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이걸 다 먹어요?”
리벨 앞에 놓인 접시에는 아주 조금씩 음식이 담겼다.
그녀가 아까 시선을 주었던 음식들을 귀신같이 알아챈 시스테인이 조금씩 덜어 온 것이었다.
“조금씩만 드시고, 남기세요.”
시스테인이 답했다.
리벨은 옆으로 굴러도 다섯 바퀴는 굴러야 할 것 같은 식사용 테이블에 쫙 늘어놓아진 음식들을 돌아보았다.
그럼 남는 건?
리벨이 눈을 깜박였다.
99%는 남을 텐데? 아까워서 어떡해?
눈앞에 있는 접시는 40개부터 세는 것을 관두었다.
이것도 요리 일부만 나와 있는 것이라고 하니, 지금쯤 저 뒤의 거대한 부엌은 아마 난리가 나 있을 것이다.
리벨이 생선구이를 콕 집어 먹을 때였다.
어느새 근처로 다가온 요리사가 입을 열었다.
“지금 드시는 요리는 마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남부식 레틀 생선 요리에 소스를 곁들여 금가루를 뿌린 문어 구이, 그리고…….”
설명은 듣기만 해도 돈이 뚝뚝 떨어지는 설명을 듣는 사이, 리벨은 생선 요리를 먹다 말고 굳어 버렸다.
입에 넣었는데? 분명 넣었는데?
짠! 없어졌습니다!
“와…….”
리벨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야말로 입에서 사르르 녹았다.
대박이다!
“완전…… 완전 맛있어요!”
리벨은 방금 먹은 것과 같은 생선 요리를 썰어 시스테인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 모습을 본 요리사가 눈짓하자, 눈치 좋은 하인들이 소리 없이 따라와 레틀 생선 요리를 그들 앞에 옮겨 놓았다.
그 사이 시스테인은 요리사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아무리 이게 고급 요리라고 해도, 특별한 것은 아니다.
분명 특식을 준비하라고 했을 텐데. 요리사에게 눈총을 준 그가 리벨에게 음식을 받아먹은 순간이었다.
“?”
그가 멈칫했다.
그는 요리사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눈총 줄 필요가 없었다.
리벨의 말대로였다. 맛있다.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대체 평소와 같은 요리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몰라도 그랬다.
“어때요? 맛있죠!”
리벨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인 시스테인이 식기를 집었다.
―탁.
생선 요리를 직접 썰어 입 안에 넣은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
평소 먹던 맛이었다. 아까와는 달랐다.
아까 먹은 게 이게 아닌가?
하지만 리벨이 준 음식은 이게 맞는 것 같았다. 그는 리벨의 서툰 칼자국이 그대로 나 있는 생선 살을 분명히 기억했다.
“왜요? 맛이 이상해요?”
리벨이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말했다.
“소스를 조금만 찍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칼을 든 리벨이 생선 요리에 칼을 가져갔다.
시스테인이 썰어 냈던 곳 바로 옆에 그보다는 다소 서툰 칼자국이 남았다.
다시 요리를 썰어 낸 리벨이 소스를 듬뿍 찍어 그의 입에 쏙 넣어 주었다.
“……!”
이번에는 아까와 같은 맛이었다. 입 안에 닿자마자 녹아내리는 듯한 맛.
시스테인이 멈칫했다.
이건 소스 때문이 아니라…….
“이것도, 이것도 먹어 봐요! 문어 다리가 뭐 이렇게 주먹만 해?”
문어 스테이크야, 뭐야? 감탄하며 식사하는 리벨에게서 시스테인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
그러다가 소리 없이 웃어 버렸다.
하긴, 나를 바꾸고 수많은 것을 바꾼 마법사 아닌 마법사인 그녀가, 음식의 맛 하나 바꾸지 못할 리가.
“이거 먹어…… 봐……요……?”
문어를 썰어서 그의 입에 들이대던 리벨은 말하다 말고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빛나는 얼굴로 사람을 쳐다봐?
“맛있죠?”
혹시 너무 맛있어서?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시스테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문어 요리를 받아먹은 그가, 아까와 같이 입 안에서 살살 녹는 음식을 음미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습니다.”
“그쵸!”
신난 리벨이 다음 음식을 탐내는 사이, 시스테인이 요리사 펠을 돌아보았다.
“고생했군.”
그러고는 식사에 집중했다.
“예, 예?”
요리사 펠이 칭찬에 눈을 동전만 하게 뜬 건 그가 알 바가 아니었다.
십수 년을 이 저택에서 요리했지만, 이런 칭찬을 들은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스, 스승님!”
제자들이 뒤로 넘어가려는 펠을 붙잡는 사이, 시스테인과 리벨은 둘만의 시간에 빠졌다.
“천천히 즐기세요. 음식은 식지 않도록 저들이 계속해서 내올 테니.”
시스테인은 음료수 한 잔을 리벨의 손에 들려 주며 말했다.
마침 피처럼 붉은색의 과즙으로 만들어진 음료수였다.
“이거…… 술은 아니죠?”
그날 이후 술은 제가 조심하기로 했답니다, 넵.
죄 많은 리벨은 슬그머니 긴 잔의 향을 맡아 보았다.
알코올 향은 나지 않는데.
“예, 주스입니다.”
시스테인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리벨은 주스를 입에 댔다.
달콤한 향이 입 안으로 확 퍼졌다. 혀 위에 오랫동안 남지 않는, 진득하지 않으면서도 상쾌한 달콤함이었다.
시스테인은 그런 그녀에게 말했다.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귀한 피를 주셨으니, 이건 아주 조그만 대가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부담 없이 즐기세요.
그렇게 말하는 시스테인을 리벨이 슬쩍 돌아보았다.
맛있는 거 달라고 하긴 했는데…… 이렇게까지?
리벨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붕대로 감은 자국이 보였다.
이번엔 저번보다 피를 많이 내야 해서 전보다 좀 더 상처가 컸지만, 시스테인이 마력으로 피를 빠르게 뽑아낸 후 상처를 손수 치료해 준 덕에 많이 아프진 않았다.
붕대를 이렇게 감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설마 이거 때문에 직접 식사 시중을 들겠다고 한 건가?
리벨은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테이블을 다시 보았다.
일어서지 않으면 테이블 끝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테이블은 거대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이건 마치…… 약간의 한풀이를 한 느낌?
그녀는 불쑥 입을 열었다.
“어릴 때 꿈이 있었거든요.”
시스테인은 그런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리벨이 허공에 네모를 그려 보였다.
“레스토랑 가서 메뉴판 보면서,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하는 게 꿈이었어요.”
헤헤 웃으면서 시스테인을 보다가, 리벨은 아차 했다.
그게 이 세계에서의 꿈은 아니었지, 참.
하지만 여기서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벨라 자작 영애가 되고 나서 이벨라 자작, 그놈의 도박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한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아직도 도박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런 호화로운 밥상머리에서 생각하기에는 너무 밥맛 떨어지는 생각이었다.
살짝 고개를 흔든 리벨이 말을 이었다.
“소원 이룬 기분이에요.”
리벨이 환하게 웃었다.
새 접시를 들고 일어난 리벨은 테이블을 직접 돌아보았다.
자세히 가까이에서 보니 그야말로 온갖 음식이 다 있었다.
요리사는 맛뿐만 아니라 모양까지 뽐내는 걸 잊지 않았다.
“배가 있어요!”
금방이라도 바다에 뜰 것 같은 배 모양으로 보이는 커다란 빵 안에는 치즈로 감싸인 파스타가 들어 있었다.
이것도! 저것도!
조금씩 집어 먹다 보니 배불러 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너무 일찍 배부른 게 한이네요.”
이 순간을 위해서 조금씩 먹는 양을 늘려 왔어야 했는데……. 리벨은 한탄스러운 얼굴로 테이블을 살폈다.
예상대로 음식의 대부분이 남아 버렸다.
“디저트를 내오겠습니다.”
그러자 요리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리벨은 그 말에 널브러져 있던 몸을 바로 앉혔다.
디저트!
“역시 디저트 배랑 음식 배는 따로지!”
그렇게 뇌까리는 말에 시스테인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당연히 방금 들은 말은 그에게 금시초문이었다.
“디저트가 따로 소화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그는 리벨이 평소보다 충분히 많이 먹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시기에 함께했을 뿐.
그런데 여기서 더 드시겠다고?
저 작은 몸 어디에 그 많은 음식이 들어갔단 말인가? 게다가 디저트까지 먹는다고?
“에이.”
리벨은 눈을 가늘게 떴다. 다소 들뜬 그녀는 그를 흘겨보았다.
이런 낭만도 모르는 사람 같으니!
그녀는 시스테인에게 살짝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저 아까 잔뜩 먹는 거 봤죠?”
“예.”
그건 지켜보지 않았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옆에 접시가 일곱 개나 쌓여 있었으니까.
“근데 보세요.”
리벨이 작게 속삭였다. 무서운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디저트 나오면, 내가 다- 먹을 거예요.”
시스테인이 멈칫했다.
“무리해서 드실 필요는―”
“전혀 무리하는 거 아니니까, 잘 보세요.”
디저트 배가 따로 있다는 걸 내가 눈앞에서 증명해 주지!
리벨이 스푼을 든 순간이었다.
“과일주스를 얼린 것을 빠르게 갈아 온 남부식 디저트입니다.”
리벨 앞으로 익숙한 비주얼의 간식이 튀어나왔다.
길쭉한 막대 과자와 레몬 등으로 데코되어 있는 것만 빼면 익숙하기 그지없는 디저트였다.
슬러시잖아!
“잘 먹을게.”
화사하게 웃은 리벨이 오렌지 맛 슬러시를 한 숟가락 입에 넣어 보았다.
역시 사르르 녹았다.
“시스도 먹어 봐요!”
시스테인은 그녀를 보느라 거의 식사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구름 위를 걷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식사보다는 자꾸 그녀에게 시선이 갔다. 행복하게 웃는 리벨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식당에서 떠나기가 싫은데 어떡하죠?”
“매일 이런 식탁을 차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시스테인은 간단하게 답했다.
그 말에 요리사 펠은 기쁜 얼굴을 감추느라 애를 썼다.
이렇게 마음껏 식재료를 써서 실력을 뽐내는 것도 요리사로서 영광이니까.
리벨은 그 말에 요리사를 돌아보았다.
매일 이렇게 차렸다가 과로로 실려 가는 거 아냐?
그리고 음식에 정신이 팔려서 몰랐던, 익숙한 얼굴의 요리사를 발견했다.
“그, 그 기사단 요리사?”
“가문 전속 요리사이기도 합니다.”
시스테인이 말을 받았다. 하긴 그렇다고 했던 것 같다.
어쩐지, 저택 와서 음식이 죄다 맛있더라니!
리벨이 환하게 웃었다.
“직접 요리하는 줄 알면 좀 더 맛있게 먹었을 텐데. 매일 정말 잘 먹고 있어.”
그녀가 펠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펠은 그 미소에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감, 감사합니다.”
“보통 귀족가에선 먹는 거 나와서 보지 않아? 왜 지금까진 없었어?”
리벨은 디저트를 먹으며 물었다.
비록 이벨라 자작가에서는 사용인이 없었으니 구경 나올(?) 요리사도 당연히 없었지만, 디란타 대공저는 그게 아니지 않은가?
그 말에 펠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
가주님께서 나오지 말라고 하셨는데요.
……라고 말하려던 입은 본능적으로 다물어졌다.
시스테인의 시선을 받은 후였다.
여여여기서 진실을 불면 죽는다!
“앞으로는 나와 있겠습니다.”
펠이 고개를 숙였다.
이건 괜찮죠?
슬그머니 가주님 눈치를 보니 불편해하시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진 나오지 말라고 하신 거지?
몰아치는 폭풍처럼 바뀌는 가주님의 머릿속을 짐작할 수 있는 자는, 적어도 이 저택 안에는 없을 것이다.
아, 마님 딱 한 분 빼고.
* * *
그렇게 행복한 식사시간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감찰기사단에게서 소식이 왔다.
그들이 전한 소식은 두 가지였다.
리벨의 피로 게이트를 완전히 지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귀족가가 아닌 다른 곳으로 연결된 게이트가 있었다는 것.
그곳에, 기이한 뱀 문양이 그려진 거대한 지하 석조 구조물이 있었다는 것.
그 말에 리벨과 시스테인은 그 구조물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챘다.
“마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