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크아아아!
인간형 마물이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소리였다.
―쨍!
날카로운 손톱이 시스테인을 향했지만, 그의 주변을 감싼 푸른 마력장을 뚫을 수는 없었다.
―크오오오!
시스테인의 바로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마력장에 부딪힌 마물의 손톱이 부러져 나가고 있었다.
“……!”
시스테인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리고 이내.
그의 검을 타고 들어간 마력이 인간형 마물의 모습을 천천히 무너뜨렸다.
―크르르르!
―……!
인간형 마물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만큼 주변의 마물을 통제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물들은 인간형 마물이 사라지자 눈에 띄게 동요했다.
―크르르!
대장이 있을 땐 인간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껏 날뛰다가, 뒤늦게 전세가 뒤집힌 걸 깨달은 것이다.
그러자 마물들의 태세는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한 부류는 자리를 벗어나 어떻게든 목숨을 보전하려는 부류.
다른 하나는.
“온다!”
나인이 몸을 낮췄다.
리벨과 그림자 쪽으로 순간 수십 마리의 마물이 뛰어들었다.
이쪽의 전력이 약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림자들은 이게 마물들의 마지막 발악이자, 위기라는 걸 깨달았다.
그들이 이를 악물고 검을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그림자와 마물 사이로 시스테인이 뛰어들었다.
―파파파팍!
거친 마력이 튀면서, 근처에 다가왔던 마물들이 마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소멸했다.
“!”
시스테인의 푸른빛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본 그림자들은 순간 긴장했다.
하지만 그건 찰나였다.
그들은 곧 검을 내려 버렸다. 시스테인의 눈을 본 직후였다.
―크아아악!
도망치던 마물들까지 깨끗하게 처리한 시스테인이 리벨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지만, 그 눈에는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이성이 새겨져 있었다.
“시스.”
리벨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순식간에 침묵에 잠긴 주변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
시스테인이 짧게 숨을 터뜨렸다.
마지막 마물들이 리벨 쪽으로 몰려드는 순간.
그는 인간형 마물을 대할 때보다 더 긴장한 것 같았다. 그 짧은 순간 그는 심장이 쥐어짜이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 눈앞이 까마득해질 정도로.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의 이성은 깨끗했다.
적과 아군을 판단할 수 없는 폭주 상태와는 달랐다.
몸은 폭주 상태 이상으로 가벼우면서도, 그의 이성은 확실했다.
내 사람을 지켜야겠다는 생각, 리벨 주변에서 마물을 치워 버려야겠다는 선명한 생각으로 그는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결과, 다친 사람은 없었다.
리벨의 말대로였다.
그는 폭주한 자신의 몸을 제어할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건 이제 폭주가 아니었다.
그의 힘을 제가 다룰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어린 시절처럼 날뛸까 두려워 억눌러 왔던 힘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제가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에게 달려간 리벨이 그를 끌어안았다.
“!”
―챙그랑!
시스테인은 놀라 검을 떨어뜨려 버렸다.
그가 이끄는 두 기사단, 그 어느 곳의 기사라도 그가 검을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면 놀랐을 것이다.
그것도 전장이었던 곳 한가운데에서.
하지만 시스테인은 그만큼 놀랐다.
리벨은 그를 꽉 끌어안고 있었으니까.
아직도 제 주변에 푸른 마력장이 번쩍이는 걸 알면서도 거침없이 달려와 안겼으니까.
“리벨.”
달려오는 리벨을 보며 황급히 마력을 억누른 그가 리벨을 끌어안았다.
아주 간신히, 그녀는 마력장에 스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다가오지 않았던 영역이었다.
폭주할 때는 물론이고 폭주 직전에도.
그의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면 그에게 다가오려는 자는 없었다.
당장 눈앞의 그림자들조차도 그의 마력에 긴장하며 쉽게 다가오지 못했지만, 리벨은 달랐다.
그녀가 수련을 하지 않아 마력을 못 느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시스테인이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터였다.
“……리벨.”
시스테인이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푸르게 빛나던 그의 눈이 완전히 제 색을 되찾았다.
그사이, 조용한 주변을 둘러보며 나인이 손짓했다. 두 명의 그림자가 그의 말에 소리 없이 전장을 빠져나갔다.
주변에 남은 마물이 있는지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아픈 데는 없어요?”
“괜찮습니다.”
리벨은 괜찮다는 그의 볼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걸 분명히 보았다.
“정말 안 아파요?”
시스테인은 그 말에 웃어 버렸다.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버틸 만했다.
무엇보다, 억눌렀던 힘을 더 이상 억누를 필요가 없으니 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컨디션이 좋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숨을 돌리는 사이.
조사를 끝내고 돌아온 그림자들이 보고했다.
“근처에는 마물이 없습니다. 근처에 있던 마물 둥지까지 싹 비었습니다.”
“전장 상황이 불리해지자마자 도망친 것 같습니다.”
시스테인은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어차피 처리해야 할 마물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나았다. 리벨은 그 말에 다른 한쪽을 돌아보았다.
―우우우웅!
그녀의 시선 끝에는 거대한 게이트가 보였다.
그 뒤로는 시스테인이 언젠가 말한 것처럼, 뱀 문양이 그려진 거대한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이제 저걸 없애면 되는 거죠?”
리벨은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이게 없어지면 이번 계획의 가장 큰 부분은 해결되는 셈이다.
상대의 가장 큰 전력은 마물이니, 마물이 쏟아져 나오는 게이트를 없앤 후 남은 마물을 다 쓸어 버리면 사실상 저들의 전력은 거의 다 사라지는 셈이니까.
“음…….”
리벨은 거대한 게이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까지 없앤 게이트와는 규모가 달랐다.
하지만 이것만 없애면 된다.
그림자가 조사해 온 마신전 사제들의 흑마법 수준으로는, 눈앞의 게이트처럼 아예 다른 차원으로의 게이트를 열 수는 없었다.
하긴, 그게 가능했으면 애초에 디란타령의 이 게이트를 이용하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 좋은데, 문제는.
“피가 얼마나 들지 모릅니다.”
시스테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리벨은 그런 그를 황당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 죽기 살기로 싸운 사람이 누구였는지 몰라도, 그는 팔과 볼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주제에 리벨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쪽은 저것보다는 적어도 상처가 크진 않을 터였다.
―꾸욱.
리벨은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시스테인의 팔을 눌러 지혈해 주었다. 그러면서 그를 흘겼다.
“적어도 이것보단 안 나올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이렇게 다친 사람한테 걱정받다니 민망할 정도였다.
리벨은 그의 팔에 손수건을 아예 묶어 버린 후, 주머니에서 바늘을 꺼냈다.
이걸로 될까?
작은 집 한 채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게이트였다.
여러 번 찔러야 하는 거 아냐?
리벨은 좀 의심스러운 얼굴로 바늘을 내려다보았다.
―파팟!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는 리벨 주변으로 마력이 튀었다.
“!”
놀란 리벨이 주변을 돌아보니, 시스테인의 주변을 감싼 푸른 마력장이 게이트에서 나오는 마력과 부딪혀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얼른 없애야겠다.
“일단 해 보자.”
작게 중얼거린 리벨이 바늘로 손끝을 찔렀다.
따끔!
나름 마음먹고 깊이 찔러서 그런지, 금세 방울진 피가 흘러내렸다.
시스테인이 그 손끝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실례하겠습니다, 리벨.”
그러고는 살짝 눈을 감았다.
―우우웅!
그러자 그의 주변을 감돌던 푸른빛 마력이 리벨의 피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는 곧바로 연둣빛 빛무리로 변해 게이트로 빨려 들어갔다.
―파지지지지직!
게이트로 빨려 들어간 연둣빛 빛무리는 반발력에 부딪혔다.
빛무리에 반응해 바로 크기가 줄어들던 다른 게이트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좀 더 많은 양의 피가 필요할 듯했다.
“이걸론 안 될 것 같죠?”
리벨의 말에 시스테인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할 수 없지.
리벨은 결심한 얼굴로 옷의 안주머니를 뒤졌다. 그녀가 그곳에서 불쑥 꺼내 든 건 한 뼘 길이의 단도였다.
시스테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건 언제 챙기신 겁니까.”
“혹시 몰라서요.”
리벨은 바늘을 휙 던져 버리며 말했다.
“피가 부족하면 써야 하니까.”
그렇다고 마물 피 묻은 검으로 내 피를 낼 수는 없잖아?
거기까진 생각했지만 막상 하려고 보니 또 문제가 있었다.
어딜…… 얼마만큼…….
“어딜…… 찌르지?”
얼마만큼 뭘 해야 피가 어느 정도 나는지, 그녀가 알 리가 없었다.
그때 시스테인이 멈칫했다.
“……찌르실 생각이십니까?”
당황한 시스테인과 리벨의 눈이 마주쳤다. 리벨이 뒤늦게 기겁했다.
“아아아니, 말이 헛나왔어요!”
찌르고 싶진 않아!
리벨이 당황할 때였다. 시스테인이 리벨의 손에서 단도를 슥 채갔다.
“앗.”
리벨이 놀라는 사이 시스테인이 말했다.
“날붙이는 익숙하지 않은 자가 만지면 크게 다칩니다.”
리벨을 탓하듯 본 그가 리벨의 뒤로 다가갔다.
“아시면서, 이러시는 건. 제가 애타길 바라서입니까.”
그렇게 낮은 목소리로 물은 그는, 리벨의 양손을 잡은 채 그녀의 손으로 단도를 살짝 뽑아냈다.
―스릉.
단도가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턱 끝이 머리 위에 닿는 느낌이 선명해, 리벨이 얼굴을 붉힐 때였다.
시스테인이 속삭였다.
“아주 살짝만 손을 대시는 거예요.”
그러고는 리벨의 왼손을 놓아주었다.
리벨은 자유로워진 왼손을 날에 슬며시 가져다 대다가, 결국 시스테인을 올려다보았다.
“저번처럼 안 아프게 해 줄 수 있어요?”
막상 칼날을 보니 또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눈을 감으세요.”
시스테인이 가볍게 말했다. 리벨이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언젠가 작은 게이트 앞에서 그랬듯, 눈을 감는 게 더 무섭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제가 저를 믿었듯이, 리벨도 저를 믿는다면, 눈을 감으세요.”
시스테인이 다시 속삭였다.
“…….”
리벨은 그 말에 살짝 입을 벌렸다가, 결국 눈을 감았다.
저 말을 듣고도 눈을 안 감을 순 없잖아.
반칙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리벨.”
시스테인은 그녀의 왼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러면서 작게 말했다.
“제가 당신에게 상처를 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다소 무거웠다. 저는 피를 흘려 가며 싸웠으면서.
가장 위험한 건 자신이었는데도 리벨에게는 이 작은 상처 하나 허락하기가 힘든 그였다.
“응, 알겠어요.”
리벨이 눈을 꽉 감은 순간이었다.
시스테인이 리벨의 엄지손가락을 살짝 단도로 베어 냈다.
“아!”
리벨이 움찔할 때였다. 아까와는 다른 양의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우우우웅!
그러면서, 게이트에 아까와는 다른 양의 환한 빛무리가 날아들었다.
―파파팟!
리벨의 피에서 흘러나온 연둣빛 빛무리는 아까처럼 맥없이 흩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환하게 빛나며 게이트를 공격했다.
“땅이 흔들립니다!”
놀란 나인이 외쳤다. 시스테인은 리벨을 단단히 붙들었다.
시선은 게이트에 고정한 채였다.
―쿠쿠쿵!
눈앞의 게이트는 100여 년 전 열린 게이트였다.
수많은 마물을 쏟아 내고 디란타를 ‘불길한 괴물들의 고개’로 만들었던 원흉이자, 어린 시절의 시스테인이 이곳에 오게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이 게이트는, 이 땅에 그와 같은 괴물을 풀어놓았으니까.
하지만 그 게이트는 이제 사라지고 있었다.
이 대륙에서 이제 미지의 괴물은 모두 없어질 것이다.
디란타령의 마물도, 디란타에 머물러야 했던 괴물도.
―파앗!
서서히 작아지던 게이트는 이내, 사람만 해졌다가, 손바닥만 해졌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그리고 시스테인을 감싼 푸른 마력장과 부딪히던 불길한 기운도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 뒤에 남은 건 고요뿐이었다.
“아…….”
리벨은 살짝 입을 벌렸다.
게이트와 뱀이 그려진 비석은 같은 힘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건지, 소리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비석이 가리고 있던 먼 하늘.
먹구름이 가득 차 있던 하늘에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긴 시간 칙칙한 땅에 있어 밤낮도 헷갈릴 지경이었는데, 이제 알 것 같았다.
“아침이에요.”
리벨이 속삭였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디란타 대공령의 이곳저곳에 새하얀 빛이 한 줄기씩 내려오기 시작했다.
마물이 사라진 디란타는, 지난 100년 동안과는 전혀 다른 땅이 될 것이다.
“성공했어요!”
가장 큰 위협을 없앤 셈이다. 작전의 90%는 성공한 셈이었다.
그녀가 아픔도 잊고 시스테인을 꼭 끌어안았다.
“리벨!”
피가 튀자 놀란 시스테인이 그녀의 손끝을 꾹 눌러 지혈했다.
그 피에 놀란 건 시스테인뿐이었다.
리벨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