, 그에게 남은 마지막 신뢰를 지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물론 자신을 위한 이유가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카리스와 대립할 때마다 열 살 때의 기억이 떠올랐고, 상처받은 카리스의 얼굴이 떠올랐고, 마력이 들끓어 올랐기 때문에, 그는 카리스와 대립하지 않으려 했다.

아니, 카리스가 부르지 않고서야 대면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그래도 함께 뵙는 것이 예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따라 나서려 했다. 그 순간 카리스가 빙그레 웃었다.

“연회에 찬물을 끼얹으러 온 것이 아니니, 시스테인과 다른 귀족들은 연회를 즐기고 있었으면 좋겠군.”

그리고 가까이 시스테인에게 다가온 카리스가 속삭였다.

“내가 이 나라의 예인데, 그 말은 마치 네가 다른 잣대라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구나.”

그 말이 뜻하는 바는 확실했다.

이 이상 말을 거스르면, 황명을 거스르는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

―우우웅!

마력이 뒤흔들렸다. 평소 카리스와 대립할 때와는 다른 이유로.

그의 시선은 리벨에게로 가 있었다.

지금 그의 마력을 흔들리게 하고 있는 건 리벨을 향한 감정이었다.

그녀가 카리스와 둘이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녀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안이라는 감정으로 마력을 울리고 있었다.

그때 그를 진정시킨 건 리벨이었다.

“시스,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며 손을 잡아 주는 리벨은 그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아는 시선이었다.

그녀가 손을 잡아주는 순간, 그녀 때문에 끓어오른 마력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결국 시스테인은 연회장에 남았다. 그녀가 만류했기에 남은 것이었다.

“…….”

카리스가 리벨에게 무슨 말을 할까.

분명 이 연회에 대해 알려고 할 것이다. 이 연회를 무슨 목적으로 열었는지, 대공가에서 혹시 정치적인 세력을 모으려는 것은 아닌지 알아보려 할 것이다.

‘연회를 열고 싶어요. 성대하게.’

그녀가 그 이야기를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가능성은 이것이었다.

성대한 연회일수록 카리스의 시선을 받을 것이다. 그랬기에 그는 고민했다.

하지만 울먹이는 그녀의 얼굴을, 그는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충동적인 결정의 대가가 이것이었다.

“…….”

그는 끓어오르려는 마력을, 리벨의 온기를 상기하며 간신히 잠재웠다.

그녀가 잡아 왔던 손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늘 생각했듯 폭주를 막는 데에 감정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충동을 부르는 감정은 억누르는 게 맞다.

하지만, 한번 풀리기 시작한 자물쇠는 리벨의 앞에서만큼은 주저 없이 풀려 나가고 있었다.

십수 년을 억눌러 왔던 감정이, 잠시의 해방감을 맛보자 걷잡을 수 없이 날뛰고 있었다.

자유의 맛을 알게 된 마음이 그의 제어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가 짧은 숨을 터뜨렸을 때였다.

“세상에, 대공 전하.”

아까와는 달리 여유가 없는 그에게, 한 영애가 말을 걸어 왔다.

“이렇게 실물로 만나 뵙게 되다니. 듣던 대로 정말 눈부신 미모셔요.”

이야기하는 것은 쥬리 백작 영애였다. 그녀는 살짝 볼을 붉힌 채 그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시스테인이 아무리 사교계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감찰기사단장인 그가 눈앞의 영애가 누군지 모를 리가 없었다.

게다가 최근 그가 모니터링하던, 리벨이 준 ‘목록’ 속의 귀족 중 하나였으니 아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이번 연회를, 정보를 얻기 위해 연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이 영애와 굳이 내키지 않는 대화를 이어 갈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

그의 시선이 흘끗 방 쪽을 향했다. 두꺼운 유리 너머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온 신경은 카리스와 리벨에게 쏠려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살짝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편히 즐기다 가십시오.”

인사는 그 정도로 충분했다. 쥬리 백작 영애와 시스테인이 별다른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쥬리 백작 영애는 지나쳐 가려는 그를 불러 세웠다.

“디란타 대공가는,”

다소 다급한 목소리로 가문을 언급한 그녀는 말을 가다듬었다. 시스테인이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디란타 대공가는, 연회 참석은 물론이고 이렇게 연회를 여는 일도 잦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었어요.”

쥬리 백작 영애가 말을 이었다. 시스테인은 말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혹시, 디란타 대공가에서 이제부터, 대외적인 사교계 활동을 하시는 건가요?”

그렇게 묻는 쥬리 백작 영애의 표정은 언뜻 보기엔 그저 호기심으로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감정을 감추는 데에 익숙하며, 감찰을 속이려는 수많은 귀족들을 보아 온 시스테인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녀의 눈엔 일말의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건지 몰라도.

시스테인은 지금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모니터링하고 있던 귀족 중 하나인 쥬리 백작 영애가 원하는 것.

그걸 자연스럽게 알아내는 것 역시 감찰기사단장으로서의 그의 업무였지만 지금만큼은 그는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많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답했다.

“리벨이 원한다면, 그리할 생각입니다.”

그건 그의 진심이었다. 리벨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이런 연회는 참석할 수 있다.

그녀의 색다른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으니.

……굳이 오늘 같은 기이한 모습이 아니라도.

그는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뻗어 나가는 제 생각을 수습하려 이마를 짚었다.

“그럼.”

아무래도 찬 바람이라도 쐬어야 할 것 같았다. 그가 쥬리 백작 영애를 지나 테라스로 들어섰다.

―쏴아…….

시원한 바람이 머릿속도, 달아오른 마력도 조금은 식혀 주는 듯했다.

그가 숨을 내뱉는 순간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지 십수 초도 지나지 않아, 테라스에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결국 그는 눈에 불쾌감을 띠었다. 그리고 테라스의 입구를 돌아보았다.

“이곳까지 들어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불청객은 쥬리 백작 영애였다. 시스테인의 인내는 닳기 직전이었다.

그는 리벨이 이 영애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때문에 쥬리 백작 영애와 굳이 긴 이야기를 이어, 쓸데없는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쥬리 백작 영애는 그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떨리는 걸음을 떼었다.

시스테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조용한 분노와, 리벨을 향한 걱정, 그리고 그녀가 이 상황을 오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까지 함께, 그의 마력을 다시 울리게 만들고 있었다.

세상이 요동치는 것 같다.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말하세요.”

그는 쥬리 백작 영애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할 말만 하고 가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쥬리 백작 영애가 이전에 그를 몇 번이나 비공식적인 루트로 만나려고 애썼든 말든, 기혼인 귀족 남성에게 이렇게까지 가까이 접근해 오는 건 애초에 실례였다.

그가 기분 나빠 할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그…….”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는 시스테인 폰 디란타.

하지만 오늘따라 불쾌해 보이는 그의 기분을 느꼈는지, 쥬리 백작 영애는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참 아름다우세요.”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듯했다. 시스테인은 그 말에 눈도 뜨지 않았다.

“밤하늘하고 아주 잘 어울리세요. 반짝이는 금발도, 귀족적이시고.”

이렇게 칭찬하면 그만큼의 칭찬을 되돌려 주는 것이 귀족 사회의 일반적인 매너였다.

하지만 시스테인은 그런 매너를 신경 써 줄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

하지만 시스테인은 눈을 떴다. 쥬리 백작 영애의 얼굴에 일말의 기대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시스테인의 시선은 쥬리 백작 영애 너머, 테라스의 문으로 향해 있었다.

예민해진 그의 마력에, 반가운 사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러니 이 불편한 만남은 빨리 끝내야 했다. 시스테인이 입을 열었을 때였다.

“잠시만요.”

쥬리 백작 영애는 대담하게도 그의 말을 막아 버렸다. 그리고 무려, 검지를 그의 입술에 슬쩍 대려고 했다.

시스테인은 불쾌한 스킨십을 약간의 움직임으로 피해 버렸다.

“따로 용건이라도 있으십니까?”

그의 서늘한 시선이 쥬리 백작 영애에게 꽂혔다.

움찔한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그녀가 뒤에 어떤 말을 하든 시스테인은 관심이 없었다.

리벨이 곧 들어올 것이다. 5초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5, 4, 3, 2―

“전부터, 흠모해 왔답니다.”

쥬리 백작 영애가 불쑥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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