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필레 공작 80점, 나인 120점으로 총 200점의 인재가 모인 가운데 기사 차림의 나인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상황이 다급합니다, 폐하! 부디!”
필레 공작이 지금까지 했던 연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피 끓는 듯한 저 애절한 목소리!
만점! 크으으으!
리벨이 속으로 감탄할 즈음 때마침 좋은 효과음이 터져 나왔다.
―펑! 와장창!
그건 본관에서 나는 소리였다.
뭔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죄다 박살 나는 소리였다.
뭐야, 뭔 일 있는 거 아니지?
나인을 흘끔 내려다보니 그는 미동도 않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으면 그림자를 보내서 다른 사인이라도 줬을 것이다.
그럼 누가 연기에 취해서 딱 좋은 타이밍에 창문을 깨뜨려 줬다는 소리였다.
크으으, 만점 묻고 더블로 가!
“뭐?”
연기 점수가 준수한 카리스는 본관 쪽을 돌아보았다가 나인을 내려다보았다.
리벨은 그의 시선이 돌아가자마자 씩 웃는 필레 공작을 발견했다.
어휴, 연기할 땐 자고로 어디에든 눈이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법이다.
리벨은 필레 공작의 점수를 80점에서 50점으로 조정했다.
그 순간 필레 공작이 외쳤다.
“각 건물의 안전을 확보하라!”
누가 들으면 상황이 안 좋아진 황성을 위해 병력을 움직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행동은 달랐다.
미리 기사들은 행동을 맞춰 놓고 왔는지, 각 건물로 흩어지는 게 아니라 카리스와 리벨이 있는 건물을 둥글게 감쌌다.
카리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무슨 짓이지?”
그의 질문에 필레 공작이 씩 웃었다.
“보시는 대로입니다, 폐하.”
그의 시선 끝에는 연기가 폴폴 나고 있는 본관이 있었다.
예상대로 본관은 엉망이 됐다.
저기서 나온 마물들은 숨는 데에 특화된 마물들이니, 본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해를 끼치고 있을 것이다.
기사들은 당연히 그걸 상대하다가 죽어 나가고 있을 거고.
그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리벨은 감탄했다.
“이야, 사람이 저렇게 간사하게 웃을 수가 있네.”
아주 작은 중얼거림이라 들을 수 있는 건 카리스뿐이었다.
그때였다.
―끼익…….
카리스가 답해야 할 타이밍에 입을 다물고 있자, 기선 제압을 했다고 생각한 필레 공작 앞에 뜻밖의 재앙이 펼쳐졌다.
“저, 저……!”
그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카리스가 앉아 있는 건물의 문. 굳게 닫혀 있던 그 문틈으로 환한 금발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 사이로 보이는 건 맑은 벽안이었다.
“설마…….”
필레 공작이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황성에는 디란타 대공이 없다고 했는데?
황성에 미리 심어 놓은 자들은 디란타 대공이 일찍 자리를 비웠다고 전했다.
‘디란타 대공령은 몬스터가 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디란타 대공령으로 갔습니다.’
분명히 그렇게 보고받았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있지?
디란타 대공령에서 지금 쏟아져 나오고 있는 마물의 수는, 평소 디란타 대공령에 있던 것의 다섯 배가 넘었다.
그 수를 다 처리하고 여기에 왔을 리가…… 없는데?
제게 보고한 자가 제 부하로 변장한 감찰기사라는 걸 알 리가 없는 필레 공작의 머릿속 계획이 꼬여 버렸다.
“디, 디란타 대공이 어떻게?”
문을 열고 걸어 나온 시스테인은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였다.
날카로운 검날이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건물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그의 시선이 필레 공작을 향했다가, 카리스를 향했다.
“……!”
리벨은 카리스와 아주 가까이에 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시스테인이 이쪽을 돌아보는 순간 카리스가 멈칫하는 것을.
아주 잠깐 푸르게 빛난 눈 때문일지도 몰랐다.
잠깐의 침묵 끝에 시스테인의 시선이 필레 공작에게로 향했다.
“페하께 검을 겨누었다……, 이건 명백한 반역 행위로 해석되는데.”
그 말에 필레 공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디란타 대공령에 갈 때마다 마물의 수가 팍 줄어든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보통은 서너 명의 기사가 뭉쳐야 한 마물을 상대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시스테인의 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래서 저놈을 끌어내려고 디란타 대공령에서 몬스터를 남하시킨 건데!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
하지만 이미 일은 시작됐고 이판사판이었다.
이쪽은 카리스의 목에 검만 겨누면 된다.
저 괴물 같은 시스테인의 목을 따는 게 아니라!
“쳐라! 카리스의 목만 확보하면 된다!”
필레 공작이 외쳤다.
그가 완전히 제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마물들도 모조리 이쪽으로 끌어들여!”
그의 외침이 거듭 울렸다.
리벨은 그를 보며 혀를 찼다.
“그 마물들 이미 다 쓸려 나가고 없을 텐데, 아이고…….”
물론 그녀의 안타까움을 담은 말은 아주 작은 목소리라, 필레 공작에게까지 닿진 않았다.
“와아아아!”
필레 공작의 외침에 기사들이 일제히 문으로 달려들었다.
대범하게도 카리스와 리벨이 있는 건물을 타고 오르려는 자도 있었다.
건물 입구에 있는 시스테인을 어떻게든 피해 가려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쿠콰콰쾅!
시스테인의 검이 가볍게 허공을 쓸어 낸 순간.
마력을 실은 바람이 그 주변의 기사들을 모조리 날려 버렸다.
“으아악!”
놀란 기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물론 비명을 지른 건 그나마 여유 있는 축에 속했다.
검풍을 정면으로 맞은 자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쾅!
연달아 시스테인이 검을 휘두르자 전장이 순식간에 흙먼지로 가득 찼다.
리벨은 그 사이에서, 시스테인의 빛나는 푸른 눈을 본 것 같았다.
“…….”
그리고 카리스 역시 그 모습을 보았다.
떨지 않으려고 해도 저 푸른 눈을 볼 때마다 몸이 경직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저 푸르게 빛나는 눈.
그건 어릴 때 마주했던 생명의 위기를 다시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으니까.
―쿠쾅!
다시 시스테인의 검과 마력이 전장을 박살 내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어릴 때와는 달리 박살 나는 건 필레 공작의 기사들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리스의 눈에는 잘 보였다.
어린 시절과는 달리 정제되어 있는 그의 검끝이.
마치 손톱을 들어 마구잡이로 주변을 할퀴는 짐승처럼 주변을 파괴했던 어린 시절의 시스테인과는 달랐다.
적과 아군을 분명히 구분하는 그 검은 오직 필레 공작의 기사들만을 향하고 있었다.
“…….”
카리스가 저도 모르게 테라스 난간을 짚은 손을 꽉 쥐었다.
* * *
수도로부터 다소 떨어진 어느 지하 공간.
어두침침한 공간을 밝히는 조명은 고작 촛불 다섯 개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 안에 모여 있는 자들은 모두 심각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처음엔 진지했지만 지금은 인상을 구기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들은 모두 냄새나는 주머니 하나씩을 옆구리에 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가 마비되는 것 같습니다.”
그중 한 명이 말했다.
그들 모두는 같은 모양의 검은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등에는 뱀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바로 마신전의 문양이었다.
“견뎌라.”
그리고 그 마신전의 문양이 소매에도 새겨져 있는, 대사제는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그도 코맹맹이 소리였다.
코로 숨을 안 쉰 지 오래였으니까.
그런데도 주머니에서 흘러나오는 이 지독한 냄새는 어떻게든 코 안에 맴도는 듯했다.
아니, 입으로 숨을 쉬는데 냄새가 왜 나냐고!
대 마사제는 체면도 잊고 발광할 뻔했다.
“……시간이 되면 다시 모이면 안 되겠습니까, 대사제님?”
한 사제의 말에 다른 사제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그러길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거대 마도구가 있는 방 안.
그들이 든 주머니는 모두 이 거대 마도구와 반응하여 제국 각지의 마물들을 조종할 열쇠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냄새나는 주머니를 든 채, 더 고약한 냄새가 나는 마도구 옆에 붙어 있어야 했다.
“벌써 두 시간째입니다.”
2시간째. 120분째, 7200초째 말이다!
사제들도 대사제도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분일초가 지옥 같아!
하지만 대사제는 과연 대사제였다. 그는 인내하는 얼굴로 말했다.
“지금 흩어지면 이 안에 찬 마력도 흩어지게 된다. 그럼 계획을 망치게 돼.”
이 마도구 옆에서 주머니를 갖고 모여 있을수록 냄새가…… 아니, 마력이 응축되게 되어 있으니 지금 와서 흩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사제는 애써 근엄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의 주머니에선 색다른 썩은 내가 올라왔다.
동물의 내장이 실시간으로 썩고 있는 건지, 세상의 온갖 괴악한 냄새가 다 이 방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크윽!
대사제야말로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대의를 위한 것!
“조금만 버텨라. 곧 새 세상이 온드우욱.”
근엄하게 말하던 대사제는 결국 헛구역질을 참지 못했다.
“우우욱.”
사제들의 어이없다는 시선이 그를 향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입을 열어 봐야 냄새만 더 들어오니까.
“…….”
침묵 가운데 대사제는 다시 간신히 표정을 회복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필레 공작이 전해 준 계획은, 필레 공작의 병력이 황성을 제압하면 이쪽에서 마물들을 조종해 황가의 잔력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그 후 같이 새 제국을 맞이하는 것이다.
“…….”
대사제의 시선이 방 한구석의 게이트로 향했다.
그들은 황성 제압이 끝나면 이 앞에 있는 게이트로 와서 소식을 전하겠다고 했다.
그럼 이쪽에서는 바로 이 거대한 마도구를 냄새…… 아니, 마력과 반응시켜 제국 전역에 재앙을 불러올 것이었다.
근데!
“……이 새X는 왜 연락이 없어?”
대사제가 씹어 뱉듯 뇌까렸다.
벌써 약속한 시간에서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필레 공작 측에서는 연락은커녕 먼지 한 톨조차 보내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