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시스테인은 리벨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지만,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의 능력으로 리벨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도.
“…….”
어색한 침묵 후에 리벨이 입을 열었다.
“시스.”
“예.”
답은 바로 돌아왔다. 내가 여기서 말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그는 더 추궁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임을 알기에, 리벨은 입을 열었다. 마음의 준비고 뭐고 없었다.
“미안해요.”
그 말을 시스테인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라이아 약초 사이로 가려진 그의 얼굴은 무슨 표정인지 보이지 않았다. 리벨은 그 상태로 말했다.
“제가 기사를 쓴 게 고의는 아니었다고 해도―”
“―명백한 가해였다고 말씀하시고 싶은 겁니까.”
시스테인은 그녀의 말을 부드럽게 가로챘다. 리벨이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알아요?”
마력을 다루면 마음도 읽나?
그럴 리가 없었다.
“거듭 사과하셨지 않습니까. 그동안.”
시스테인의 낮은 목소리가 화원을 울렸다.
“리벨 당신은 새빨간 거짓말쟁이고, 제게 큰 잘못을 했다고, 미안하다고요.”
그의 목소리는 잔잔했다. 리벨은 살짝 입을 벌렸다.
“기자 벨인 당신을 먼저 만났다면, 그 사과가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믿습니다. 지금까지 마음에 담아 두고 계셨다는 걸. 제가 폭주할까 싶어 말하지 않으셨다는 걸.”
그가 잠시간의 침묵을 두고 말했다.
“당신이 아니라 나를 위해 숨기셨다는 걸, 압니다.”
리벨은 라이아 약초를 슬그머니 치워 보았다. 시스테인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입니다. 화가 안 났다고 해도 거짓말입니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가…….”
그는 리벨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시선을 피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 주겠다는 듯이.
“당신의 정체를, 점점 알게 될수록 기이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당신이 무엇이어도 상관없다고.”
그건 그가 언젠가 했던 말이었다.
리벨은 그 말에 짧게 탄식했다.
이건 진실을 채 밝히기도 전에, 이미 결말이 나온 문제였던 모양이다.
그걸 자신만 몰랐던 모양이다.
거하게…… 거하게…….
거하게 삽질했다……!
굴삭기가 따로 없었다. 이대로 귀농해서 땅만 파도 밥값은 하겠다!
머리를 싸맨 리벨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나, 미안해서 시스 얼굴 어떻게 봐요?”
그 말에 시스테인은 담담하게 답했다.
“아무렇지 않게 나오시면 됩니다.”
“뻔뻔하게요?”
“네.”
시스테인은 고민 없이 답했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요.”
그래도 될까……? 리벨은 미안함에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풀을 다시 치운 리벨이 슬그머니 그를 내다보았다.
그렇게 라이아 약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던 리벨은, 문득 풍성한 생명력을 뽐내고 있는 라이아 약초를 내려다보았다.
시스테인은 폭주와 거리가 먼 멀쩡한 상태라는 의미였다.
그의 눈을 닮은 푸른 꽃을 보다가, 다시 시스테인을 본 순간.
“……!”
어느새 푸른 눈동자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리벨이 움찔했다.
마주친 호수 같은 눈동자가 옅은 웃음을 전했다.
“화…… 안 나요?”
리벨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시스테인이 불쑥 답했다.
“납니다.”
그 말에 리벨은 슬그머니 몸을 뒤로 물렸다. 그와 리벨 사이를 다시 라이아 약초가 막으려는 순간이었다.
탁, 시스테인의 손이 라이아 약초를 헤치고 리벨의 볼을 감쌌다.
“났었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요.”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에게 그가 웃어 주었다.
화나는 대신 황당하고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당신이 이런 반짝이는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볼 때마다. 당신이 내 앞에서 웃을 때마다.
나는 당신에게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만 깨닫는데.
이미 내가 당신에게 단단히 묶여 버렸는데.
그 사실을 리벨만 모르고 있었다.
“나는 당신에게 화낼 수 없는 사람입니다, 리벨.”
“정정 기사를 낼 수도 없는 사람을 거짓말로 몰아서, 소문 속으로 던져 넣었는데도요?”
“네.”
그가 그렇게 말해도 리벨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앞으로는 거짓말하고 살지 말자 같은 결심을 하면 뭐 하나?
이미 엎지른 물은 스며들어서 흔적을 남겼는데.
시스테인은 그런 그녀를 보다가, 불쑥 말했다.
“정정 기사를 내지 못한 게 그리 미안하시다면.”
미안하시다면? 리벨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지금 내시면 됩니다.”
“네?”
지금요? 여기서요? 갑자기요? 벨 기자 이름으로요?
리벨이 수많은 의문을 담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스테인은 그 질문을 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리벨이 편해지신다면요.”
“아니, 갑자기 기사가 나도 이상할 텐데.”
“그럼 당신이 편할 때, 내세요.”
시스테인은 그녀의 볼을 쓸어 주던 손을 더 뻗어, 그녀의 목을 감싸 끌어안았다.
“……!”
움직일 때마다 사락 소리가 나는 풀숲 사이로 두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묻혔다.
“기사를 쓰라고 해도…….”
뭐라고 써야 할지. 리벨이 머뭇거릴 때였다.
달빛인지 화원의 조명인지 모를 것이 시스테인의 얼굴을 비추었다.
―탁.
그의 무게에 밀려 리벨의 손이 땅을 짚었다. 그녀를 부드럽게 밀어붙인 시스테인이 속삭였다.
“이게 필요한 건 제가 아니라…….”
―톡.
그가 따낸 건 라이아의 꽃잎이었다. 푸른 꽃잎을 그녀의 입술에 문질러 준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리벨과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꼴깍, 리벨이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기분이 상했던 게 분명―
“리벨이었다고, 써도 되겠군요.”
“네?”
멍하니 벌린 입으로 라이아 꽃잎이 쏙 들어가 버렸다.
“긴 밤을 보내는 데에 도움이 될 겁니다.”
리벨이 눈을 크게 뜬 순간, 그녀의 등이 땅에 닿았다.
“!”
시스테인의 낮은 웃음소리와, 리벨의 작은 비명이 풀숲 움직이는 소리에 묻혀 뭉그러졌다.
구름도 살포시 달을 가리는 밤이었다.
* * *
제국의 반란을 가라앉힌 주역은 당연히 황제 카리스였다.
그는 민심이 어지러워 반역을 일으켰다는 반역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반역을 진압한 후 오히려 더 제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귀족들이야 어떻게 되든 알 게 뭐야?”
“우리한테 성군이시면 된 거 아냐?”
수도의 제국민들은 그렇게 이야기했다.
“게다가 생색도 안 내시지.”
“맞아. 이번에 영지 마물 물리치신 것도 소문내지 말라고 하셨다며.”
그냥 카리스 입장에서는 믿을 놈 하나 없어서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참에 민심도 가라앉힐 겸 황가의 표식을 남기고 오라고 했을 뿐이었고.
하지만 제국민들이 그의 깊은(?) 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역시…….”
“황제 폐하 만세!”
“만만세!”
하지만 카리스를 둘러싼 오해(?)는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한편 그와 다른 쪽으로 주목받는 사람도 있었다.
[디란타 대공 부부, 행복한 결혼 생활 공개]
수도의 대표 신문인 크라이베리부터,
[‘제국의 검’ 시스테인 폰 디란타, 그의 화려한 밤 생활!?]
온갖 뒷소문을 쓴다는 블랙스트리트까지 주목하는 사람.
그건 다름 아닌 시스테인 폰 디란타였다.
물론 블랙스트리트의 ‘화려한 밤 생활’ 운운은 그저 그가 디란타 대공비와 밤을 자주 보내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말로 싱겁게 끝나는 바람에, 기사 제목만 자극적이라며 욕을 신나게 먹었다.
하지만 블랙스트리트의 후원은 끊기지 않았다.
블랙스트리트의 가장 큰 익명의 후원자는 ‘원래 그런 맛에 보는 신문’이라며 투자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단독> 디란타 대공 부부와의 전격 인터뷰]
리벨의 기사도 완성되었다.
이번엔 삼자대면……이 아니라 일대일 대면으로 완성된 인터뷰 내용은 점잖으면서도 화끈했다.
[디란타 대공은 “라이아 약초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자 한다”며, “라이아 약초의 마력을 가라앉히는 효능 때문에 라이아를 사용했을 뿐, 다른 용도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물론 이 기사는 벨 기자의 이름으로 낼 수는 없었다.
시스테인의 밤 능력을 의심했던 기자가, 갑자기 그를 옹호하는 기사를 내면 누가 봐도 시스테인이 압력을 넣은 꼴이 아닌가?
그러니 익명으로 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넣어야 할 내용은 다 넣었다.
두 사람은 더없이 행복한 결혼 생활 중이라고.
무엇보다 화룡점정은.
[디란타 대공비는 “이전에 돌았던 소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짓궂은 질문에 얼굴을 붉히며 “노코멘트”라 짧게 답했다.]
이 부분이었다.
굳이 시스의 밤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구구절절 쓸 필요가 있을까요?
원래 뭐라고 쓰든 사람들이 알아서 상상하게 만드는 게 최고였다.
그 방향만 잡아 주면 되는 거다.
―탁.
기사를 다 쓴 리벨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스테인은 그녀의 몸을 감싸 안은 채, 그녀가 기사를 쓰던 테이블을 한쪽 손으로 짚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살짝 숙여 리벨을 내려다보았다.
“끝났습니까.”
“네.”
후우. 오랜 업보였다.
“앞으론 진짜 거짓말 안 하고 살 거예요.”
벌써 열 번은 한 것 같은 이야기였다. 시스테인이 낮게 웃을 때였다.
“그리고!”
리벨은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나 이거만 내고 기자 그만둘 거예요.”
그 말에 시스테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예?”
“시스 기사로 유명해진 거잖아요. ‘귀족가의 폭풍’ 벨. 이전부터 그만둘 생각이었어요.”
사람이 양심이 있지! 리벨이 팔짱을 낄 때였다.
시스테인이 고개를 저었다.
“기자 일이 싫어지신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요.”
그렇지만 양심이 생겼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 그녀의 머리 위에, 시스테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앞으로는 거짓 보도를 하실 일도 없으니 괜찮지 않습니까.”
“또 애먼 기사 써서 사람 잡을 것 같아서요.”
“그러지 않으면 됩니다.”
리벨의 의자를 틀어 저와 시선을 마주하게 만든 시스테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리벨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고 싶어도 확신이 안 들어요.”
“확신이 드는 방법을 하나 알고 있는데.”
시스테인이 느긋하게 입을 뗐다. 그리고 리벨의 귀에 뭐라 속삭였다.
“……!”
리벨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진짜요?”
“네. 거절하시면, 곤란합니다.”
시스테인이 웃었다.
나 때문에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제가 너무 죄송해지지 않습니까.
그의 속삭임에 결국 리벨은 머리를 매만졌다.
그가 이렇게까지 원한다면, 아무래도 기자 때려치우는 건 재고해야 할 듯했다.
“……그렇게 제가 기자 때려치우는 게 싫어요?”
“정확히는 리벨이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런 방해 없이.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었다.
리벨은 결국 그를 끌어안았다.
“그럼, 꼭 말한 대로 해 주기에요.”
“물론입니다.”
시스테인이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곧 옅은 웃음소리와 함께, 달콤한 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