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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님과의 결혼, 저도 지금 알아 (94)화 (94/167)

제94화

“전부터 흠모해 왔답니다.”

시스테인은 순간 속으로 세던 숫자를 끊어 버렸다.

리벨이 아닌 다른 자들 앞에서는 억누르려고 애썼던 감정이 툭 튀어나왔다.

가장 먼저 민얼굴을 내민 것은 불쾌함이었다.

그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부터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잘못된 사랑이란 건 알고 있어요!”

쥬리 백작 영애가 급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마음을 접기 전에…… 한번 뵙고 싶었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가 시스테인을 올려다보았다.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도 있었고요. 이렇게 둘이 있으니 참―”

―벌컥!

빠르게 이어지던 쥬리 백작 영애의 말은 테라스 문 열리는 소리에 묻혀 버렸다.

시스테인은 아까부터 쥬리 백작 영애 대신 그곳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테라스 문을 열고 들이닥친 건, 당연히 그의 예상대로 리벨이었다.

*  *  *

리벨은 빠른 걸음으로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나왔던 방 쪽에서, 유리 너머로 카리스의 흥미롭다는 듯한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어머, 대공비 전하.”

“안녕하세요, 부인.”

대충 말을 받아 준 리벨이 재게 걸음을 놀렸다.

대체 쥬리 백작 영애가 여기 어떻게 들어온 거야?

분명히 쥬리 백작가 빼고 초대장 보내라고 했는데!

이런 큰 규모의 연회에서 백작가 정도 되는 가문에 초대장을 안 보내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보내야 할 초대장이 누락되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다.

특별히 친한 가문 사이가 아니면 더더욱.

‘쥬리 백작가로 갈 초대장은 빼. 보내지 마.’

그랬기에 리벨은 일부러 쥬리 백작 영애에게 보낼 초대장을 빼 버렸다.

그런데 초대장은 대체 어디서 구해서 들고 들어온 거야?

초대장을 보낸 디란타의 사용인들은 안주인의 명령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초대장을 어떻게든 구해 들어온 쥬리 백작 영애를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간 쥬리 백작 영애에게 사용인이 대놓고 무안을 준 꼴이 될 것이고, 이는 쥬리 백작가와 디란타 대공가가 싸우기라도 했다는 소문으로 번질 게 분명하니까.

그건 알겠는데!

그래서 어떻게 초대장을 구한 거냐고!

리벨은 머리를 볶아 버리고 싶었다.

“작작 좀 하지, 응?”

리벨이 작게 씹어 뱉듯 중얼거렸다.

대체 시스테인한테 왜 그렇게 미련을 못 버리는 거야? 반역은 너 혼자 하라고! 시스는 그딴 데 관심 없다고!

왜 남의 남자한테 그러는 건데!

멀어져야 한다 염불을 외면서도, 이런 순간에 분노하는 제 꼴을 보니 한심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보다도, 지금은 화가 더 많았다.

―벌컥!

그리고 테라스 문을 열고 들어간 리벨은 빠르게 문을 닫아 버렸다.

쥬리 백작 영애가 얽힌 질척한 치정극 따위가 입소문으로 도는 건 아주 질색이었으니까.

눈치 좋은 사용인들은 테라스로 향하는 길을 슬그머니 차단해 버렸다.

테라스 안쪽이 잘 보이지 않도록, 근처의 화분을 자연스럽게 옮겨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테라스에 들어온 리벨이 본 것은, 정말 어이없는 꼴이었다.

물론 어이없는 말도 들렸다.

“―둘이 있으니까 참…….”

쥬리 백작 영애가 속삭이는 소리였다.

“참?”

참 뭐? 참 좋아 죽어?

리벨은 그 뒷말을 굳이 기다리지 않고 되물었다.

“!”

쥬리 백작 영애가 움찔했다. 그녀는 시스테인에게 아주 가까이 들러붙어 있는 상태였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 내 안에 마력 있다. 마력이 끓는 것 같다는 시스테인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 리벨은 알 것 같았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응?

물론 시스테인은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쥬리 백작 영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웃는 얼굴을 최근에 보았기에, 그의 서늘한 얼굴은 더더욱 얼어붙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쥬리 백작 영애는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머, 오셨네요.”

발그레한 얼굴을 쥘부채로 슬쩍 가리며, 쥬리 백작 영애가 시스테인에게서 물러섰다.

“지난번에 뵙고 처음 뵈어요.”

아까는 목소리에서 꿀 떨어질 것 같던데, 지금은 아주 냉랭하네? 그죠?

리벨은 그녀의 말에 옅게 웃었다.

“그러게요.”

지난번에 뵙고 처음 뵙긴 개뿔. 난 많이 봤거든? 서류로 보고 보고로 듣고?

시스하고 접촉하려고 아주 온갖 짓을 다 했더라?

하지만 그 사실을 굳이 티 낼 만큼 리벨은 하수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좀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에 만난 건, 아주 우연한 만남이었죠.”

그녀의 말에 쥬리 백작 영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곳에서 대공비 전하를 만날 줄은 몰랐답니다.”

나도 몰랐거든? 그거 완전 잘못된 만남이었거든?

더군다나 저쪽이 원했던 만남은 리벨과의 만남이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시스 만나서 아주 좋으시겠수다?

리벨의 속이 뒤틀리는 가운데, 쥬리 백작 영애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게요. 이렇게 시스테인 경과 만나게 되려고 그런 인연이 닿았나 봐요.”

“What?”

리벨은 순간 되묻고 말았다.

“네?”

물론 What이 무엇인지 알 리가 없는 쥬리 백작 영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리벨은 굳이 설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 내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전생의 용어가 튀어나오고 말았단다.

인연? 뭔 인연?

“아니, 좀 놀라서요.”

사실 어이가 없어서요. 리벨이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무리 옷자락만 스쳐도 인연이라지만 너무 간 거 아니냐?

너랑 시스는 옷자락 스친 적도 없거든?

네가 스친 건 시스도 아니고 시스의 부인인 내 옷자락, 아니 내 마차였거든?

근데 그거 가지고 인연이라니 이게 무슨 억지야?

이 파릇파릇한 불륜 새싹 같으니!

리벨의 머릿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시스는 우리가 만난 줄도 몰랐을걸요.”

시스가 모르는 시스와의 인연이 있다!? 무슨 시스 없는 시스 팀이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만해라!

리벨이 옷자락을 쥔 손에 살짝 힘을 주었을 때였다.

“…….”

이렇게 따지고 들 줄은 몰랐는지, 쥬리 백작 영애가 쥘부채로 얼굴을 가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시스테인이 입을 열려고 하고 있었다.

자아아암깐.

리벨의 촉이 발동했다. 이 타이밍에 시스가 뜬금없이 할 말은?

“…….”

리벨은 순간 눈을 부리부리 뜨고 시스테인을 올려다보았다.

“?”

그 시선을 받은 시스테인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하려던 말을 멈춰 버렸다.

“…….”

“…….”

그 덕에 테라스엔 싸늘한 침묵이 떠돌았다.

휘이잉. 찬 바람이 세 사람이 있는 자리를 휩쓸고 간 후에야 리벨은 정신을 차렸다.

자자잠깐만, 나 지금 저 사람 보고 다물라고 쏘아본 거야?

리벨은 머리를 붙잡고 싶었다. 세상 어느 귀족 영애가 이런 눈빛으로 사람 입단속을 시킨단 말인가?

그걸 또 말없이 들어준 시스테인도 걸작이었다.

물론 그 사이에서, 리벨의 쏘아보는 시선을 받고 몸을 흠칫 떤 쥬리 백작 영애가 최고로 웃겼다.

아니, 하지만.

내 경험이 분명히 말하고 있다니까?

쓸데없이 팩트에 후한 시스테인의 입은 이 타이밍에 영 좋지 못한 말을 뱉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제 남편이 미혼 여성과 단둘이 있는 상황.

리벨이 눈을 부리부리 떠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물론 리벨이 의심하는 건 남편인 시스테인 쪽이 아니라 쥬리 백작 영애 쪽이었지만.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요? 들어 보니 테라스에 오신 지도 꽤 지났다고 하더라고요.”

빙그레 웃은 리벨이 시스테인 옆으로 다가가 섰다.

“즐거운 이야기면, 같이 해요.”

그녀가 선 자리는 정확히는, 시스테인보다 조금 앞이었다.

들이대는 백작 영애와 그의 사이를 가로막은 거였다.

아니, 아무리 권력이 좋고 시스테인이 황위 계승 서열 1위라지만 선은 지켜야 하는 거 아니냐?

이 사람 결혼했다고! 나랑!

내가 아무리 이 사람한테…… 죄가 있어서 이 사람하곤 멀어져야 한다고 해도, 너는 아닌 것 같거든?

리벨의 미소가 꽃이라도 핀 것처럼 화사해졌다.

그리고 그 미소를 받은 쥬리 백작 영애는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아니에요. 드릴 말씀은 모두 드렸답니다.”

아까 분명 말 끊기지 않았니? 둘이 같이 있으니까 참 뭐?

좋아요? 반역이 하고 싶은 밤이에요? 우리 같이 황좌를 가져요? 그런 헛소리 하려고 왔니?

“그럼 다음에 또 인연이 되면 뵈어요, 대공 전하.”

하지만 쥬리 백작 영애는 리벨의 궁금증을 풀어 주는 대신, 부리나케 테라스에서 빠져나갔다.

아니, 빠져나가려고 했다.

“거기 말고, 저기로.”

리벨은 제가 들어온 문이 아닌 작은 문을 가리켰다.

리벨 자신이 들어온 문으로 쥬리 백작 영애가 나가면 틀림없이 귀족들이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할 테니까.

“……!”

움찔한 쥬리 백작 영애가 재게 발을 놀려 그녀가 가리킨 쪽문으로 빠져나갔다.

아니, 사람이 부르기만 해도 펄떡펄떡 놀라는 사람이 대체 반역은 왜 생각하는 건데?

꿈 깨라, 응?

이왕이면 필레 공작 쪽에도 붙지 말고 조용히 살라고!

어차피 반역 세력은 이쪽에서 잡을 것이다. 필레 공작이 무슨 발악을 해도, 원작에서 그랬듯 시스테인은 그를 잡아낼 것이다.

물론 원작과 전개가 좀 달라졌으니 조금 헤맬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는, 이미 원작을 알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필레 공작은 틀림없이 붙잡히게 될 것이다. 그럼 뭐다?

모가지지, 모가지!

리벨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시스테인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둘이 무슨 이야기 했어요?”

흥분했기 때문일까 말은 빠르게 튀어나갔다.

리벨은 말하고 나서야 아차 했다.

이거 완전…… 바람 현장 잡은 부인 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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