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정말 그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시스테인은 난감한 얼굴로 물었다.
상처를 내는 것은 물론 귀한 피를 내는 과정이다.
근데 고작 원하시는 것이 식사 자리라니.
하지만 리벨은 고개를 거듭 끄덕여 보였다.
“맛있는 거 잔뜩 먹으면 괜찮아져요.”
헌혈할 때도 그랬다.
피가 빠져나가 머리가 핑 돌다가도, 삼겹살 2인분만 먹어 치우면 빈혈이고 뭐고 싹 씻은 듯이 사라졌던 기억.
이번에도 비슷하겠지! 하하하하!
리벨이 그렇게 자신 있게 생각했을 때였다.
시스테인은 당연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데 피를 많이 내어 보셨습니까? 이후 관리에 능숙해 보이십니다.”
“…….”
그 말에 리벨은 입을 딱 붙은 듯 닫아 버렸다.
그게…… 많이 내 보긴 내 봤는데 이쪽 세계에서의 일이 아니라…….
잠시 입을 벙긋거리던 리벨이 재빨리 말했다.
“많이 다치면 많이 먹어야 낫는 게 상식이잖아요?”
그죠? 그건 이쪽 세계도 똑같죠? 똑같던데? 똑같아야 할 텐데?
리벨의 반짝이는 눈을 보던 시스테인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다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손을 뻗어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짤랑!
“찾으셨습니까?”
문밖에서는 바로 반응이 왔다.
시스테인은 여전히 리벨의 자줏빛 눈동자를 보면서 말했다.
“요리사에게, 오늘 밤에는 특식을 준비하라 전해라.”
특식이란 말에 눈을 반짝이는 리벨을 보면서 시스테인이 말을 덧붙였다.
“리벨이 원하신다고.”
“예.”
그 말에 소리 없이 하인이 물러갔다. 리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니, 제가 원한다는 말은 왜…….”
그걸 굳이 왜 덧붙여요? 리벨은 얼굴에 손부채질을 해 댔다.
하지만 곧, 시스테인이 왜 굳이 그 말을 덧붙였는지 알게 되었다.
* * *
디란타 별저의 부엌.
“대공비 전하께서 특식을 원하신다고?”
시스테인의 명령을 전달받은 요리사는 펠이었다.
요리사 펠.
그는 시스테인이 관리하는 제도기사단의 식단을 관리하는 디란타령의 전속 요리사이자, 리벨에게 한동안 밥차(?)를 가져다준 인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 입 한 입 식사를 할 때마다 얼굴이며 말이며 리액션이 남달랐던 안주인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대공비 전하께서 직! 접!”
―쾅!
그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자고로 요리사란 식사를 준비한 후, 식당에서 드시는 주인님들을 보며 부족한 점은 없었는지 체크하는 것이 그 본분이다.
그런데!
‘식당에는 아무도 들이지 마라.’
디란타에 안주인이 들어온 이후. 가주님의 명령 때문에 그는 식당에 좀처럼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당연히 리벨의 그 풍성한 리액션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것에 말라비틀어져 가던 요즘이었다.
그런데, 대공비 전하께서 직접! 직접!
“이 나를 원하신단 말인가!”
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혼자 불타오르는 그의 뒤에서 그의 제자들이 작게 말했다.
“그, 스승님 말고 스승님 요리를 원하시는 것 같은데…….”
“그게 그거지!”
펠의 어깨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제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을 마다하는 요리사가 세상에 어디에 있을까?
그것도 그는 아무리 맛있는 요리를 내놓아도 무표정하기만 한 주인 아래에서 십수 년을 있었던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런 주인과 함께 기사단에 출퇴근하면서 그의 식사를 전담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그의 자신감은 날이 갈수록 하락하고 있었다.
‘오늘 음식은 조금 어떠신지요?’
그렇게 물으면, 시스테인은 매번 무표정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먹을 만하군.’
먹을 만한 게 끝입니까? 예???
그나마 맛있다고 반응해 주는 기사들이 아니었더라면, 제 실력에 의심을 가지게 됐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그분이 오신다!
음식 하나하나마다 반짝이는 시선을 주시는 분!
한 입 드실 때마다 행복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시는 분!
그분께서 오늘 직접! 만찬을 원하신다고 했다!
“이리 좀 와 봐라.”
펠이 제자들에게 손짓했다.
“예.”
긴장한 제자들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 제자들에게 펠이 뜬금없이 말했다.
“내 어깨 좀 주물러 봐라.”
“예, 예?”
좀처럼 제자들에게 잡스러운 일은 시키지 않던 그였다.
‘네가 요리하러 왔지, 잡일 하러 온 줄 알아!’
그렇게 소리를 질러 가면서.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웬일이시지?
어깨를 주물러 드린다고 해도 마다했던 스승님이었다.
제자들이 펠의 어깨를 한쪽씩 잡았다.
“크흠!”
제자들이 있는 힘껏 그의 단단히 뭉친 어깨를 풀어줄 때였다. 목을 가다듬은 요리사 펠이 말했다.
“오늘 요리에는, 이놈의 ‘혼’을 담는다.”
비장한 목소리가 부엌을 울렸다. 그 목소리에 제자들이 멈칫했다.
“예?”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스승님, 항상 요리에는 혼을 담아야 한다고…….”
“예끼!”
펠이 말을 꺼낸 제자에게 호통을 쳤다.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요리를 만들어야 한단 말이다!”
그 말에 제자들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그럼 지금까지 요리에 담았던 혼은 가짜였습니까?
어쩐지 음식 하나 할 때마다 혼을 담으면 하나뿐인 내 영혼은 어디로 가나 의심스럽던 참이었다.
하지만 펠은 제자들의 의구심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오늘이야말로 혼을 담아 요리한다! 우오오오오오!”
힘차게 기합을 넣은 펠이 야심찬 요리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저녁에, 리벨 앞에 펼쳐졌다.
* * *
자고로 특식이라고 하면…….
맨날 밥 먹다가 어쩌다 치킨.
거기에 맥주 좀 곁들이면 금상첨화지.
아니면 피자랑 맥주도 좋아!
물론 이 동네 피자는 코리아 로컬라이징이 안 돼서 그런지 좀 느끼했다.
당연히 치킨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나름 맛있는 요리도 있고, 뭐 나쁘지 않지.
근데 특식이면 뭘까?
설마 리엔 황태후 폐하나 드실 것 같은 무지막지하게 비싼 요리 재료를 쓰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으로 식당에 무심코 들어선 리벨은 순진했던(?) 자신을 탓해야 했다.
“헉.”
그녀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일단 저기 산처럼 쌓여 있는 건 치즈였다. 빵인 줄 알았는데 단면을 보니 속이 꽉 찬 치즈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긴 병에는 와인이 담겨 있었다.
빵을 찍어 먹을 소스는 종류별로 늘어져 있었고, 새하얀 빵은 보기만 해도 구름처럼 폭신해 보였다.
게다가 그 옆에! 그 옆에는 살이 통통하게 오른 게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해산물이잖아!
해! 산! 물!
물론 바다 음식만 있는 건 아니었다.
평소보다 두 배는 커진 것 같은 테이블에는 육해공을 아우르는 음식들이 온통 맛있는 향기를 뿜으며 늘어져 있었다.
리벨의 시선이 테이블 중앙에 있는 커다란 찜닭 요리에 머물렀다.
뭔 닭이 저렇게 커????
살아생전 문지방 좀 부쉈을 것 같은 우람한 풍채의 닭은 녹빛 야채 가루가 섞인 향신료에 덮여 있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것은 물론이었다.
게다가 그 옆의 랍스타는 이미 분해 작업이 끝났는지, 옆에 식기구를 든 요리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금가루가 뿌려진 버섯 요리부터 스테이크까지 리벨의 시선을 빼앗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게…… 다 뭐예요……?”
리벨이 단언컨대, 저번에 열었던 대공가의 연회에서도 이보다 더 화려한 만찬은 없었다.
“황가에서도 이렇겐 안 먹겠어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저택의 사용인들이 다 와서 먹어도 못 먹을 것 같은 뷔페였다.
“세상에.”
리벨은 엄청나게 커다란 생선 요리가 찜닭 바로 아래에 차려져 있다는 걸 이제야 발견했다.
그만큼 화려한 테이블이었다. 눈 돌아가겠어!
“이거…… 우리 둘이 먹는 거 아니죠?”
그 말에 시스테인은 리벨을 가볍게 에스코트해 식당 안쪽으로 향했다.
“맞습니다.”
뭐가요? 둘이 먹는 게? 리벨이 입을 뻐끔거렸다.
“헐.”
지구야, 아니, 환경아 미안해!
“이걸 어떻게 다 먹어요?”
완전 사치의 끝이잖아!
물론 ‘그’ 결혼식장에서 그런 결혼식을 해 놓고 할 말은 아니지만, 시스테인답지 않은 식사였다.
그가 돈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좀처럼 이런 화려한 것들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시스?”
진심이세요?
돌아보니 시스테인은 그녀를 위해 의자를 빼 주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시스테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진지하기 짝이 없는 저 표정은 정말 진심이었다.
사치란 건 모르는 것 같았는데, 그냥 사치를 하기 귀찮아서가 아니었을까?
―촤르륵!
그런 그녀의 앞에 다양한 식기가 놓였다.
고기용, 생선용 칼부터 온갖 포크와 스푼까지. 7개의 식기는 눈이 돌아갈 것 같았다.
이 순서로 놓인 식기라면 수도 중앙 사교계 식사 예절에 따라서 먹어야 하는데.
“으으음……!”
리벨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리벨 이벨라가 되어 잠입 취재할 때 가장 어려워했던 게 바로 이 식사 예절이었다.
그녀가 눈을 부릅뜰 때였다.
―탁.
시스테인이 먼저 스푼을 들었다.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이건 내 스푼인데?
“시스는요?”
그 말에 시스테인은 가볍게 답했다.
“시중을 들면서 먹을 겁니다.”
시중? 누구의? 리벨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멀리서 지켜보는 요리사와, 몇몇 요리 앞에 서 있는 요리사들을 제하면 테이블에는 시스테인과 자신뿐이었다.
“……시스가요?”
리벨이 되묻자 시스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직접 시중들 겁니다.”
혼자 드시기엔 번거롭지 않습니까.
바로 옆에 앉은 그가 속삭여 왔다.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시스테인의 손이 그녀의 다리 위에 냅킨을 손수 깔아 주었다.
이 나라에서 세 번째로 귀한 사람에게 식사 시중을 직접 받는 기분은……
“……저 고기 맛있을까요?”
끝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