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설마? 리벨은 멈칫했다.
“그들의 흔적이 나타난 곳을 중심으로 다른 것은 없었나?”
시스테인의 질문에 기사가 고개를 깍듯이 숙였다.
“마물들이 유독 많았습니다.”
“…….”
시스테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몬스터들이 많은 곳에 갑자기 ‘허공에서 떨어진 것처럼 나타난’ 사람.
“그렇다면, 이번엔 몬스터가 아닌 다른 것을 찾아보지.”
“예?”
시스테인의 말에 디란타의 기사가 눈을 크게 떴다.
리벨은 그를 돌아보았다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게이트.”
“?”
디란타의 기사가 당황했다.
그사이 시스테인과 리벨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 사람, 나랑 같은 생각이다.
리벨은 그 시선에서 확신하고는 기사에게 말했다.
“디란타령에 게이트가 열린 건 없는지 찾아봐.”
“게이트라시면…….”
디란타의 기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디란타 대공령의 기사들은 기본적으로 감찰기사단이기도 했다.
보고하는 기사 역시 아스테아 백작령을 조사한 감찰기사 본인은 아니었어도, 당연히 공유받은 정보가 있었다.
최근 감찰에서 주시하고 있는 필레 공작과 살롱의 게이트 등을 떠올린 기사의 얼굴이 점차 새하얘졌다.
“설마 아스테아 백작가에 있던 쌍방향 게이트가 디란타령에도 있을 거라고…… 짐작하시는 겁니까?”
시스테인이 그 말에 입을 열었다.
“비정상적으로 마물이 모이는 이유. 거기에 외부인이 들어온 흔적.”
그 말을 리벨이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
“그것도 외부인이 대공령의 경계에서부터 걸어 들어온 것도 아니라며.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졌으면, 다른 가능성은 없지 않아?”
“…….”
디란타의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게이트를 찾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인력을 움직이겠습니다.”
그러고는 곧바로 방을 나갔다.
이게 사실이라면 디란타 대공령의 마물들이 다른 곳으로 나갈 수도 있는 것이다.
번성기 때보다 네 배는 늘어난 수의 마물이.
―쿵.
심각한 얼굴의 기사들이 나간 후, 집무실에는 리벨과 시스테인 둘만이 남았다.
리벨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게이트……가 만약 디란타 대공령에 열렸다면, 제국 어디에든 마물이 튀어나올 수 있다는 거잖아요?”
“예. 게다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대공령 안팎을 오간 흔적이 없다는 걸 보면 이미 설치되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탁.
리벨은 그 말에 테이블 한쪽의 지도를 집어 들어 펼쳤다.
그건 디란타 대공령의 지도였다.
마물들이 주로 나타나는 구역과 저택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는 대(對)마물 전술용 지도.
“대체 어디에…….”
리벨이 뇌까렸다.
대체 어디에 간 큰 놈이 게이트를 설치했단 말인가?
혹시 마물 밥이 장래희망이었나?
대체 어떻게 마물한테 공격받으면서 게이트를 설치한 거지?
리벨이 봤던 아스테아 백작가의 게이트는 한눈에 봐도 복잡한 술식이 적용되어 있었다.
아니, 게이트가 무슨 레토르트 식품도 아니고 전자레인지 30초 땡 돌리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대체 이걸 어떻게 설치했대?
리벨의 눈이 바쁘게 지도를 훑었다.
그 의문보다도 위치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지도에 따르면 대공령에서도 지역마다 나타나는 마물이 다르잖아요.”
시스테인은 그 말에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긍정의 표시였다.
리벨의 손이 바쁘게 지도를 훑었다.
어느 마물은 물에 약하고, 어느 마물은 불에 약하고……. 그런 것들을 표시해 둔 이유는 간단했다.
불에 약해지는 마물이 있나 하면 불에 오히려 강력해지는 마물도 있다.
그리고 그걸 알아야 대응하기가 쉬워진다.
한마디로 게이트가 어디에 열려 있는지를 알아야 그 게이트에서 무슨 마물이 넘어오는지 알게 된다는 의미였다.
“필레 공작…….”
그녀가 다시 중얼거렸다.
그의 목적은 반역이고, 반역을 위해서 쳐야 할 것은 황성이다.
하지만 황성 기사들이 호구도 아니고, 무슨 마물이 공격해 오든 황성의 견고한 벽을 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 황성 기사들을 어떻게든 바깥으로 빼내야 하는데…….
“잠깐, 밖으로?”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탁, 탁.
디란타 대공령의 지도를 접은 리벨이 급히 제국의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그 위로 수도 주변만을 표시한 지도를 펼쳤다.
그 지도의 북서쪽에는 카실라 대장간, 즉 필레 공작의 비밀 살롱의 위치도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과 황성 사이는 공교롭게도 숲 따위는 없는 평지였다.
당연히 수도에 사는 제국민들의 주택가야 있었지만 마물들이 주택가라고 피할 리가 없다.
“리벨?”
시스테인이 리벨을 돌아보았다. 리벨이 지도 위의 카실라 대장간을 가리켰다.
“여기, 여기일지도 몰라요.”
그녀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찰기사단장의 눈이 지도를 훑었다.
“설마, 그곳의 게이트로 대공령의 마물을 소환해서…….”
그 살롱에는 제국 각지로 연결된 게이트가 있다.
아스테아 백작가에 있었던 것처럼, 다른 영지로 연결된 게이트들이.
“제국의 여러 군데를 한 번에 공격하려는 거예요.”
리벨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옆 서류를 펼친 그녀는 살롱에 열려 있는 게이트와 연결된 가문들의 목록을 확인했다.
“아.”
아, 쓰!
그리고 간신히 욕을 삼켰다. 하필 이건 제대로 조사한 서류가 아니었다.
살롱을 짓는 과정에서 잠입한 기사들이 정체를 들키지 않으면서 살롱을 조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특히 살롱에 연결된 게이트는 살롱이 오픈되었을 때를 제하곤 오가는 자들조차 별로 없으니, 그곳을 조사하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그 게이트가 어디어디로 연결되는지는 아직 모두 조사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십중팔구 아스테아 백작가처럼 저택의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거나, 어쩌면 다른 영지의 공터 등으로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저들이 정말 마물을 소환하려고 한다면, 저택 한가운데에 게이트가 있었던 아스테아 백작가가 오히려 특이 케이스였던 거겠지.
“필레 공작이 황성을 노리고 있다면, 황성의 병력을 밖으로 어떻게든 빼려고 할 거예요.”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슬슬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여기엔 중요한 퍼즐이 하나 빠져 있었다.
“근데 마물을 조종할 수가…… 없을 텐데?”
리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물이 아무리 지금 대공령에서 야유회를 하고 있다고 해도, 그런 단순한 움직임을 만드는 것과 각 게이트로 원하는 만큼의 마물이 움직일 수 있도록 조종하는 건 완전 다른 이야기였다.
특히 먹이에 대한 본능으로 움직이는 마물들을, 어떻게 제멋대로 조종한단 말인가?
“마물을 조종할 방법이 있을까요?”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백여 년 전의 기록에 마족들이 마물을 움직였다는 기록은 있습니다만, 현재는 그 방법이 실전되었을 겁니다.”
“그때랑 같은 방식의 게이트도 만들었잖아요. 못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야 가능성은 열어 두어야겠습니다만,”
시스테인이 눈살을 찌푸렸을 때였다. 리벨이 불쑥 물었다.
“아니면 먹이 같은 걸로 유인은 못 하나요?”
마물도 종류가 많으니 취향(?)이란 게 있을 것 아닌가?
어떤 마물은 몬스터 고기 좋아하고 어떤 마물은 인간 고기(...)를 더 좋아한다든가…….
리벨이 끔찍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였다. 시스테인에게서 의외의 답이 튀어나왔다.
“그건 디란타에서도 간혹 쓰는 방법입니다.”
“네?”
리벨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설마 그 먹이라는 게…… 사……람?
때아닌 납량특집에 리벨의 등골이 오싹해졌을 때였다.
그녀의 하얗게 질린 얼굴과 시스테인의 진지하게 가라앉은 얼굴이 서로를 마주했다.
“너무 많은 종류의 마물이 섞여 있을 때에는, 곤충의 사체나 동물의 내장 등으로 유인해 처리하고는 합니다.”
“그렇―”
군……요……? 리벨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잠깐,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라인업인데?
곤충의 사체에 동물의 내장?
최근에 곱창 파티라도 하는지 의문스러울 만큼 내장을 많이 구했던 가문이 있었지 않은가?
리벨이 입을 떠억 벌렸다.
“그, 그거 필레 공작이 전부터 사들였던 건데!”
“?”
시스테인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리벨이 재빨리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달칵.
문이 열리자 문밖에 대기해 있는 기사들과 사용인들이 보였다.
리벨은 그중에 나인에게 손짓했다.
“그때, 나갔을 때 조사한 거 가져와 봐.”
나인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리벨은 그사이 머리를 싸맸다.
내가 왜 이걸 진작 시스한테 말할 생각을 안 했지?
아니, 근데 그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워낙 버라이어티했어야지!
“마님, 가져왔습니다.”
다행히 나인은 리벨의 머리가 터지기 전에 서류를 가져왔다.
리벨은 곧바로 시스테인에게 서류를 건넸다.
“이건…….”
시스테인은 서류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필레 공작이 수많은 차명으로 내장을 사들인 것.
몇 번이나 꼬고 꼬아서 유통 경로를 추적하지 못하게 기를 쓴 흔적이 보였다.
하지만 상대는 황태후의 그림자들이었다.
그들은 일반 영지민들 사이에도 숨어 있었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보를 뜯어내는 데에는 도가 튼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답게 그들은 작은 꼬리에서부터 중심을 잡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서류를 본 시스테인의 표정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마물들이 많아졌다고 했잖아요. 디란타령에.”
리벨은 이제 거의 저들의 계획 윤곽이 보이는 것 같았다.
“몬스터들은 인간이나 작은 동물을 잡아먹으면서 산다고 들었어요. 마물도 같다면, 그리고 그 마물들에게 만일 풍족한 먹이가 계속 공급되었다면.”
리벨의 말을 시스테인이 받았다.
“……마물들이 많아졌으면서도 대공저 근처로 내려오지 않은 이유가, 설명되겠군요.”
하.
그가 숨을 내뱉었다.
그의 땅, 그의 코앞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폭주며 뭐며 제 일로 바쁜 동안에, 저들의 일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저들은 오래전부터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거예요. 게이트 근처에서 몬스터를…….”
리벨은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인간이 어떻게? 같은 인간을 공격하는 몬스터를?
“……몬스터를, 기르면서.”
이거 완전 미친놈들 아니야?
뒷말을 간신히 삼킨 리벨의 말이 툭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