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사는 전격계 헌터-31화 (31/240)

31화

“이 빌딩에 엘리베이터를 따로 안 만들어 놔서 계단으로 올라가야 해. 괜찮지?”

“네, 괜찮아요.”

나는 별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회귀하기 전에 이곳을 한 번 왔던 터라, 이미 한 번 계단으로 이 건물의 최상층을 갔다 온 적이…….

“어째 놀란 표정이 아니네.”

“…네?”

“보통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사실에 다들 놀라던데 말이야.”

“아, 뭐, 그거야. 대충 예상했거든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했지만, 나는 이내 정신 차리며 태연히 입을 열었다.

“이 빌딩에 들어왔을 때부터 엘리베이터는 안 보이고, 계단만 보였으니까요.”

“으음, 하기야. 그럴 법도 하겠네.”

고민수는 다행히 별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고민수는 앞장서서 계단을 올라갔고, 나는 하세리와 같이 그를 따라갔다.

“이 빌딩의 모든 층들이 다 연구실인 건가요?”

나는 이곳을 처음 보는 척, 신기하다는 듯이 둘러보며 고민수에게 물었다.

“손님맞이 하는 1층, 그리고 1층과 이어진 2층. 그 두 층은 연구실이 아니지.”

어느새 도착한 2층.

고민수의 말대로, 1층과 2층은 층의 구분 없이 이어져 있었다.

“3층부터 11층까지가 전부 내 연구실이지.”

계단을 조금 더 올라가자, 이내 도착한 3층.

그리고 3층부터는 1층, 2층과 여러모로 다른 모습이었다.

‘회귀하기 전이나 지금이나, 엄청난 곳이기는 하네.’

3층에 들어선 수많은 기계들.

거기다 수많은 약품들부터 시작해, 몬스터들의 사체, 마법 관련 서적 등, 마도구 제작과 관련된 물품들이 한 층을 전부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득, 그리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말이다.

“어때? 볼만한 광경이지?”

“네. 엄청 멋있는 곳이네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회귀하기 전에도 이 연구실들을 한 번 봤지만, 이곳을 또 보게 된 지금.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네.’

커다랗고, 정교하게 설치된 위엄 있는 기계들의 모습.

그 모습은 내 감탄을 자아냈다.

“박유진 씨. 저런 거에 관심 있어요?”

“굳이 따지자면 마도구 제작이니, 과학이니. 그런 거에는 딱히 관심도, 재능도 없죠.”

나는 내 옆에 있던 붉은 머리 헌터에게 대꾸했다.

“하지만 이런 연구실의 모습은, 뭐랄까? 남자의 로망? 으음, 스팀펑크? 뭔가 저의 시선을 엄청 끄는 것들이거든요.”

“네? 그래요?”

하세리는 이해가 잘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와는 다르게, 근처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던 고민수는 작게 웃었다.

“역시 뭘 좀 아는 젊은이구먼. 이 연구실들을 처음 만들 때 기계들의 디자인을 신경 쓰면서 하나둘 만들었다네. 자네가 말한 그 스팀펑크, 나도 많이 좋아하거든.”

남자의 심금을 울리는 것들이지, 라고 고민수는 덧붙였고, 이에 나는 피식 웃었다.

“역시 고민수 씨도 뭘 좀 아시는 거 같네요.”

“이쯤은 해야 대한민국 최고의 마도구 제작자 아니겠냐?”

하세리는 나와 고민수를 이해 못 한다는 듯이 바라봤으나, 우리 두 남자는 딱히 개의치 않아 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볼수록 마음에 드는 젊은이구먼. 그래, 아무튼 천천히 둘러본 거 같으니 따라오너라. 꼭대기 층, 그러니까 12층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거든.”

“네, 올라가죠.”

고민수는 다시금 앞장섰고, 나와 하세리는 또다시 그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3층을 지나고 4층을 올라갈 때쯤.

“후우. 박유진 씨는 안 힘들어요?”

“계단 올라가는 거라면 문제없죠.”

여유롭게 올라가는 나와는 달리, 하세리는 아주 조금 숨이 차는 듯한 모습이었다.

“저는 전방에서 몸을 굴리는 타입이라, 체력이 그렇게 나쁜 편이 아니거든요.”

“하아, 부럽네요. 저는 능력만 기른 편이라, 체력이 그닥 좋지 않아서요. 후우.”

하세리는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엘리베이터를 만들라고 몇 년 전에도 말했는데, 저 아저씨는 끝까지 제 말을 안 듣더라고요. 여기 누구 올 때마다 꼭대기 층까지 안내하는 건 매번 힘든데, 왜 엘리베이터를…….”

“세리야, 전에도 말했지만 이 빌딩에 오는 손님은 거의 없어. 1년에 다섯 명도 안 오는 편이라는 거, 너도 잘 알잖아. 그 다섯 명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만드는 건 낭비지.”

고민수는 뒤를 돌아보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내가 엘리베이터를 안 쓰는데, 만들 이유가 더더욱 없지.”

“나도 알거든. 아저씨는 맨날 그 순간 이동 마법인가 뭔가로 올라가고 내려가잖아.”

“잘 아네.”

“근데 나는 마법사가 아니잖아. 여기 올 때마다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내 입장도 생각을…….”

“한 달에 한 번꼴로 오는 녀석을 위해 굳이 엘리베이터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

마치 가족처럼 편한 분위기로 티격태격하는 하세리와 고민수.

그 모습을 보며 나 또한 옅게 미소를 지었다.

‘하세리의 이런 모습도 오랜만이네.’

하세리에게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중 하세리가 친구나 동료로 여기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하세리의 동료나 친구가 되면, 하세리만큼 좋은 동료가 없었다.

‘근데 친구가 되는 그 과정이 문제지.’

친해지면 그 값은 하지만, 친해지기 매우 어려운 사람.

그게 내가 기억하는 하세리였고, 그건 지금도 여전히 유효했다.

“계단 오르는 게 힘들면 체력 좀 키워. 너 나중에 남자 상대할 때 체력 안 좋으면 고생한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서 이해해라. 근데 네가 상대하고 싶은 남자가 저 젊은이면, 흐음.”

고민수는 나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

“너는 A급이라 E급 정도는 문제없으려나? 근데 저 친구, 나중에 분명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거 같은데, 으음. 야, 세리야. 그냥 체력 키워라. 너 나중에 저 친구와 연애하면…….”

“그러니까 아저씨. 제발 주접 좀 그만 부리고, 헛소리도 그만…….”

“헛소리? 너, 가슴에 손을 얹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냐?”

여동생을 놀리듯 장난스럽게 웃는 고민수와, 철없는 오빠를 바라보듯 한숨을 쉬는 하세리.

참 가족 같은 분위기의 두 사람이었다.

‘근데 나와 하세리의 관계라…….’

회귀하기 전의 나와 하세리의 관계는… 조금 많이 복잡했다.

하세리에게 있어 나는 그녀의 얼마 없던 친구 중 하나였다.

근데 당시의 나는 앞만 보고 나아갔던 미친놈이라, 나와 하세리의 관계는 말로 쉽게 표현이 안 됐다.

‘회귀한 김에 그 관계를 조금 손봐야지. 물론, 몇 년 뒤에 해야겠지만.’

당장은 하세리의 가족이 너무나도 마음에 걸렸다.

그녀의 가족과 엮이기는 싫으니 말이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거의 다 도착했네.’

3층부터 11층까지 이어지는 화려하고 멋있는 연구실을 지나, 어느새 도착한 12층.

이 건물의 최상층은, 지금껏 지나왔던 각층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여기서 살고 계신 건가요?”

답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모르는 척 고민수에게 물었다.

“사실상 살고 있는 거지. 물론 내 집은 따로 있지만, 집보다는 이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훨씬 많거든.”

12층의 모습은 말했듯, 지금껏 지나온 층들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3층부터 11층은 연구실이자 공장 같은 분위기였다면, 12층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평범하게 좋은 아파트겠네.’

거실, 부엌, 화장실, 침실이 있는 상당히 좋은 아파트.

그게 12층의 모습이었다.

“아저씨, 음식 먹으면 바로바로 치우라고 저번에도…….”

“나중에 로봇들 시켜서 치우게 할 거야. 근데 손님이 올 줄 알았다면 미리 치워 둘 걸 그랬다.”

고민수는 멋쩍은 듯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더러운 집안 모습을 보여 줘서 미안. 자네가 올 줄 알았다면 미리 치워 두는 건데 말이야.”

“괜찮아요. 그런 건 신경 안 쓰거든요.”

나는 적당히 대꾸하며 고민수의 집을 둘러봤다.

내가 기억하던 것과 살짝 달랐지만, 전체적으로 비슷한 모습이었다.

“자, 다 됐다.”

하세리의 도움을 받아 12층의 정리를 대충 끝낸 고민수는 다시금 내게 다가왔다.

“따라오너라. 내 완성품들을 모아 놓은 창고로 안내해 줄게.”

“아, 네. 알겠어요.”

그나저나 창고라.

회귀 전에는 고민수가 말한 그 창고에는 들어간 적이 없었다.

그때는 그냥 12층까지 왔지만, 창고는 못 들어갔다.

그때의 고민수는 창고에 혼자 들어가, 거기서 와이어를 가져왔었으니까.

그래서 12층에 위치한 고민수의 창고가 어떤 모습인지 내심 궁금한…….

“…오.”

“물건이 조금 많기는 하지.”

“조금 많은 정도가 아닌데요?”

창고의 크기가 내 예상보다 훨씬 컸다.

아니, 이건 예상할 수 있던 게 아니었다.

‘창고의 넓이가, 12층 전체의 넓이보다 더 큰 거 같은데?’

내가 방금 본 12층의 모습보다 확실히 몇 배는 넓은 창고였다.

그래서 이건 대체…….

“창고에 마법을 따로 걸어 놓은 거야.”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고민수는 피식 웃으며 설명했다.

“공간 변이 마법의 일종인데, 쉽게 말해 마법으로 기존의 조그마한 창고를 몇십 배 넓힌 거지. 내가 만드는 마도구들이 워낙 많다 보니, 창고 한두 개 갖고는 안 됐거든.”

“…그렇군요.”

과장이 아니라 이 거대한 창고.

얼핏 훑어본 것에 불과했지만, 이 창고에 적어도 천 개 이상의 마도구들이 존재하는 듯했다.

“아무튼 여기서 하나 골라 가도록 해. 여기 있는 거 아무거나 하나 줄 테니까.”

“네, 알겠어요. 근데, 진짜 아무거나 가져가도 되는 건가요?”

“응, 아무거나 괜찮다.”

고민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도구 제작자인 내게 있어 가장 큰 행복은 바로 내가 만든 아이템이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거야. 그래서 강하거나, 자격이 있거나,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사람이 내 아이템을 마음껏 써 줬으면 하거든.”

회귀하기 전에도 고민수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데자뷔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자네는 엄청 크게 될 사람이야. 전직 헌터이자, 대한민국 최고의 마도구 제작자인 내가 장담할게. 그러니까 여기 있는 거 아무거나 하나 가져가서 쓰도록 해. 그리고 내가 만든 그 마도구를 써서,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리도록 해. 알겠지?”

“공짜로 마도구를 선물 받았는데, 당연히 그쯤은 해 드려야죠.”

나 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중에 유명해지면, 제가 바렐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닐게요.”

“사회생활도 잘하는구먼. 자, 그럼. 천천히 고르도록 하렴. 시간은 넉넉히 줄 테니까.”

“네, 그렇다면…….”

나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이 넓은 창고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고민수, 아니, 대한민국 최고의 마도구 제작자 바렐이 만든 수백 개의 마도구들.

선택지는 매우 많았지만, 그게 문제였다.

‘이 중 하나를 고르려고 하니, 너무 고민이 되네.’

이런 건 애초에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원래는 무한 와이어만 받아 갈 생각이었는데, 하나 더 덤으로 받아 가는 건 내 예상 밖이었다.

‘조금 생각을 해 봐야겠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바렐’이 만든 장비였다.

언제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는 만큼, 나는 신중히 선택할 필요가 있었다.

‘총기류? 아니야. 나도 총은 잘 쏘지만, 내 스타일과는 안 맞아. 그럼 장갑? 근데 장갑은 범용성 부문에서는 어떻게 보면…….’

나는 차분히 생각하며 선택지를 줄여 나갔지만, 그럼에도 쉽게 결정이 안 내려졌다.

그렇게 약 5분 동안 가만히 서서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박유진 씨?”

“음? 아, 네. 하세리 헌터님? 무슨 일이죠?”

“제 추천이기는 한데, 혹시 이 장비는 어떠신가요?”

내 곁에 다가온 하세리의 손에는 무언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물건은 다름 아닌…….

“어때요? 아까 탈로스와 싸우실 때, 박유진 씨가 속도를 중점으로 싸우는 게 보였거든요. 그래서 혹시 이 장비가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