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마물에, 마신전에, 필레 공작과 귀족들의 기사들까지.”
시스테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감찰기사단의 선에서 일망타진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컸다.
게다가 제국 전체의 안전을 위협하는 건이었다.
모든 정보를 정리해 본 시스테인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 앞에 그와 같은 결론을 낸 리벨이 섰다.
“감찰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아무리 반란 세력 정리하는 게 감찰기사단 일이라지만 이건 너무 상대가 막강했다.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벨이 손을 펴 보였다.
“무엇보다 게이트가 문제예요. 정말 시스 말대로 디란타령에 마물이 나오는 커다란 게이트가 있고, 거기서 마물이 넘어오고 있다면…….”
리벨이 집무실 테이블의 지도를 툭툭 두드리면서 말했다.
“지금 마물들을 막는다고 해도 또 그 마물들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날지도 모르고요.”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굳이 아직까지는 잘 관리되고 있던 디란타 대공령의 큰 게이트를 언급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그의 시선이 붕대로 감긴 리벨의 손끝에 닿은 순간이었다.
그 손이 테이블을 탕! 짚었다.
“없애요.”
또렷한 목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시스테인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 게이트는 아스테아령에 있던 게이트와는 규모가 차원이 다른 게이트입니다. 얼마나 많은 피가 필요할지 상상도 가지 않습니다.”
리벨은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생각보다 피는 별로 많이 안 들었잖아요.”
리벨이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이번에 기사들이 가져간 건 고작 새끼손가락 두 마디만 한 병이었다.
문제의 게이트가 훨씬 크다고 해도 생각보다 많은 피를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피 내는 게 안 무서운 건 아니었지만.
“…….”
리벨은 상처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인류 평화에 기여하겠답시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적극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피 조금으로 마물이 튀어나오는 게이트를 막고, 반역도 막고, 시스테인이 가족들과 사이도 풀 수 있다면?
피 정도는 내어 줄 수 있었다.
리벨의 결연한 얼굴을 보고는, 시스테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 신부가 말리기 어려운 결심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게이트는 디란타령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의 침착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피가 얼마나 드는지 모른다는 건 다시 말해, 리벨과 제가 함께 그곳까지 가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그렇게 되나?
하긴 피 나름 담아 간다고 담아 갔는데 부족하면?
아니면 마물들하고 싸우는 사이에 피 담은 병이 박살이라도 나면?
망했어요 삼중창이 머릿속에 울리는 듯했다.
리벨의 입이 일자로 굳게 다물어졌다.
“그렇겠네요.”
같이 가는 게 안 무섭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위험한 곳 한가운데에 그를 혼자 던져 넣는 것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도 갈게요.”
방해되지 않도록 힘써야 하겠지만.
리벨이 눈을 반짝였다. 그녀가 붕대를 감은 손끝을 들어 보였다.
“이걸로 많은 게 변할 수 있다면요.”
원래 변화를 위해서는 좀 더 힘을 내야 하는 법이다.
최대한의 힘을 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숨을 크게 들이키고 한 걸음 더 내뻗어야 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운동할 때, 아무리 근육이 땅기고 아파도 한 번만 더, 한 발짝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자신의 한계를 늘려 나가는 것처럼.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잖아요.”
리벨의 목소리가 울렸다.
“…….”
시스테인은 그 말에 가만히 그녀의 자줏빛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에 별다른 의도는 담기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이, 마치 과거의 자신을 찌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다가와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면, 영원히 감정을 억누른 채 차가운 방 안에 갇혀 있었을 자신을.
“위험해도, 해요. 이미 저들은 준비가 끝났을지도 모르잖아요. 시간도 없어요.”
수가 많아진 마물들이 게이트를 통해서 제국을 침략하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제국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마물들이 대륙을 뒤덮었다는 백 년 전으로 돌아갈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무리 필레 공작이 마물을 조종할 방법을 만들어 주었다고 해도, 사람 일이 계획대로만 되겠는가?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이 갈등하는 순간이었다.
“전하!”
기사의 목소리와 뜀박질 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쾅!
노크도 없이 문으로 밀고 들어온 감찰기사는, 두 사람이 눈살을 찌푸릴 틈도 없이 보고했다.
“황성으로 잠입한 수상한 자가 붙잡혔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황성으로?
느낌이 안 좋았다. 리벨이 살짝 입을 벌린 순간이었다.
“그자의 팔에 뱀 문양이 있었다고 합니다.”
“……!”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저거, 황성에 게이트 만들러 간 거 아니야?
아니면 이미 만들었거나?
“……시간이 없어요, 시스.”
리벨은 시스테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황성에까지 손을 뻗고 있다면 얼마 안 있어 저들의 계획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황성은 저들의 최종 목표이자, 가장 경계가 삼엄한 곳이니까.
그런 곳을 노린다는 건 적어도 다른 곳의 준비는 마쳐 간다는 뜻이리라.
“이건 감찰기사단 병력만으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상의 병력을 써야 한다면, 다른 친(親)황가 세력의 기사들을 차출하는 것도 모자라 결국 황성의 기사들을 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빠지면 황성의 안전이 불안정해지고, 그건 바로 필레 공작이 바라는 것일 터였다.
“당장, 폐하께 말씀드리러 가요.”
리벨이 말했다.
“그건 감찰기사단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시스테인은 곧바로 말을 받았다. 그가 기사에게 손짓했다. 입궁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리벨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감찰기사단장으로서 반역자에 대해 알아냈다고 보고할 생각인 거죠?”
“예.”
그게 제 일이니까.
하지만 리벨은 그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럼 너무 늦어요.”
감찰기사단에서 반역자에 대한 정보를 황가에 제보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시스테인을 신뢰하지 않는 카리스는 분명히 제 인력을 통해 다시 한번 진실을 확인하려 할 것이다.
언제나 그는 그랬으니까.
그러는 사이에 필레 공작 쪽에서 계획을 시작하기라도 한다면?
제국이 엉망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리벨은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그러지 말고, 동생으로서 가요.”
“예?”
멈칫한 시스테인에게, 리벨의 강단 있는 목소리가 닿았다.
“황성의 가족들을 걱정하고 있잖아요.”
그랬기에 시스테인은 제 발로 궁을 나왔고, 디란타령에도 가지 못하고 수도 근처인 디란타 별저에서 그들을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억눌러 가면서.
리벨이 그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가서, 이 기회에 시스가 반역을 할 이유도 생각도 없다는 걸 밝혀요. 증거들과 함께. 그리고,”
그녀의 또렷한 목소리가 울렸다.
“사과해요.”
어린 시절에 하지 못했던 사과.
당신과 카리스 사이에 그어진 금을 지울 때예요.
리벨이 속삭였다.
* * *
「난 재능 있는 놈들이 싫어. 하지만 너는 괜찮아.」
꿈속의 목소리는 늘 울림이 있다.
시스테인이 생각했다.
그렇게 꿈 안에 들어선 그의 앞에는 어린 시절의 카리스가 있었다.
「왜?」
그의 말에 답하는 시스테인의 목소리 역시 어렸다.
「넌 그래도, 내 목숨을 노리진 않잖아.」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암살 시도를 당해 왔던 카리스가 유일하게 믿는 사람.
그게 시스테인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시스테인과 카리스가 형제로서 있었던 마지막 날이었다.
그 사실을 시스테인이 깨달은 순간.
―화악!
주변의 풍경이 확 바뀌었다.
멀쩡했던 카리스의 옷이 순식간에 피와 흙먼지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주번은 폐허로 무너져 내렸다.
그 싸늘한 날의 바람이 선명한 감각으로 몸을 감싸 왔다.
제 볼을 때리는 흙먼지는, 시스테인 제 손으로 만든 것이었다.
「……괴물.」
그렇게 말하는 카리스의 일그러진 표정도, 그가 만든 것이었다.
어린 시스테인은 그 말을 듣고 쓰러졌다.
제대로 사과하지도 못한 채 의식을 잃었다.
그 후로 카리스와 시스테인은 제대로 마주한 적이 별로 없었다.
카리스가 피했기 때문도 있지만 시스테인 자신이 카리스를 먼저 피했다.
다시 그를 해칠까 두려워서.
시스테인은 스스로를 격리했다.
―끼이익…….
다음 순간, 그는 환한 복도에 서 있었다.
어디서 들어오는지 모를, 그림자 하나 지지 않은 새하얀 복도에서 그는 문 하나를 열었다.
음산한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안에는 빛 한 점 들지 못했다.
마치 다른 세상처럼, 물감으로 칠해진 것처럼 그 안에는 복도의 환한 빛이 한 점도 들지 못했다.
「…….」
고통스러운 공간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이 정답이란 걸 알기에, 어린 시스테인은 그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족도, 가지고 있던 행복도 모두 빛나는 황성의 복도에 내려놓은 채.
그건 어린 시스테인이 가족의 옆에 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탁.
발을 내딛자 방 안의 어둠은 익숙하게 그를 감쌌다.
아주 오랫동안 있었던 것처럼 익숙한 방의 기운이 그를 감쌌다.
그가 마저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이었다.
“시스.”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속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분명한 현실감을 가진 목소리는 빛의 복도 끝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시스테인이 그쪽을 돌아보았다.
―파앗!
그 순간 악몽은 깨져 나갔다.
“……!”
눈을 뜬 그의 앞에는 리벨이 있었다.
붉은 시야 가운데에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제 어깨를 흔들고 있는 게 보였다.
“시스!”
다시 엉망이 된 침실에서, 리벨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리벨의 손이 그의 눈을 덮어 주었다.
“괜찮아요.”
무엇이 괜찮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시스테인은 날뛰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뭐든 괜찮아요.”
무엇을 봤어도 다 꿈이에요. 리벨이 속삭였다.
그제야 붉어진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오늘은 무서운 꿈 꿨어요?”
리벨이 물었다. 그녀는 시스테인이 깨기 전까지, 몸을 파르르 떨고 있는 걸 분명히 보았다.
저번과는 달랐다. 지난번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마력이었다면, 이번에는 서서히 마력이 꺼져 가는 것 같았다.
마력이 튀는 것도 잠깐이었다.
점점 마력이 가라앉아 가는 게 오히려 더 무서워서, 리벨은 그를 깨웠다.
그리고 그건 시스테인에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
시스테인이 리벨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한번 악몽으로 걸어 들어가려던 저를 이끌어 준 사람을.
“가만히 있으면 변하는 게 없다고 했죠, 리벨.”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그녀에게 시스테인이 고개를 마주 끄덕여 보였다.
결심이 섰다.
그녀가 옆에 있다면, 다시는 악몽을 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이 기회였다. 변화를 만들 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