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어머니?”
카리스가 눈을 가늘게 뜨는 가운데, 리엔 황태후는 거침없이 알현실 중앙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카리스에게 향하는 계단에 가볍게 다리를 꼬고 걸터앉았다.
양옆에 사열해 있는 검은 옷의 남자들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처럼.
리엔이 두 아들과 리벨을 돌아보았다.
“내게도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던데, 끼워 줄 거지, 응?”
그렇게 말하면 눈부시게 웃는 리엔 황태후는, 박수를 짝 쳤다.
그 순간.
―스릉!
―쨍!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검은 옷의 남자들이 일제히 다른 무리와 검을 부딪쳤다.
언제 나타난 건지 모를 자들 중에는 리벨에게 익숙한 얼굴들도 있었다.
“……그림자?”
리벨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황제가 세워 둔 검은 옷의 남자들과 황태후의 그림자들은 검을 맞댄 채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서로 싸울 필요가 없는 아이들인데.”
―톡톡.
리엔은 노크하듯 계단을 두드렸다.
“그만두렴. 나는 너희들에게 내 아들을 해치라는 명을 한 적이 없으니.”
그 말은 그림자들을 향한 것이었다. 그림자들은 그 말에 멈칫했다.
“하지만 주인님, 이들이 먼저 주인님께 살기를―”
“그야 갑자기 나타났으니 놀라지 않았겠어.”
검은 옷차림의 남자들에게 살기를 정면으로 받았는데도 리엔은 여유로웠다.
저 정도는 되어야 나라를 쥐락펴락할 수 있나 보다.
리벨은 제게 온 것도 아니고 시스테인에게 오는 살기마저 소름이 돋았는데, 리엔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탁!
결국 리엔의 말에 그림자들은 먼저 검을 거두었다.
―스르릉!
그러자 검은 옷 무리가 그림자들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카리스는 그 모습을 보다가 리엔을 내려다보았다.
“알현실 밖에서, 다 들으셨어요?”
그 말에 리엔이 옅게 웃었다.
“알현실에 귀가 있는 건 너뿐만이 아니란다.”
“알현실은 황제인 제 공간입니다만.”
“하지만 황가의 일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지.”
그 말에 카리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월권입니다, 어머니.”
“아니.”
하지만 리엔은 손을 펴 보였다.
“네가 내게 황가의 일을 모두 이야기해 주는데도 귀를 심어 두었다면 월권이 되겠지.”
숨 쉴 틈도 없이 모자간에 논쟁이 오갔다.
리엔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게, 쉴 때라도 문 좀 열어 두고 살라니까. 내 아들 얼굴을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잖아.”
순식간에 가벼워진 목소리였다.
카리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뱉었다.
“제게도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습니다.”
이게 갑자기 무슨 모자 싸움이야?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방문을 열어 두느냐 마느냐로 싸우는 수많은 부모와 자식들이 떠올랐던 탓이었다.
여러 사람 모가지 날아갈 스케일만 아니면, 이거 한국에서 많이 본 거 같은데?
“그럼 오늘은 사과하지.”
리엔은 졌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이미 귀에 들어온 건 다시 흘려보낼 수 없으니……, 함께 논할 수밖에 없겠어.”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에 있는 자들이 전부는 아니겠지, 내 아들?”
그녀의 시선은 검은 옷 무리를 향해 있었다.
그녀가 새빨갛게 칠해진 손끝으로 그자들을 가리켰다.
“네가 기른 저 아이들과 내 그림자들이, 이번 일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그 말에 리벨이 멈칫했다.
저 검은 옷 입은 사람들이랑 그림자가요?
눈 부리부리 뜨고 있는데요? 뭣보다 서로 처음 보는 얼굴인데요? 일면식도 없는 것 같은데요?
살벌한 분위기 속에 리엔의 밝은 목소리가 울렸다.
“사이좋게 지내렴.”
그녀가 해사하게 웃었다.
마치 싸운 형제를 화해시키는 어머니 같은 미소였다.
그거…… 먹힐까요? 저 사람들 칼부림 나기 1초 전인데요?
리벨이 눈을 끔뻑였다.
* * *
놀랍게도 리엔의 그 말은 먹혀 들어갔다.
결국 카리스의 명에 의해 검을 거둔 검은 옷 무리는, 그의 뒤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황태후의 그림자들은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그 상태로 회의 아닌 회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사락.
리엔도 시스테인과 리벨이 알현 요청서와 함께 제출했던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흥미로워하는 것 같지만,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니었다.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그 기색을 예리하게 알아챈 카리스가 물었다. 리엔은 가볍게 답했다.
“이 아이들이 뭔가를 쫓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
그 말에 카리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시선이 리벨과 시스테인을 향했다.
“그렇게 정보를 흘리고 다녔다고?”
눈에서 광선 나오시겠어요!
한 차례 긴장이 풀린 리벨은 저도 모르게 양손을 들어 보였다.
“그게.”
그러자 시스테인과 카리스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집중되자 리벨은 입을 벙긋거리다가 말했다.
“아마 필레 공작한테는 안 들켰……을……걸……요?”
리벨이 시스테인을 돌아보았다. 그렇죠?
눈빛으로 묻는 그녀에게 시스테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극비로 처리된 사안입니다.”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은데.”
대화 사이로 리엔이 서류를 탁 덮는 소리가 울렸다.
“내가 취미 생활만 즐기며 놀고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칼.”
그녀가 눈부시게 웃었다.
“아직 필레 공작은 모른다고 확신하지. 만일 믿지 못하겠다면, 음…….”
카리스의 얼굴을 가리키던 그녀의 검지가, 천천히 그를 훑어내렸다.
“이 며칠 동안 네가 입은 속옷 색도 맞힐 수 있단다.”
그 말에 리벨이 입을 떠억 벌렸다.
문 닫고 살 만하네! 그런 거 알아내지 말라고요!
“필요 없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카리스가 얼굴을 구겼다.
황태후 리엔의 그림자가 제국 이곳저곳에 뻗어 있다는 것이야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그의 상상 이상으로 훨씬 빠르고 정교한 정보망이었을 뿐.
“자, 그럼 계획을 좀 세워 볼까. 일단 이 서류에 있는 게이트 말인데.”
상황이 정리된 듯 보이자, 리엔이 서류를 톡톡 두드렸다.
그녀의 시선이 두 아들을 거쳐 리벨을 향했다.
저저저는 왜 돌아보시는지?
눈을 빠르게 깜빡이기 시작하는 리벨에게 리엔이 말했다.
“황성에 게이트가 설치되진 않았어. 하지만 침입자가 황성 내부 수색을 할 시간 정도는 충분했지. 그리고.”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쌍방향 게이트를 설치할 수 있는 자들이 잠깐 사이였다고 해도, 그 정보를 밖으로 빼내지 못할 리도 없지.”
리엔이 바깥을 가리켰다.
“게다가 황성 특성상 많은 자들이 오갈 수밖에 없고, 인간의 생각은 하루에도 서너 번씩 바뀌는 법이지. 언제 누가 와서 게이트를 설치할지는 모른다는 이야기야.”
그렇게 말한 리엔이 턱을 매만졌다. 리벨은 그런 그녀에게 재빨리 말했다.
“게이트는 만들어진다고 해도 제가 없앨 수 있어요.”
일단 황성의 안전은 확보해야 하지 않겠는가?
리벨이 눈을 반짝이며 한 말에, 세 사람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그건 안 됩니다.”
“안 돼.”
“그건 반대야.”
혹시 한 나라 권력의 최고봉에 있는 세 사람에게 동시에 반대를 당해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마치 존재마저 부정당할 것 같은 압박감이었다.
리벨이 슬그머니 어깨를 움츠렸다.
“왜……요……?”
나쁜 건 바로 치우는 게 룰 아닙니까? 혹시 이 동네도 재활용 쓰레기 내놓는 날 정해져 있어요?
리벨이 슬그머니 묻자 시스테인이 입을 열었다.
“저들의 계획이 시작될 때까진,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하니까요.”
“?”
리벨이 그 말에 눈을 깜빡일 때였다. 리엔이 말을 얹었다.
“목표물이 방심하게 하는 건 사냥의 기본이지.”
그 뒷말은 카리스가 받았다.
“축하주를 마실 때 찬물을 끼얹는 것만큼 재미있는 게 없잖아.”
“…….”
말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연달아 들리는 말에 리벨은 입을 벙긋거렸다.
피가 진하긴 진한 모양이었다.
이 사람들 괜히 가족이 아니잖아?
“그럼 황성에 게이트가 설치되게 내버려 둘 생각이세요?”
리벨의 말에 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어떻게 설치되는지도 보고. 이 황성만큼 우리의 눈이 명확하게 자리한 곳도 없으니.”
리엔은 목에 걸친 검은 천을 쓸어 보면서 말했다.
리벨은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게?
황성에 적이 침투했다. 이걸 지금까지 리벨은 우리의 심장부에 적이 침투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저들은 우리 홈그라운드에 겁도 없이 쳐들어온 꼴이 아닌가?
이게 긍정의 힘?
이게 바로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와 물이 반이나 남았네의 차이?
리벨이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리엔이 웃었다.
“그리고 게이트에서 뭐가 나올지도 궁금하지 않니?”
그 말에 리벨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저저저전혀안궁금한데요.”
보나 마나 예의 없게 생긴 마물들이나 나와서 사람 물어뜯으려고 할 거 아니야!
리벨의 목 뒤가 서늘해졌을 때였다.
리엔이 여유롭게 말했다.
“물론 네가 그 모습을 직접 볼 필요는 없지. 그건 마신전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그녀의 말에 리벨이 눈을 깜빡였다.
“마신전에도 그림자가 있나요?”
그림자가 전국구라더니 마신전에도 있었던 거? 그럼 지금까지 마신전의 움직임을 몰랐던 이유가 설명이 안 되는데?
리벨이 머릿속에 물음표를 다발로 띄울 때였다.
카리스는 어깨를 으쓱하다가 웃기 시작했고, 시스테인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짜 말 맞추셨어요?
리벨이 떨떠름하게 세 사람을 보았다.
재밌는 얘기는 같이 합시다!
“그럼 마신전을 저희가 늦게 발견할 일은 없었을 겁니다.”
시스테인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아니, 제 말이 그 말이라니까? 리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그림자도 없는데 게이트에서 뭐가 나올지는 마신전의 누구한테 물어보란 말인가?
리벨이 눈을 재차 깜빡일 때, 리엔이 해사하게 웃었다.
“그건 가장 확실한 질문법으로 물어보면 답을 들을 수 있지.”
가장…… 확실한 질문법? 유도신문 뭐 이런 거? 리벨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가장 확실한 질문법이요?”
그 말에 리엔의 웃음이 짙어졌다.
“내 전문 분야지. 알고 싶니?”
전……문…… 분……야……?
그렇게 말하는 리엔의 눈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리벨은 손을 냅다 내저었다.
“아아아아뇨.”
뭔지 몰라도 살벌한 방법임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