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구워워워.”
“쿠르르르.”
고대 성의 지하처럼 생긴 게이트.
그곳에 많은 골렘들이 있었다.
‘더럽게 많네.’
진흙으로 만들어진 머드 골렘.
고깃덩이로 이루어진, 상당히 징그러운 플레시 골렘.
거기다 돌로 이루어진 스톤 골렘까지.
‘일단 진입하자마자 보이는 골렘은 243마리.’
나는 근처의 석상 뒤에 몸을 숨긴 채 천천히 게이트 내부의 모습을 살폈다.
‘저 앞에는 또 62마리가 있네.’
지금까지 보인 몬스터의 수는 약 300마리.
300이면 결코 적은 수가 절대 아니었지만…….
‘하세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
게다가 나와 이민아가 힘을 합치면, 아마 골렘 300마리쯤은 상대할만할 것이다.
‘층별로 나누어져 있나 보네.’
저 먼 곳에 보이는 계단들.
이 게이트는 층으로 나누어진 형태의 게이트인 듯했다.
이런 종류의 게이트를 자주 접했던 나는, 게이트의 구조 자체가 단순할 거라 확신했다.
‘그래도 직접 확인해 보는 편이 낫겠지.’
애초에 게이트의 구조를 꼼꼼히 확인하는 게 척후의 역할이었으니 말이다.
‘…해 보자.’
나는 골렘들의 시선을 피해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수백 마리의 골렘들이 우글거렸지만, 나는 그것들의 눈에 띄지 않은 채 돌아다녔다.
‘골렘들의 시야 범위는 잘 알고 있으니까.’
회귀 전에 골렘들을 자주 상대했던 덕에, 이들의 시야를 비롯해 이런저런 특성들을 알고 있었다.
구우우웅.
내 바로 옆을 지나가는 골렘들.
하지만 그 골렘들은 나를 눈치 못 챘다.
척후로 몇 년을 활약한 덕에, 이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었다.
‘게다가 테페로스. 이것도 성능이 확실하네.’
나는 지난번, 고민수에게서 받아온 검은 군화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주 미세한 발소리까지 없애 주는 기능 덕에 움직이기가 더욱 수월했다.
“…후우.”
근처의 골렘들이 나를 지나간 후, 나는 최대한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 후, 나는 허리 쪽에.
정확히는 허리의 작은 쇠상자에 손을 가져갔다.
휘리릭―
쇠상자에서 와이어를 뽑아내, 와이어를 근처의 기둥을 향해 던졌다.
나는 와이어에 몸을 맡긴 채 빠르게, 그리고 조용히 움직였다.
‘어디 보자. 일단 이 층의 구조와 몬스터의 수는 전부 파악했으니까…….’
나는 와이어를 또다시 이용해 계단 쪽으로 향했다.
‘이제 아래층으로 가 보자. 그리고 지하 몇 층까지 있는지도 확인해 보고.’
꽤 오랜만에 하는 척후 일.
그럼에도 내 실력은 여전했다.
약 30분 뒤.
“게이트는 총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게이트의 코어는 가장 아래층에 있어요.”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하세리와 이민아에게 게이트 내부의 정보를 공유했다.
“위층부터 아래층까지 순서대로. 층마다 305마리, 410마리, 570마리의 몬스터들이 있어요.”
“아래층이 가장 수가 많네요.”
“그럴 수밖에 없죠. 방금 말한 것처럼 가장 아래층에 게이트의 코어가 있거든요.”
“하긴, 그렇겠네요.”
하세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설마, 게이트의 코어까지 보고 온 건가요?”
“네.”
“혹시 게이트의 코어를 지키는 몬스터는…….”
“저희가 아까 예상한 대로 아이언 골렘이 있더라고요.”
“아이언 골렘이라.”
“뭐, 몬스터에 관한 건 차근차근 설명드리도록 할게요. 우선은…….”
나는 코트 주머니에서 종이와 펜을 하나씩 꺼냈다.
“게이트의 약도부터 그릴게요. 잊기 전에 빨리 그려야 되거든요.”
바닥에 앉아, 방금 갔다 온 게이트의 대략적인 구조를 그렸다.
약도를 완성한 후, 그걸 하세리와 이민아에게 건넸는데…….
“와, 박유진. 너 뭐냐?”
이민아는 감탄과 함께 내가 건넨 약도를 바라봤다.
“그림 왜 이렇게 잘 그려? 게다가 약도가 엄청 자세하다?”
“척후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민아는 감탄스럽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근데 게이트 한 번 갔다 온 걸로 이걸 다 기억한 거야?”
“응. 그게 왜?”
“내 지인들 중에 10년 동안 척후만 하신 분이 계시는데, 그분도 이렇게는 못 하겠다.”
“뭐, 사람마다 잘하는 것이 다 다르니…….”
“이민아 양의 말이 맞아요.”
조용히 내 약도를 감상하던 하세리가 입을 열었다.
“대부분의 척후들은 게이트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도 버거워하는데, 박유진 씨는 다르네요.”
붉은 머리의 헌터는 나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매우 자세한 약도, 게이트의 몬스터 수를 완벽히 파악했고, 거기다 종류들까지 전부 알아 오셨어요. 그 외에도 지금 약도에 건질 만한 아이템의 위치들까지 다 적혀 있고, 그것 말고도 많아요.”
“…척후라면 이 정도는 해야죠.”
“그쵸. 프로 척후라면 이 정도는 당연히 해내는 게 맞죠. 하지만 박유진 씨는 프로가 아니시잖아요.”
나를 바라보는 하세리의 눈빛이 약간 위험하게 빛났다.
“박유진 씨의 재능은 보면 볼수록 대단하네요. 전류를 다루는 것부터 시작해, 전투 능력, 거기다 척후로서의 능력까지. 네, 대단하네요.”
“저를 너무 후하게 평가하시네요.”
“이 정도면 오히려 과소평가죠.”
그래서 더더욱 탐이 나네요, 라고 하세리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진짜 제 밑에 들어올 생각 없나요? 저는 박유진 씨의 이 재능들을 그 누구보다 잘…….”
“하세리 헌터님. 저는…….”
“게이트 토벌부터 마저 하죠.”
나와 하세리의 대화에 이민아가 끼어들었다.
“게이트를 놔두고 시간을 너무 오래 끄는 것도 좋지 않다고…….”
“제가 박유진 씨에게 달라붙는 게 그렇게 신경 쓰이나요?”
하세리는 피식 웃으며 이민아에게 말했다.
“아까부터 저를 견제하고 계시는데, 박유진 씨를 뺏길까 봐 걱정되면, 그냥 이민아 씨도 같이 제 편으로 들어오도록 하세요. 저는 이민아 씨의 잠재력을 최대로 끌어낼 자신이…….”
“그런 거 아니에요.”
이민아는 하세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하세리 헌터님은 뭔가 위험해 보여요. 그리고 저는 제 친구가 제 발로 위험에 걸어가는 걸 원치 않아요.”
“제가 위험하다고요? 헌터 협회 소속의 A급 헌터인 제가요? 수많은 사람들을 구한 제가, 위험하다고요?”
“근거는 없어요. 하지만 제 본능이 말해 주고 있어요.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바로 하세리 헌터님이라고요.”
“이민아 양. 방금의 그 발언은 저에 대한 모욕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히…….”
“그쯤 하도록 하죠.”
이번에는 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제가 하세리 헌터님과 함께하는 건, 게이트 토벌 끝나고 이야기하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당장은 이민아 말대로 게이트 토벌부터 빠르게 마무리하도록 해요.”
“…네, 그렇게 하죠.”
하세리는 잠시 이민아를 바라보다가, 이내 웃으며 내게 말했다.
“박유진 씨의 정찰 덕에 토벌이 빨리 끝날 거 같네요. 그러니 빨리 끝내고, 이따 이야기 마저 해요.”
“네, 알겠어요.”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하세리에게 대꾸했다.
그런 후, 나는 내 옆의 이민아를 바라봤다.
‘늑대인간의 감이 좋기는 하네.’
이민아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늑대인간으로서의 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감은 예언 수준으로 정확했다.
방금처럼 말이다.
‘이 자리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하세리가 맞으니까.’
정확히는 하세리가 위험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하세리라는 사람 자체가 불러올 위험이 제일 크기는 했다.
* * *
‘역시 이진성 씨의 딸이구나.’
게이트에 진입한 지 약 10분이 지난 후.
하세리는 앞에서 싸우는 이민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B급 헌터에, 아직 완벽히 성장을 한 것도 아니야. 하지만 그럼에도 저 정도로 싸우다니. 대단하네.’
완벽히 변신한 게 아닌, 신체의 일부분만 늑대인간의 것으로 변신해 싸우는 이민아.
그럼에도 그녀는 훌륭하게 싸우고 있었다.
‘물론 미숙한 구석이 있어. 특히 전투 경험이 부족하다는 게 눈에 띄지만, 그건 많이 싸우게 하면 해결될 문제야.’
아쉬운 점은 그 외에도 있었지만, 하세리의 기준에서 이민아는 합격이었다.
“야! 들어와! 쫄았냐! X발, 붙어 보자고, 개새끼들아!”
물론 흠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공격도 잘 받아 내고 전투력 자체도 나쁘지 않아.’
보통 탱커들은 공격적인 측면보다 방어적인 측면에 집중했다.
하지만 이민아는 방어도 공격도, 전부 대단했다.
주먹 한 방에 스톤 골렘을 쓰러뜨리는 것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저런 인재를 용혈 길드에만 두는 건 아깝지.’
하세리는 이미 이민아까지 자기 편으로 데려오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아까 박유진이 했던 말이 아예 신경 안 쓰이는 건 아니었다.
이민아에게 관심을 가지지 말라던 박유진의 진지한 한 마디가 신경 쓰였지만, 이민아는 이내 그 생각을 털어 넘겼다.
강력한 헌터들을 키우는 거야말로, 하세리의 가장 큰 낙이었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박유진도 나쁘지는 않네.’
전방에서 몬스터들의 시선을 끌며 싸우는 이민아.
얼핏 보면 이민아가 혼자 싸우는 걸로만 보였다.
하지만 하세리의 눈에는 또 다른 헌터의 전투가 확실히 보였다.
휘리릭―!
휙―!
바람을 가르는 와이어 소리.
“구워워워!”
곧바로 골렘의 비명이 들려왔다.
단검에 의해 핵이 파괴당한 골렘들이 쓰러진 것이었다.
‘전형적인 암살자네.’
모든 시선이 이민아에게 끌려 있는 동안, 박유진은 골렘들에게 몰래 다가갔다.
그리고 골렘들의 핵을 깔끔하게 파괴했다.
그 어떠한 골렘도 박유진의 그러한 접근을 눈치 못 챘다.
눈치챘다 해도, 박유진은 잡힐 틈을 안 줬다.
그는 와이어를 이용해 빠르고 조용히 거리를 벌렸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E급 헌터의 움직임이 아니야.’
하세리의 눈으로 봤을 때는 박유진은 최소한 C급이었다.
‘E급 헌터가 골렘들을 저렇게 쉽게 잡는 건, 흔치 않지.’
E급 헌터면서 4급 게이트에서 성과를 내고, 나아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전류의 활용과, 전문가 못지않은 몬스터에 대한 엄청난 지식들까지.
박유진을 보면 볼수록, 하세리는 그가 크게 될 헌터라는 걸 더욱 확신했다.
“박유진 씨, 이민아 양! 수고했어요!”
하세리는 두 사람의 전투를 조금 더 지켜보다가 이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불렀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할 테니, 두 사람은 이제 쉬도록 하세요.”
“네?”
이민아는 갑작스러운 하세리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으나…….
“알겠어요.”
박유진은 예상했다는 듯, 조용하고 빠르게 하세리 뒤쪽으로 몸을 옮겼다.
“음? 박유진? 뭔 상황이야? 하세리 헌터님, 무슨 말씀이시죠?”
“말 그대로예요.”
화르르륵―!
하세리 주위로 타오르기 시작한 붉은 화염.
그 화염은 앞으로 날아가, 이민아가 홀로 상대하던 골렘 무리를 순식간에 녹여 없앴다.
“원래 이 게이트, 제가 혼자 토벌하기로 했다는 거 알고 계시죠?”
“아, 그러고 보니…….”
“네. 이 게이트는 사실 저 혼자서도 충분히 토벌이 가능한 게이트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제가 박유진 씨와 이민아 양을 부른 건,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째, 라고 말하며, 하세리는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저는 두 사람이 실전에서 어떻게 싸우는지 보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두 분은 역시 저를 실망시키지 않았어요. 오히려 두 분의 실력은 제 기대 이상이었어요.”
“…….”
“둘째 이유는, 두 분께 제 실력을 보여 드리고 싶었거든요.”
“구워우어!”
쿠우우웅!
저 멀리서 다가오는, 엄청난 수의 골렘 무리.
상당히 위협적인 광경이었지만, 하세리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두 분, 솔직히 헌터 협회에 들어와서 저랑 함께할 생각이 없으시죠?”
“네, 없죠.”
박유진은 바로 대답했고.
“네, 저는 제 아버지와 같이 용혈 길드에서…….”
이민아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에 하세리는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선, 저의 진정한 힘을 한 번 감상해 주세요.”
화르르륵―!
하세리 주위의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
“저는 두 분을 저와 동일하거나, 그 이상의 수준으로 키워 낼 자신이 있거든요. 그러니 잘 보고, 다시 생각해 보세요.”
하세리의 이 말과 함께, 거대한 불길이 게이트 내부를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