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 * *
“박유진 씨! 여기에요, 여기!”
고연대학교에서 약 3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카페.
그 카페에 들어서자, 창가 근처에 자리를 잡아 놓은 주하나가 나를 불렀다.
“오랜만이네요.”
“네, 박유진 씨. 오랜만이네요.”
눈보다도 하얀 머리를 지닌 힐러는 미소와 함께 나를 반겨 주었다.
“바로 와 주셔서 고마워요. 제가 전화하자마자 오실 줄은 몰랐는데.”
“주하나 씨께서 부른 거잖아요. 그럼 바로 가야죠.”
나는 주하나 앞자리에 앉으며, 옅게 미소를 지었다.
“제가 주하나 씨께 큰 빚을 졌으니까요.”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더 큰 빚을 박유진 씨께 지고 있는걸요.”
“후훗, 그런가요?”
주하나는 모르겠지만, 회귀하기 전의 나는 그녀에 의해 목숨을 구원받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 이 힐러에게 진 빚을 이번 생에 갚고자 했다.
“근데 박유진 씨 괜찮은 거죠? 혹시 제가 수업 시간 중에 불렀다거나 그런 거는…….”
“그런 건 아니에요. 저 오늘 수업 다 끝난 참이었거든요.”
“아, 그럼 다행이네요.”
“네, 뭐…….”
물론 이민아와 밥 먹던 도중에 빠져나온 거라, 덕분에 그녀는 또 삐지게 되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 끝나고 다음에 만나면, 이민아의 기분을 조금 풀어 줘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근데 그건 그렇고, 이번 일이라면…….
“아무튼, 바로 본론에 들어가죠.”
“네? 아, 네.”
“김민호 씨가 실종되었다고요?”
“네, 지금 연락조차 안 되고 있어요.”
주하나는 표정이 확 어두워진 채 걱정스럽게 말했다.
“길드에 매일매일 나오시던 분이었는데, 갑자기 출근을 안 하셨어요.”
“김민호 씨가 모습을 안 보인 지 얼마나 됐죠?”
“오늘로 정확히 일주일 됐어요.”
“일주일. 흐음. 경찰에 신고는 했고요?”
“네. 길드장님이 모습을 안 보인 지 3일째 되던 날에 신고했어요. 하지만…….”
주하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전혀 진전이 없었어요. 경찰분들이 열심히 안 했다는 건 아니에요. 그분들은 그분들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했음에도 단서가 안 나왔나 보네요.”
“네. 말 그대로 갑자기 사라진 거라, 전혀 실마리가 안 보이는 중이에요.”
암살자 일을 하면서, 나는 이런저런 더러운 일들을 많이 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때의 경험이 내게 말해 주고 있었다.
김민호가 사라진 건, 누군가에 의한 납치 때문이라고 말이다.
“상황은 잘 알겠네요. 근데 주하나 씨?”
“네?”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 제가 김민호 씨 찾는 데 도와주기를 바라시는 거죠?”
“네… 그렇죠.”
“굳이 저를 부른 이유가…….”
“특별한 이유는 아니에요.”
주하나는 멋쩍은 듯이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도움의 손길이 간절한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저를 도와줄 사람 없나 고민하다가 박유진 씨가 바로 생각난 거예요. 지난번에 저랑 헤어지면서 말씀하셨잖아요.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거나 혼자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일이 있으면…….”
“바로 제게 연락하라고 했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잘 연락하셨어요. 이번 일, 제가 최대한 도와드릴게요.”
“고마워요, 진짜로. 염치없겠지만 부탁드릴게요.”
“그럼 바로 시작해 보죠. 우선, 김민호 씨를 찾기 위해 지금 길드원들 모두가 나서는 중인가요?”
“네, 지금 전부…….”
“전부 맞나요?”
“네?”
“길드원들 전부는 아닌 거 같아서요.”
나는 주하나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까 제게 전화할 때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김민호 씨가 실종됐다고, 그리고, 정수민 씨가 수상하다고 말이에요.”
“…네, 그쵸. 정수민 씨가 지금 수상하죠.”
주하나는 여러모로 복잡한 표정이었다.
“문제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거죠.”
“음. 그러고 보니 지난번 칠보산 게이트 토벌 이후에 정수민 씨는 어떻게 됐나요?”
“감봉 받고, 헌터 협회에서 조사받는 걸로 끝났어요. 하지만 헌터 업계에서 평판이 나락으로 떨어졌죠.”
“하기야, 몬스터한테서 도망친 헌터는 좋은 대우는 못 받죠.”
“네, 그리고 제 생각일 뿐이지만 아마 그 과정에서, 정수민 씨가 길드장님에게 앙심을 품게 됐을 거예요.”
“아마 맞을 거예요. 정수민 씨 같은 사람들은 보통 그렇거든요.”
나 또한 다양한 인간들을 만나 봐서 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무튼 주하나 씨는 지금 정수민 씨가 김민호 씨의 실종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네, 맞아요.”
“확실히, 정수민 씨는 김민호 씨를 납치할 동기 자체는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문제는 증거가 아예 없다는 거죠.”
나는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혹시 김민호 씨나 정수민 씨 집 근처의 CCTV나 근처 차량들의 블랙박스는 전부 확인했나요? 그중에 뭐라도 단서가…….”
“다 확인했고, 특별한 건 없었어요. 박유진 씨 말씀대로, 지금 증거가 아예 없는 상황이에요.”
“그렇다면 이번 일이 생각보다 어려운…….”
“하지만 증언은 있어요.”
“증언이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이에 주하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나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길드에서 정수민 씨가 통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요. 그리고 그때 분명 ‘김민호, 그 새끼 원하는 곳에 놔뒀으니까 더 X랄하지 마. 그리고 내일 저녁에 돈과 내가 요구한 물건 받으러 갈 거니까 제대로 준비해 놓기나 해.’라고 말했어요.”
“…확실한 건가요?”
“제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확실해요.”
“주하나 씨가 엿듣고 있는 걸 정수민 씨가 눈치챘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없을 가능성이 높아요.”
주하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마법으로 소리를 완전히 줄이고 엿들었거든요.”
“알겠어요. 그렇다면…….”
나는 잠시 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정수민이 김민호를 진짜로 납치했다고 치자. 그리고 방금 주하나가 알려 준 것에 따르면, 지금 정수민은 김민호를 어딘가에 팔려는 듯했어.’
암살자 시절에 나는 대한민국의 어두운 면들을 거의 대부분 목격했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 행해지는 납치나 인신매매 등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다.
‘만약 김민호가 아직 서울에 있다면, 아마 높은 확률로 그곳이겠지.’
애초에 서울에서 인신매매가 이루어질 만한 곳은 딱 한 곳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근데 그보다, 정수민이 돈과 요구한 물건을 받으러 간다고 했지?’
돈이야 그렇다 쳐도 요구한 물건이라.
정수민이 뭘 얻으려는 건지 모르겠다만, 느낌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결정했다.
“그 통화를 엿들은 게 언제였죠?”
“어제였어요. 어제저녁 8시쯤, 길드 1층 복도에서 들었어요.”
“그리고 그 통화 내용에 ‘내일’ 돈과 물건을 받으러 간다고 했죠?”
“네, 그렇다는 건…….”
“오늘 정수민 씨가 움직이겠네요.”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이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것에 대해 아는 사람, 저 말고 또 있나요?”
“아니요. 아직 없어요. 경찰에 바로 신고할까 고민했는데, 일단 그 전에 뭔가 박유진 씨에게 상담을 받고 하는 편이 나을 거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잘하셨어요.”
나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마 경찰에 말했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겠죠. 주하나 씨의 증언만으로 정수민 씨를 못 잡았을 거고, 경찰이 움직였다 쳐도 시간이 오래 걸렸을 거예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일단 박유진 씨에게 도움을 요청한 거예요. 제가 여기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
“지금부터 해야 할 건 간단해요.”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정수민 씨가 이 일의 주범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찾아내야죠.”
“어어어, 네. 그렇긴 한데, 그걸 어떻게 할 생각이시죠?”
“지금 정수민 씨, 어디에 있는지 아나요?”
“아마 아직 길드에 있을 거예요. 제가 길드에서 나올 때만 해도 있었거든요.”
“흠, 그렇다면 주하나 씨.”
“네?”
“제가 오늘 카시아 길드를 방문해도 괜찮을까요?”
* * *
카시아 길드는 서울 한복판에 있는 평범한 건물에 위치해 있었다.
서울에 흔히 보이는 5층 높이의 건물.
그 건물의 3층부터 5층까지가 카시아 길드의 본사였다.
이제 막 생겨난 신생 길드답게,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박유진 씨. 오랜만이네요?”
“아아, 네. 그, 이수정 씨였죠?”
“네, 맞아요.”
카시아 길드의 여성 길드원이 나를 친절히 맞이해 줬다.
“하나 씨에게 들었어요. 길드장님 찾는 거 도와주러 오셨다면서요?”
“네, 전에 한 번밖에 뵙지 못했지만 나름 인연이 있던 분이었는데,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거죠.”
“진심으로 고마워요. 안 그래도 저희에게 사람 한 명이라도 더 있었으면 했거든요.”
이수정은 작게 한숨을 쉬며 카시아 길드를 둘러봤다.
현재 내가 위치한 건 건물의 4층.
그리고 그 4층에 있던 모든 카시아 길드원들이 바빠 보였다.
전부 전화를 걸고, 인터넷을 뒤져 보는 등, 길드장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전부 김민호 씨를 찾으려는 건가요?”
“네, 그렇죠. 길드장님이 평소에 인망이 좋은 편이라, 실종되자마자 다들 나서서 찾으려고 하더라고요.”
“좋으신 분인 거 같더라고요. 뭐, 아무튼. 저도 최대한 도와드릴게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그럼, 혹시 이거 봐주실 수 있나요?”
이수정은 근처에 놓여 있던 태블릿을 내게 건넸다.
그 태블릿의 화면에는 어느 아파트 단지의 CCTV 녹화본이 띄워져 있었다.
“길드장님이 사시는 아파트 단지의 CCTV 영상이에요. 힘들게 구해 온 건데, 여기서 혹시라도 단서가 될만한 걸 찾아 줄 수 있을까요?”
“네, 당연하죠.”
“고마워요. 그럼, 아아. 경찰에게 전화가 또……. 미안해요, 박유진 씨. 혹시라도 필요한 거 있으면 저 부르세요.”
이 말을 끝으로 이수정은 전화를 받으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나는 분주한 카시아 길드원들을 지나, 창가 쪽에 비어 있는 자리 쪽으로 갔다.
‘어디 보자. 이 자리는 건물의 입구 쪽이 다 보이니까 합격이고, 지금 정수민은…….’
나는 태블릿을 보는 척을 하며 고개를 살짝 들었다.
내게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정수민이 앉아 있었다.
그는 열심히 컴퓨터 모니터를 보는 듯했지만, 내 눈에는 확실히 보였다.
정수민은 지금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분명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박유진 씨.”
“아, 주하나 씨.”
정수민을 조용히 감시하던 중, 주하나가 내 곁에 다가왔다.
“혼자 놔둬서 미안해요. 제가 지금 길드장님 업무를 임시로 대신 맡기로 해서 할 게 있었거든요.”
“괜찮아요. 그보다 주하나 씨.”
“네?”
“혹시 이 건물에 후문 같은 게 있을까요?”
“1층에 하나 있기는 하죠?”
“그럼 혹시 그 후문을 몰래 감시해 줄 수 있을까요?”
나는 저 멀리 구석에 혼자 있는 정수민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만약 그 후문으로 정수민이 빠져나가면 바로 제게 연락 주세요.”
“알겠어요.”
“네. 아, 그리고 칠보산 게이트 이후로, 정수민 씨는 길드 내에서 혼자 다니게 됐나요?”
지금 카시아 길드원들 대부분이 협력하면서 일을 진행했다.
혼자서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는 건 정수민이 유일했다.
“네. 말씀드린 것처럼 그때 이후로 평판이 나락으로 떨어져서, 가까이 지내려는 사람들이 사라졌죠.”
“알겠어요. 아무튼, 후문을 잘 봐주세요, 알겠죠?”
“네, 맡겨 주세요.”
그렇게 주하나는 내게서 멀어졌고, 나는 다시금 창가에 몸을 기댄 채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중간중간 이수정 씨를 비롯한 몇몇 길드원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에 나는 대답을 하면서도, 정수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수민이 나를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몇 번 바라보는 걸 확인했다.
아무래도 여전히 나에 대한 악감정이 남은 듯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어디 보자, 내가 이 건물에 들어왔을 때가 대충 3시였고…….’
시계를 보니 어느새 5시 30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정수민은 자기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움직인다.’
5시 30분, 그러니까 퇴근 시간이 되어 몇몇 길드원들이 퇴근하기 시작하자, 정수민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그는 계단을 통해 내려갔고, 그러고 몇 분 후.
위잉―
주하나에게서 문자가 왔다.
[박유진 씨. 정수민 씨가 후문으로 나갔어요.]
문자를 확인한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