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폐하, 알현 요청이 있습니다.”
다음 날, 카리스는 흔하다면 흔한 요청을 받았다.
늘 있는 시시한 것들의 알현 요청이라면 그냥 아프다고 할 셈이었다.
그가 파리 쫓듯 손짓했다.
“얼토당토않은 아부라도 하려는 놈들이라면 적당히 쫓아내.”
세상에는 그보다 재미있는 일들이 훨씬 많았으니까.
―탁.
그는 복잡한 정무를 잠시 미뤄 둔 채, 애독하는 신문을 펼쳐 들었다.
[블랙스트리트]
펼쳐진 신문에는 온갖 자극적인 기사들이 쓰여 있었다.
[레밀라 부인, 최악의 스캔들로 초토화된 서부 사교계…… ‘충격’]
[대낮에 간도 크지, 지나가던 귀부인이 평민 아이에게 손을 뻗은 까닭은?]
블랙스트리트는 막상 읽어 보면 별거 아닌 일을 별것처럼 꾸미는 기묘한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카리스는 그 기묘한 재주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어디 볼까.”
보나 마나 귀부인이 손을 뻗어서 과자라도 준 거겠지.
그가 신문으로 시선을 내릴 때였다.
“폐하, 이번에는 알현 요청을 검토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온 시종이 속삭였다.
“…….”
카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올려다보는 시종은 황가 소속의 암살자이기도 했다.
다른 황성의 사용인들도 대부분이 카리스가 직접 키워 낸 황가의 암살자들이었다.
그들은 황태후 리엔의 그림자는 물론이고, 감찰기사단과도 당연히 별개의 조직이었다.
황제 카리스가 오직 자신만을 위해 만들어 낸 조직이니까.
황태후 리엔은 그림자를 이끌고 있으니 이들의 존재를 분명히 알고 있을 터였다.
‘많이 컸구나, 내 아들.’
하지만 리엔은 암살자들의 존재를 알고도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인데 그래?”
리엔을 생각하던 카리스는 무심코 암살자의 손에서 알현 요청서를 채어 갔다.
[시스테인 폰 디란타]
그리고 알현 요청서에 쓰인 이름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얼굴에 명백한 불쾌함이 떠올랐다.
“하.”
어릴 때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이렇게 공식적인 경로로 정식 알현 요청을 하는 것은.
그것도 감찰기사단장이 아니라 ‘시스테인 폰 디란타’라는 이름으로.
그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대공가에서 큰 규모의 연회를 여는 것도 모자라서, 이번엔 알현 요청까지 한다고.”
―탁, 탁, 탁…….
그의 손끝이 불쾌함을 담아 책상을 두드려 댔다.
“지난 십수 년간 하지 않았던 일을, 보란 듯이 해내는구나.”
그가 뇌까렸다.
기어오를 때가 됐다는 것처럼 말이야.
내가 너를 가만히 두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사락.
알현 요청서치고는 두툼한 서류철을 넘겨 본 카리스가 멈칫했다.
[필레 공작의 최근 동향]
서류를 보기 시작한 그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표정도 서늘한 것에서 점점 다른 무언가로 바뀌어 갔다.
커피가 식는 줄도 모른 채, 그는 블랙스트리트를 멀리 치워 버렸다.
그리고 시스테인의 보고서를 한참 동안 읽어 내려갔다.
“…….”
눈을 가늘게 뜬 채 서류의 마지막을 보고 있던 그가, 팔짱을 끼었다.
“굳이 알현 요청을 했단 말이지.”
감찰기사단장으로서 할 말보다도, ‘시스테인 폰 디란타’로서 할 말이 있다는 뜻이다.
“오라고 해.”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다른 마음이라도 품은 것처럼 근래 다른 움직임을 보이던 시스테인이, 제 아군이 될 수도 있는 반역자들에 대한 증거를 이렇게나 모아 와서는 할 말이 무엇일지, 그는 아주 궁금했다.
* * *
필레 공작의 반역과 관련된 증거는 이미 시스테인의 알현 요청 문서와 함께 올라왔다.
시스테인이 감찰기사단장이라는 사실은 당연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시스테인이 주기적으로 황제에게 문건을 올린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기에 의심받을 일도 없었다.
물론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필레 공작이 목숨을 걸고 막았겠지만,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시스테인은 자신을 감추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시스테인 폰 디란타’의 알현 요청을 허가한다.]
그리고 하루 후, 황성에서는 자연스럽게 알현 허가가 떨어졌다.
시스테인과 리벨이 입궁한 것은 그다음 날이었다.
화려한 붉은 카펫이 깔린 알현실.
리벨이 언젠가 혼자 와 본 적 있는 곳이었다.
“…….”
카리스는 알현실 문이 열릴 때부터 시스테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쏘아보고 있었다.
그렇게 안 보셔도 의심하고 계신 거 알겠거든요?
오히려 시선을 받는 시스테인은 담담했지만, 그 옆의 리벨이 더 좌불안석에 가시방석이었다.
―쿵.
그러는 그들의 뒤로 거대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관리가 잘된 문답게 아주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조용한 알현실 안에서는 크게 울리는 듯했다.
“?”
그리고 무심코 눈을 감았다 뜬 리벨은 어느 순간, 옆에 못 보던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알아챘다.
아아아니, 언제 들어오셨대?
새까만 옷을 입은 자들은 모두 똑같은 사람을 복사-붙여넣기 한 것처럼 자세가 같았다.
누구지?
새까만 천으로 다 가리고 눈만 내놓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봐도 기사는 아니었다.
리벨이 그들을 보고 조금 주춤했을 때였다.
“아직 네 목을 날릴 생각은 없으니 눈치 볼 필요 없어.”
카리스가 입을 열었다. 리벨이 멈칫했다.
아직이란 건 혹시 언젠가 향후 수일 내에 제 목을 날릴 계획이 있으시다는 거? 아아아니죠?
리벨이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카리스는 시스테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두 사람이 감찰기사단장과 황제가 아니라, 동생 시스테인과 형 카리스로서 마주한 건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카리스는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보내온 건 봤다.”
그 말에 리벨은 아주 살짝 시선을 올려 카리스를 살폈다.
언뜻 보이는 카리스의 얼굴에는 서늘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걸 처리해 달라는 이유 하나로 알현 요청을 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카리스는 어느새 종이 한 장을 들고 흔들고 있었다.
그건 감찰기사단장이 아니라 ‘시스테인 폰 디란타’가 보낸 알현 요청서였다.
시스테인은 줄곧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감찰기사단의 선에서 먼저 처리하고 보고드리기에는 반란 세력의 규모가 큽니다. 하여 먼저 말씀드리고 추가 병력을 지원받고자 알현을 요청하였습니다.”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카리스는 살짝 고개를 들어 보였다.
“그것뿐?”
“…….”
그 말에 시스테인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카리스를 올려다보았다.
형제의 시선이 이렇게 마주한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
리벨은 그사이, 시스테인이 손이 새하얘질 정도로 힘을 꽉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신뢰를 얻고자 찾아왔습니다.”
시스테인의 말이 이어졌다. 저 말을 하려고 저렇게 긴장한 모양이다.
“신뢰?”
카리스의 목소리가 반 박자 늦게 들려왔다. 눈을 가늘게 뜬 그에게 시스테인이 말했다.
“폐하께서 반란의 싹을 자르신 지가 십여 년입니다. 그간 음지에서도 더 어두운 곳에 숨은 자들이 몸집을 불린 결과가 그것입니다.”
시스테인의 시선이 알현요청서 뒤에 있을 서류철에 닿았다 떨어졌다.
카리스 역시 그 서류철을 흘끗 보았다가, 다시 시스테인을 보았다.
“그래, 필레 공작을 필두로 한 반란 세력이라면 어쩌면, 이 황성을 뒤집어엎고 이 자리를 취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카리스는 제가 앉아 있는 황좌의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고는 시스테인을 쏘아보았다.
의심이 더해지면 더해졌지, 덜해지진 않은 얼굴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위협적일 정도로 규모가 큽니다. 그래서 저는 감찰기사단장으로서.”
말을 멈춘 시스테인이, 말을 정정했다.
“시스테인 폰 디란타이자 황제 카리스의 동생으로서 그들을 처단하는 데에 앞장설 것입니다.”
그 말에 카리스의 눈에 흥미가 깃들었다.
“내 뒤를 칠 수도 있는 놈들을 내게 갖다 바침으로써 내 신뢰를 얻어 보겠다?”
시스테인은 그 말에 굳이 답하지 않았다. 긍정의 의미로 살짝 묵례할 뿐이었다.
“…….”
한동안 알현실에 침묵이 흘렀다.
리벨이 보기에 카리스는 의심을 전혀 거두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곧 냉소적인 미소가 그의 얼굴에 덧씌워졌다.
“네가 나를 공격하던 그 날에, 내가 몸을 조금이라도 틀지 못했다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너였을 거다.”
―툭, 툭.
카리스가 팔걸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알현실 안을 울렸다.
“만일 황제가 된 것이 너였다면, 넌 지금처럼 답답하게 살 필요는 없었겠지. 사람 하나 만나는 데에 눈치 볼 필요도 없고, 당연히.”
그가 리벨을 가리켰다.
“결혼하는 데에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고 연회를 열 때도 이것저것 신경 쓸 필요가 없었겠지.”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의자 끝에 걸터앉듯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앉은 카리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요즘 대공 부부의 금실이 아주 좋다고 하던데.”
그 얼음 같던 디란타 대공이 대공비를 따라 연회에까지 참여할 정도로 말이야.
카리스의 담담한 말이 이어졌다.
“마치,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바칠 것 같다더군.”
그렇게 말한 카리스의 얼굴에서 돌연 미소가 사라졌다.
“혹시, 황후의 자리를 가져다 바칠 생각은 안 들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