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필레 공작이 입궁을 요청하는 사이,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간 평민들 사이로는 슬금슬금 말이 퍼지고 있었다.
황성에 연기가 날 정도로 난리가 났다는 사실을 늦게 알아차린 자들 덕이었다.
“필레 공작 전하께서 황성 앞에 계시던데?”
“뭐라고?”
“그분께서?”
이야기는 빠르게 퍼져 나갔다.
“역시…… 이 나라에서 제대로 된 귀족이 몇 안 되잖아. 그중 한 분이라지 않소?”
“옳소! 영지민들에게도 잘해 준다고 들었어.”
그리고 급히 남의 집으로 피신한 척 몸을 숨긴 필레 공작의 바람잡이들이 필레 공작의 미담을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분의 영지에 내 평생 사는 것이 소원인데, 이사할 돈이 없어서, 원.”
“어디 출신이기에 그러시오?”
“어디긴, 여기, 제도지. 휴, 이렇게 물가가 올라서야, 원.”
평민들은 그들과 비슷한 차림인 바람잡이의 말을 들으면서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도 이상함을 느꼈다.
‘제도만큼 생활품 물가가 안정적인 곳이 어딨다고?’
뭔가 좀 틀어지긴 했지만, 아무튼 ‘충신 필레 공작이 황성의 위기를 구하러 왔다’는 소문은 제도의 평민들에게 제대로 퍼지고 있었다.
“계획대로 평민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하의 이름도 널리 퍼지고 있고요.”
그런 상황은 필레 공작에게 곧 전해졌다.
필레 공작이 웃음을 감추었다.
“좋아. 그럼 입궁 허가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린다.”
* * *
필레 공작이 ‘황제가 되면 언젠가 내게 망신을 준 황태후 리엔에게 씻을 수 없는 망신을 줄 것이다’ 같은 행복회로를 돌릴 때쯤.
―우웅!
황성 본관 2층의 시종 숙소.
침대가 있던 자리에 있는 게이트가 일렁거리며 사람을 토해 냈다.
그 사람은 당연히 시스테인이었다.
격전은 아니었는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그의 모습은 평소에 단정하기 그지없던 금발이 조금 흐트러져 있을 뿐이었다.
―포옥!
리벨은 그의 옷 어디에도 피 같은 것은 안 묻어났다는 것을 확인하며, 그를 꽉 끌어안았다.
“!”
갑작스런 습격(?)에 놀란 시스테인이 검을 든 손을 뒤로 뺐다.
하마터면 아직도 날이 날카롭게 서 있는 검에 그녀가 베일 뻔했다.
“리벨?”
시야가 회복되기도 전에 덮쳐 오는 자.
평소 같았으면 주저 없이 베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전투의 흥분으로 끓어오른 마력을 순식간에 가라앉혀 주는 안정적인 느낌.
그 느낌에 그의 살기는 금세 풀려 나갔다.
“그러다 다칩니다.”
시스테인이 짧은 한숨 끝에 말했다. 그제야 리벨이 슬그머니 고개를 뒤로 빼고 그를 바라보았다.
자줏빛 눈동자에 퐁당 빠질 것처럼 가까운 거리였다.
“다친 데는 없어요?”
리벨이 물었다. 시스테인이 바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약속, 확실히 지켰습니다.”
어차피 계획상 마물을 완벽하게 막을 필요도 없었고, 고전하는 것처럼 게이트 너머에서도 시간을 다소 끌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애초에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마물은 그의 전투력에 비해 턱없이 적은 수였다.
그러니 다칠 리가 없었다.
“다행이에요.”
리벨이 그를 여전히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그때였다.
감찰기사 한 명이 와다다 달려왔다.
복도 멀리에서 들리는 시스테인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온 것이었다.
“전하, 황성 성벽 밖에 필레 공작의 기사들이…… 와…… 있……?”
감찰기사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누군들 남자인 시종과 끌어안고 있는 제 상관을 보면서 표정 관리를 하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그, 그분은……?”
하지만 감찰기사는 다행히 빠르게 표정을 수습했다.
리벨의 변신 능력에 대해 아는 몇 안 되는 자 중 하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리벨이 남자로 변한 모습을 본 것도 아니라, 당황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감찰기사가 입을 벙긋거리자 리벨은 재빨리 변신을 풀었다.
“나야, 나.”
그녀가 멍하게 풀린 감찰기사의 눈앞에 손을 내저어 보였다.
“시스 바람피운 거 아니야.”
우리 시스 결백해요.
리벨이 두 손을 들어 보이자 감찰기사가 벼락같이 정신을 차렸다.
“귀, 귀환하셨다고 전하겠습니다!”
그러고는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눈을 깜빡이던 리벨이 시스테인을 올려다보았다.
“……오해한 건 아니겠죠?”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이 낮게 웃었다.
“원래 모습을 보이셨으니 괜찮을 겁니다.”
“그래도…….”
감찰기사가 말을 흘리고 다니면 그게 감찰기사겠느냐마는, 리벨은 불안했다.
혹시나 또 소문이 날까 전전긍긍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은 죄가…… 있어서……★
“지치진 않았어요? 곧 다시 싸워야 하잖아요.”
싸늘한 현실을 외면하며 리벨은 그에게 거듭 물었다.
“충분히 쉬고 돌아왔습니다.”
시스테인이 가볍게 답했다.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진동이 울렸다.
―쿠르르릉……!
리벨은 느끼지 못했지만 감이 뛰어난 시스테인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성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성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시스테인의 말에 리벨이 그를 돌아보았다.
“좀 더 쉴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싸우고 온 사람인데. 벌써 성문이 열리면 못 쉬잖아.
리벨이 입을 비죽거릴 때였다.
―쪽.
시스테인이 그 입술에 스치듯 키스했다.
리벨이 멍하니 그를 보는 사이, 시스테인이 그녀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필레 공작의 계획을 아주 정면으로 구겨 줄 차례였다.
* * *
“폐하! 신 아디카 폰 필레, 폐하의 안전을 위해 이 한 몸 바치러 입궁하였사옵니다!”
필레 공작이 외치면서 황성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면서 우왕좌왕하는 황성의 기사들을 보았다.
역시 개판이군.
흡족할 정도로 개판이었다.
웃음을 감춘 그가 근엄한 얼굴로 손짓했다.
“폐하께서 어디에서 위험에 처해 계실지 모른다! 빨리 움직여! 흩어져 찾아라!”
물론 황제 카리스를 지킬 생각은 없었다.
그를 찾으면 그의 목숨을 인질로 잡고 황성의 건물 하나하나를 제압해 나가는 게 목적이었다.
“명을 받듭니다!”
그 계획을 아는 필레 공작의 기사들이 우르르 움직이려는 때였다.
그들에게서 가까운 건물의 테라스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까지 급한 상황은 아닌데.”
“?”
필레 공작은 의아한 얼굴로 테라스를 돌아보았다가 제 눈을 의심했다.
3층의 테라스 난간에 걸터앉아 있는 건 다름 아닌 황제 카리스였다.
―쿠웅…….
필레 공작이 당황하는 사이, 다시 묵직한 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어?”
뒤를 돌아보니 성문은 다시 닫히고 있었다.
물론 마물이 빠져나가지 않게 하려면 성문을 닫는 게 맞았지만, 필레 공작은 어딘가 불길해졌다.
“혹시 내 목을 탐하는 것이냐. 아니면 내 자리를 탐하는 것이냐.”
카리스가 그런 그에게 물었다. 다소 크게 울리는 목소리에 필레 공작이 당황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폐하, 무사하십니까?”
필레 공작은 연기력을 불태워 보았다. 하지만 카리스는 입꼬리만 올려 웃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그들의 검을 가리켰다.
“그럼 싸운 흔적 하나 없는 그 깨끗한 검을 들고 이렇게 바삐 온 이유가 무엇이냐?”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것도 황성이 이리되는 걸 기다렸다는 듯이.”
“……!”
필레 공작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리벨은 카리스의 옆에서, 이번엔 황제의 전속 시녀 차림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관람하기 가장 좋은 곳을 주겠다며 카리스가 직접 부른 자리였다.
그녀를 이곳까지 데려다준 시스테인은 가까운 곳에서 전투 준비 중이었다.
“폐하아아아! 신의 충심을 의심하지 말아 주시옵소서!”
그런 그들 앞에서 필레 공작은 피맺힌 연기를 하고 있었다.
리벨이 작은 소리로 감탄했다.
“생각보다 신중한데요? 안 넘어오는데?”
황성은 누가 봐도 난리가 나 있었고, 황제를 지킬 병력은 주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충신인 척하는 걸 보면 아직 이쪽에 숨겨 둔 카드가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래서 감 좋은 공작은 싫다니까.”
리벨이 뇌까리는 가운데 카리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근엄한 얼굴을 유지한 채 그가 말했다.
“그렇겠지. 이 황성을 제압하는 게 회심의 한 수일 테니.”
그러는 사이 필레 공작은 충신 코스프레에 취해 있었다.
“폐하아아아아!”
그 간곡한 목소리를 들으며 리벨이 물었다.
“그럼 제가 손 좀 쓸까요?”
말하고 보니 무슨 불량배 같은데?
리벨은 잠깐 멈칫했지만 말을 굳이 정정하진 않았다.
카리스는 여전히 근엄한 표정을 유지한 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는 몰라도 재밌는 장치를 해 두었나 보군.”
“장치까진 아니고…….”
리벨은 방 안을 흘끗 돌아보았다.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림자 나인이 고개를 숙였다.
혹시 저렇게 뻗댈까 봐 다~ 계획을 준비해 놨답니다!
리벨은 즐거운 표정을 프로답게 감추었다.
그리고 수십 초 후.
―타다다다다닥!
본관 쪽에서 황성의 기사 한 명이 빠르게 뛰어왔다.
그는 붕대도 감지 못한 피 묻은 기사복을 입은 채였다.
절뚝거리는 걸음과 피가 묻은 검까지 든 채, 기사는 쓰러지듯 카리스를 향해 부복했다.
“!”
필레 공작과 기사들은 그를 보고 멈칫했지만, 리벨은 그 모습에 박수를 칠 뻔했다.
이야, 연기 점수에 분장 점수까지 저쪽은 100, 아니 120점이다!
“폐하! 본관에 마물들이 날뛰고 있습니다! 더 이상 저희가 막을 수가 없습니다! 어서 대피하십시오!”
그렇게 간곡하게 외치는 건 당연히 나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