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 * *
이민아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어렸을 때 친해질 뻔한 이들이 몇몇 있었으나, 그들은 얼마 못 가 이민아와 멀어졌다.
이민아의 아버지, 이진성이 약자와 어울리지 말라고 했고, 동시에 그는 이민아를 어렸을 때부터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그 결과, 이민아는 또래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었고, 동시에 또래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제대로 터득 못 했다.
그리고 그녀의 또래들 또한 이민아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아니, 못 다가간 것에 가까웠다.
이진성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민아에게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이유로, 이민아는 몇 년 동안 친구 없이, 그저 강해지는 데 집중하며 살았다.
그렇게 그녀는 대학교에 올 때까지 제대로 된 친구가 하나 없었다.
그랬는데, 바로 어제.
‘친구. 나랑 친구를, 내게도 친구가…….’
박유진이 친구가 되겠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누군가가 먼저 이민아에게 다가온 건, 그녀의 입장에서는 실로 매우 오랜만이었다.
‘친구…….’
지난 몇 년 동안 이민아에게 먼저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다.
이민아가 먼저 다가가려고 해도, 그들은 전부 이민아에게 멀어졌다.
이민아와, 아니, 이진성과 엮이기 두려워서 말이다.
박유진은 그들과는 다르게, 이민아에게 멀어지지 않았다.
‘드디어 나에게도 친구가…….’
이민아는 친구를 가지는 것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친구를 가진 적이 없던 탓이었다.
친구와 같이 밥을 먹거나 놀러 가는 등, 그런 일상적인 일들이 이민아에게 있어 일종의 환상이었다.
그리고 이민아는 오늘, 그 환상 중 하나를 실행할 생각이었다.
‘가족 말고 다른 사람과 같이 밥을 먹을 수 있어.’
친구, 그러니까 박유진과 같이 점심 먹으러 가는 것.
이민아는 그걸 꼭 한번 해 보고 싶었다.
그것 외에도 이곳저곳 놀러 가는 등, 친구와 해 보고 싶은 일들이 몇몇 있었다.
이민아는 박유진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것들을 해 볼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순조로웠다.
방금 전까지는 그랬다.
“박유진 씨!”
박유진에게 전화번호를 알려 준 직후, 그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박유진 씨! 잠시만요! 저랑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붉은 머리를 가진, 전에 본 적이 있는 여자가 말이다.
“역시 학교에 계셨군요. 이쪽으로 오기를 잘했네.”
하세리.
A급 헌터이자, 대한민국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주목하는, 엄청난 가능성을 지녔다는 화염술사.
이민아는 그녀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원래라면 딱 아는 선에서 그치고, 그 이상의 관심을 안 가졌을 여자인데.
‘…뭐지?’
하세리는 박유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민아는 어째서인지 그 광경이 마음에 안 들었다.
하세리가 자신의 ‘친구’를 뺏을 거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마도구 제작자, ‘바렐’ 】
“하세리 헌터님? 무슨 일이시죠?”
나는 내 앞에 나타난 붉은 머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세리가 나타난 건 여러모로 예상 밖의 일이었다.
어제 문자로 확실히 거절의 의사를 표현해 당분간은 내 앞에 안 나타날 거라 생각했는…….
“다른 게 아니라, 박유진 씨. 이번 주에 시간 진짜 안 될까요?”
하세리는 나를 올려다봤다.
머리 색과 대비되는 초록색 눈동자.
나는 그 눈동자를 보자마자, 익숙한 느낌에 소름이 끼쳤다.
“…아.”
하세리의 저 눈빛.
저 눈빛이 무슨 의미인지 나는 잘 알았다.
‘이 누나는 나한테 또 왜 꽂힌 거야?’
하세리에게는 특이한 취미가 하나 있었다.
바로 발굴 안 된 인재를 영입해, 자신의 손으로 키우는 것.
그리고 지금 하세리의 눈빛은 딱 그 눈빛이었다.
‘이 눈빛은 내가 잘 알지.’
회귀하기 전, 내가 C급을 막 달성했던 시절.
그때 하세리는 내 힘을 보고, 나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썼다.
그리고 그때 하세리가 내게 보인 집착은, 여러모로 기억에 남았었다.
‘일이 곤란해졌네.’
하세리의 집착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말했듯, 그녀의 가족이 문제였다.
‘이거 진짜 어떻게 하지?’
다른 때였으면 하세리가 뭘 원하는지 듣고, 상황에 맞게 그녀를 도와줬을 거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그녀를 도와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하세리와 어울리다, 만에 하나 하세리의 가족에게 내가 찍히기라도 하면…….
“하세리 헌터님.”
속으로 고민하던 도중, 옆에 있던 이민아가 입을 열었다.
“네? 아, 이민아 씨였죠? 이진성 씨의 따님이요.”
“네, 맞아요.”
이민아는 평범하게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민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약간 차가운 느낌이었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만큼은 확실히 예의를 보일 녀석이 말이다.
“그보다 하세리 헌터님께서 여기는 무슨 일이죠?”
“아, 제가 박유진 씨와 잠깐 시간을 갖고 싶어서요.”
하세리는 문제가 있냐는 듯, 태연하게 이민아에게 대꾸했다.
“박유진 씨와 따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그거라면 다음에 해 주시면 고맙겠네요.”
이민아는 하세리의 말을 끊으며, 갑자기 내 코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오늘 박유진은 저와 선약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하세리 헌터님은 다음에 박유진과…….”
“이민아 씨.”
“…네?”
“그건 이민아 씨가 결정할 게 아닌 거 같은데요?”
하세리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하세리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저와 보낼 시간이 있는지 없는지는 박유진 씨가 정할 문제죠. 그러니까 이민아 씨는 잠시 빠져 주면 감사하겠어요.”
그래, 이 모습이다.
게이트를 토벌할 때,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걸 얻고자 할 때.
A급 헌터를 달성한 후에도, 나는 이러한 하세리의 모습에 가끔 두려움을 느꼈다.
“…어? 아, 어어. 아, 아니! 하, 하세리 헌터님. 갑자기 그건 무슨…….”
“이민아.”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갈색 단발머리 녀석에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줘. 금방 끝낼게.”
“으, 응. 알겠어.”
이민아는 여전히 당황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빠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금 하세리를 바라봤다.
“하세리 헌터님.”
“네?”
“그러니까 이번 주에 시간 되냐고 묻고 싶던 거죠?”
“네, 안 될까요?”
“으음, 그건…….”
나는 잠시 속으로 고민했다.
아까 말했듯, 이 시기에 하세리와 친해지는 건 썩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세리는 이미 나를 눈독 들인 상태.
지금 거절한다고 해도, 아마 오늘 내로 또 찾아올 게 뻔했다.
그럴 거면 차라리 지금 하세리를…….
“제가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거든요.”
“부탁이요?”
“네, 그리고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저도 박유진 씨의 부탁 하나를 들어드릴 수 있어요.”
“아아, 네. 근데 제가 하세리 헌터님께 부탁할만한 건, 음?”
잠깐만.
하세리가 내 부탁을 들어준다?
내 기억이 맞다면, 하세리의 지인들 중에 분명…….
“…하세리 헌터님.”
“네?”
“혹시 고민수라는 사람, 아시나요?”
“고민수라면, 아아. 네, 민수 아저씨라면 알죠. 근데 그분은 갑자기 왜요? 그리고…….”
하세리는 조금 의심스럽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민수 아저씨를 어떻게 알고 계신 거죠?”
“다 알 방법이 있어요. 그리고 하세리 헌터님께 하고 싶은 부탁이 하나 생겼네요.”
“흐음, 그래요? 그럼 제 부탁도 들어주시는 거죠?”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근데 그 전에, 하세리 헌터님이 제게 뭘 부탁하시고 싶으신 거죠?”
“아, 조만간 게이트 토벌을 같이하자고 부탁하려고요. 하지만 자세한 건 둘이서 이야기해도 괜찮을까요?”
“단둘이서라. 지금 당장이요?”
“빠를수록 좋을 거 같아서요.”
“뭐, 그거라면…….”
방금 이민아와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던 터라, 원래 같았으면 힘들 거라고 했을 거다.
원래 같았으면 말이다.
‘고민수. 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일찍 가는 편이 좋겠지.’
회귀하기 전의 내가 쓰던 네 개의 주요 장비들.
단검, 코트, 와이어, 가면.
그중 세 번째 장비인 와이어를 고민수가 가지고 있었다.
만약 내가 하세리를 잘 구슬린다면, 당장 오늘 고민수를 만나러 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그, 이민아? 미안한데 오늘 같이 점심 먹기로 한 거…….”
“가.”
“응?”
“가라고.”
이민아는 내 눈을 피한 채 말했다.
“점심 나 혼자 먹을 테니까, 그냥 가.”
입술을 내민 채 고개를 숙인 이민아.
누가 봐도 그녀가 삐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점심은 내일 같이 먹으러…….”
“몰라. 알아서 해.”
이민아는 이 말과 함께 내게 등을 돌리더니 이내 건물의 출구로 향했다.
아니, 향하다가 갑자기 뒤돌더니 다시 돌아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내게 건넸다.
“네 번호, 저장해. 어서.”
“아, 알겠어.”
나는 이민아의 스마트폰에 내 번호를 저장했다.
그런 후, 이민아는 다시 스마트폰을 가져가더니,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따 연락하면 씹지 마라. 그리고 연락 온 거 보자마자 바로 답장하고. 이것도 알겠지? 그리고 내일 점심은 무조건 나랑 같이 먹는 거다. 무조건.”
“알겠다. 이건 내가 약속할게.”
“…약속한 거다? 어기기만 해 봐. 뒤질 줄 알아.”
이 말을 마지막으로 이민아는 다시 등을 돌려 가던 길을 마저 갔다.
근데 등을 돌리기 직전.
이민아와 하세리는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서로 눈을 마주쳤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지만, 그 눈빛에 뭔가 많은 의미가 있다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하지만 다행히 둘 사이에 마찰이 없이 잘 넘어갔다.
“…혹시 여자 친구인가요?”
이민아가 적당히 멀어지자, 하세리는 그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근데 내가 아니라고 대답하려던 순간.
“여자 친구 아니에요!”
이민아가 대신 대답을 외쳐 줬다.
분명 상당히 거리가 벌려졌음에도, 이민아는 그걸 또 멀리서 들은 것이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저 녀석의 신체 능력 하나는 인정해야 했다.
뭐, 그건 그렇고.
“…헙.”
복도가 울릴 정도로 크게 외친 탓에, 주변에 지나가던 학생들의 이목을 끌게 된 이민아.
그녀는 매우 빨개진 얼굴과 함께, 도망치듯 학교 건물 밖으로 나갔다.
“…네, 뭐. 방금 질문에 답하자면, 이민아는 제 여자 친구가 아니에요.”
“아아, 네. 뭐. 그런 거 같네요.”
하세리는 민망하다는 듯이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고, 나는 헛웃음과 함께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하세리 헌터님. 게이트 토벌이요?”
“그건 근처 카페에 가서 이야기할까요? 이야기가 복잡해서 앉아서 이야기하는 편이 좋을 거 같아요.”
“제가 이 근처에 카페 하나 아니까 그쪽으로 가죠.”
“네, 그럼 바로 출발을…….”
“근데 가기 전에.”
나는 붉은 머리의 헌터를 붙잡으며 말을 계속했다.
“하나만 묻죠. 고민수 씨 있잖아요.”
“네, 민수 아저씨가 왜요?”
“그분을 오늘 바로 만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이건 카페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네, 뭐. 좋아요. 그럼 카페로 가 볼까요?”
현재 시각, 오후 13시 15분.
너무 늦게 들어가면 유나가 또 걱정할 수 있으니, 가능한 한 일찍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니…….
‘오늘 고민수를 만나서, 최대한 빠르게 와이어를 얻고 나온다.’
물론 고민수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리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