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이전에 봤던 하인 모습.
루이나 상단주의 모습.
그리고 아스테아 백작가에서 본 검은 머리 여자의 모습.
익숙한 인상착의 목록이었다. 시스테인은 그 사실을 알자마자 탄식했다.
왜 그 셋의 눈 색을 연결 지어 볼 생각을 안 했을까?
물론 그 모습들과 긴 시간 만난 적 있는 자도, 그 모습 전부를 만난 사람도 없었으니 그들에 대해 특정하기가 힘든 건 사실이었다.
[(단독) 디란타 대공, 그가 대공가의 대를 끊겠다 선언한 이유]
벨 기자의 이름으로 그 기사가 떴을 당시, 디란타 대공가의 기사들이자 감찰기사들은 빠르게 움직여 벨의 정체에 대해 조사했다.
그리고 벨이 실체 없는 기자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정확히는 누구도 그 모습을 모른다는 사실을.
대신 그녀의 수습 기자라는 세 명의 신원만 확인했다.
매번 이름이 바뀌는 데다 신출귀몰한 자들이라 어디에 머무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대략적인 외형은 알 수 있었다.
감찰기사들은 그들의 눈을 보랏빛 내지는 붉은빛 눈으로 보고해 왔다.
‘목격자의 진술에 의하면…….’
‘마주친 자들에 의하면…….’
그야 감찰기사들이 직접 그 모습들을 마주친 게 아니라, 그 모습을 마주친 자들의 꼬리를 잡아내 조사했던 것이니까.
잠깐 스친 하인과 하녀의 모습을 자세히 기억하는 자는 많이 없었다.
덕분에 특정된 그 세 가지 모습들도 여러 진술을 합쳐 겹치는 부분으로 짐작해 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조사했는데도, 결국 벨 기자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정보가 부족했으니까.
감찰기사단의 정보망을 피해 가는 기자라니.
‘기자 벨은 크라이베리 신문사에 직접 나타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그 수습 기자들만 나타난다는데, 수습 기자들이 어디에 사는지 아는 자들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미 기자들 사이에는 밤낮없이 일한다는 벨의 수습 기자에 대한 소문이 자자합니다.’
필요한 정보 대신 들은 건 악명이었다. 기자 벨이 그 수습 기자 세 명을 악독하게 부려 먹는다고.
그런데 그 세 모습이 리벨의 모습이라면.
“하.”
시스테인이 한숨을 뱉어 냈다.
높은 신분의 귀족이 기자에 대해 알 기회는 적었다.
애초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으니까.
하지만 시스테인은 달랐다.
벨에 대해서 알아내던 그는 기자들이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름이 알려진 ‘진짜 기자’들은 오히려 일선의 정보 수집에 참여하지 않는다.
특히 귀족들이나 위세 높은 가문에 대한 기사를 쓰는 기자들은 더했다.
안전을 위협받을 수 있으니까.
그런 기자들 대신 화살받이로 내세워지는 것이 수습 기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소속된 선배 기자가 물어오라는 정보를 물어 오게 되어 있었다. 물론 제 이름으로 기사를 쓰지는 못한다.
대신 선배 기자가 주는 일부 고료와, 취재 현장에 대한 감을 익히고 또 다른 ‘선배 기자’로 독립하는 것이다.
시스테인은 그제야 머릿속에서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그랬던 겁니까.”
그가 눈을 감을 때였다. 리벨은 열심히 눈을 깜빡였다.
벨, 까진 맞았는데 수습 기자는 여기서 왜 나와?
물론 따지자면 걔네도 나는 맞는데……. 아니, 그게 나이긴 한데…….
왜 내가 벨 본인이라고는 생각을 안 하는 거야?
이걸 감이 좋다고 해야 돼, 구리다고 해야 돼?
수수께끼 다 풀어서 보물 묻힌 위치는 찾아냈는데, 막상 보물은 못 찾는 것 같은 이 찝찝한 상황은 뭐지?
리벨이 복잡한 머릿속을 볶아 댈 때였다.
시스테인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지난번에 기자 벨과의 인터뷰를 쉽게 하신 것도 이해가 가는군요.”
그건 저 본인과 인터뷰를 했으니까 쉽지 않았을까요?
왜 본인이라고는 생각 안 하세요?
내가 기자상이 아닌가?
슬슬 이제 알 수 없는 오기까지 차오르려는 찰나, 시스테인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시는 것도. 유명한 기자인 벨이, 직접 정보를 수집할 리가 없으니 당연했겠군요.”
“……아.”
그거 때문이었구나.
아니, 그럼 기자에 대해서 조사를 얼마나 했던 거야?
보통 귀족이 선배 기자와 수습 기자의 관계를 알고 있을 리가 없는데?
리벨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때 시스테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벨은 수습 기자들을 굉장히 악랄하게 부린다고 들었습니다.”
“네?”
리벨이 움찔했다.
제가요? 저를요?
좀 나인투식스 안 지키고 밥 시간도 휴식 시간도 없이 주 96시간쯤 굴리긴 했는데…….
그건 리벨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이었다. 누가 시킨 게 아니라.
아니, 딴 데선 똑똑한 사람이 왜 여기서만 헛다리를 짚어?
“괜찮으십니까.”
시스테인은 정말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리벨이 볼을 긁적였다.
“아니, 저는 괜찮은데―”
“소문이 안 좋더군요.”
리벨 본인보다 시스테인의 얼굴이 더 불편해 보였다.
그야 소문은 안 좋을 터다.
그녀에게 특종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기자들도, 그녀에게 털린 귀족들이나 상단도 그녀를 험담하기 바빴으니까.
좋은 이야기가 돌았을 턱이 없었다.
특히 ‘벨 기자’가 큰 기사를 물어 올 때마다 그건 더 심해졌다.
기자 벨이 일부러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는 심해져만 갔다.
“이전에 제 기사가 올라왔을 때, 조금 알아보았습니다만.”
그때 리벨의 머릿속으로, 시스테인의 진지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으아아아악!
리벨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건…….”
나올 게 나오고야 말았다! 리벨은 거듭 마른세수를 했다.
“그건 진짜…….”
이걸 뭐라고 말해야 되지?
차라리 몇 달 전에 들켰으면 죄송합니다아아악! 하고 머리 박고 모가지 날아가고 끝났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 깔끔하게(?) 끝날 문제가 아니게 되어 버렸다.
리벨이 머릿속으로 비명을 지를 때였다.
시스테인이 고개를 저었다.
“리벨이 원해서 도운 게 아니란 건 알고 있습니다. 당시엔 생업이라고도, 하셨고요.”
그가 이해한다는 듯 손을 펴 보였다.
이벨라 자작가에 있을 때이니 생업은 맞았다.
원해서 쓴 기사가 아닌 것도 맞았다.
내 변신 능력을 알아챈 편집국장, 그 빌어먹을 놈만 아니었어도 이런 잘못된 만남이 성사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리벨이 입술을 마구마구 깨물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사를 쓴 걸 도운 게 아니라, 쓴 게 나라니까요?
“이해합니다.”
이해는 무슨 개뿔이!
아예 이쪽이 벨의 수습 기자라고 확신을 굳히는 사람 앞에서 리벨은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차마 제가 사실 벨입니다, 하고 말할 수가 없었다.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리벨.”
괜찮다는 듯, 시스테인이 옅게 웃었다.
하나도 안 괜찮은 리벨은 발만 굴러댔다.
그냥 확 지금 말해 버려?
리벨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얼굴을 가린 손을 뗐을 때였다.
“대신 나중에, 벨 기자를 한 번쯤 만나 보고 싶군요.”
시스테인이 말했다. 리벨은 목 뒤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식은땀을 무시한 채 리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나면, 어떻게 하시게요?”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기사를 쓴 이유를, 물어볼 생각입니다.”
진지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이이이이유를 물어보고요? 그다음은?
아 그래? 하고 쓱싹 하시는 건가요?
그 벨이 리벨 자신만 아니었으면 참 해피엔딩이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건드린 사람을 처단하고 해피해진 마음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아주 꽉 닫힌 해피엔딩 말이다, 젠장!
리벨이 입술을 깨무는 동안, 시스테인이 말을 이었다.
“제게, 좋은 기사는 아니었으니까요.”
시스테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가 눈을 감았다.
리벨은 그가 눈을 감고서야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조금쯤 그의 속눈썹이 떨리는 것 같은 건, 착각일까.
리벨은 그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때…… 힘드셨을 것 같아요.”
슬그머니 꺼낸 말이었다. 아니길 바라면서.
하지만 눈을 가늘게 뜬 시스테인은 웃으면서도, 부인하진 않았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안 괜찮았다는 소리다.
리벨은 그를 살피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어릴 때 기억나고…… 그러진 않았어요?”
그가 말했던 어린 시절.
그가 원치 않던 뒷소문을 일방적으로 듣기만 했어야 했을 때.
그때가 생각나지는 않았는지.
그녀의 말에 시스테인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랬지만, 지난 일입니다.”
기억나긴, 했구나……. 리벨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시스테인의 손이 리벨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이제는 괜찮습니다.”
당신이 나를 가라앉혀 주니까.
“그런 기사가 다시 올라오더라도, 이제는 가만히 있지 않아도 되니까요.”
더 이상 마력을 억누른다고 감정을 억누를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게 뇌까리던 시스테인이 리벨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리벨의 고개가 푹 숙어졌다.
양심이 찔려서 얼굴이 폭발할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시스테인이 토닥여 주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리벨.”
진짜 고생한 사람한테 듣자니 미칠 노릇이었다. 리벨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뇨, 시스야말로……. 제가 정말 미안해요.”
리벨의 목소리가 간신히 기어 나왔다.
수습 기자로 굳어져 가고 있는데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아니, 원래 이렇게 사람 잘 믿는 캐릭터셨어요?
아니면 그냥…… 현실을 믿기 싫은 거?
……벨 소문이 좀 안 좋긴 했지.
설마 소문하고 내 모습이 매치가 안 돼서 그런가?
귀족가의 폭풍, 벨 기자.
신원을 제대로 밝힌 적이 없는 벨 기자는 기자로서 유일하게 블랙스트리트에 단독 기사까지 실린 적 있는 사람이었다.
[(단독) ‘귀족가의 폭풍’ 벨 기자의 정체]
기사에서는 40대의 유부녀라고도 하고, 70대의 할아버지일 가능성도 있다며 추측을 해 댔지만 당연히 모두 개소리였다.
블랙스트리트에서는 크라이베리 신문사 앞에 잠입해 취재했다며 40대거나 70대 둘 중 하나는 확실하다고 연달아 기사를 실어 댔지만, 리벨은 그걸 보고 박장대소하기만 했다.
‘웃기고 있네!’
하지만 지금은 반대였다. 차라리 40대나 70대였으면 좋았겠다!
나만 아니면 될 것 같다!
점점 좁아지는 방 안에 있는 느낌이었다.
좁혀져 오는 걸 알면서도, 언젠가는 좁아지다 못해 제가 갇혀 죽을 거란 걸 알면서도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방이 좁아지는 이 짧은 순간이라도 살아 보겠다고.
그와 함께 있어 보겠다고.
그에게 상처를 주지 않겠다는 알량한 이유로, 그의 옆에 있어 보겠다고 발버둥 치고 있자니.
미칠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