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하윤경이 여기를 왜…….’
나는 잠시 의문이 들었으나,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바로 생각해 냈다.
‘하긴. 실험을 위한 재료들 대부분을 이 암시장에서 구했을 테니까.’
애초에 이렇게 거래할 수 있는 장소는 서울에서 이곳 외에는 없었다.
그렇기에 하윤경이 이 암시장에 나타난 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상황을 정리해 보자.’
나는 밖에 있는 하윤경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하윤경은 실험을 위해 살아 있는 인간이 필요했어. 그래서 암시장에 의뢰를 했을 테고, 정수민이 어쩌다가 그 의뢰를 맡게 된 거야. 그리고 그렇게 해서 정수민이 김민호를 납치한 거고.’
정수민이 어쩌다가 이 암시장을 알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었다.
근데 정수민에게 의뢰한 대상이 하윤경이라는 건 참… 우연의 일치겠지만, 우연치고는 참 기묘했다.
아니면 그냥 내가 운이 없는 것일지도.
‘아무튼 김민호를 사려는 사람은 하윤경인데, 이거 참 곤란하네.’
다른 어중이떠중이면 몰라도, 하윤경은 골치 아픈 상대였다.
저 아줌마에게 잘못 걸렸다가는 여러모로 귀찮아질 터였으니 말이다.
“건강해 보이네요.”
김민호를 살피던 하윤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못 미더웠지만, 정수민이 잘 해 준 거 같네요. 들은 바에 의하면 정수민, 그 남자는 헌터 중에서도 폐급이라던데.”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남자 한 명만 납치해 오는 건데, 암만 폐급 헌터더라도 그 정도는 합니다.”
“후훗, 그런가요?”
하윤경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정수민은 어디에 있죠?”
“일단 휴게실로 보내 놨습니다. 하윤경 님이 늦는다고 하도 조잘거려서 말입니다.”
“속 좁은 인간인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후우, 고생이 많으시네요.”
하윤경은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은 후, 다시금 키 작은 남자에게 물었다.
“아무튼 정수민이 요구한 건 돈과 STX―4387 약물, 맞죠?”
“예, 맞습니다.”
“그럼 전부 맞게 준비됐네요. 정수민은 지금 휴게실에 있다고 했죠?”
“예, 그렇습니다. 안내해 드립니까?”
“아니요, 여기 길은 다 알고 있거든요. 대신, 저쪽 3번 입구에 돈과 약물이 담긴 캐리어를 놓고 왔는데, 그것을 가져와 줄 수 있을까요?”
“당연히 가능합니다. 그럼 먼저 휴게실에 가고 계시면, 제가 하윤경 님의 그 캐리어를 가지고 가겠습니다.”
이 말과 함께 키 작은 남자는 먼저 자리를 떴다.
그리고 하윤경은 감옥 안에 쓰러져 있는 김민호를 다시 바라봤다.
“…잘 구해 오기는 했네. 몸에 상처가 조금 있지만, 실험에 쓰는 데 지장이 없겠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하윤경은 이내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렇게 하윤경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는 사물함의 문을 살짝 열었다.
“안전한 거 같네요. 주하나 씨. 이제 움직여도 괜찮…….”
“아앗, 네네! 나올게요!”
내 가슴에 얼굴을 밀착하고 있던 주하나.
그녀는 상당히 빨개진 얼굴로 내게서 떨어졌다.
“주하나 씨, 괜찮으시죠? 제가 아까 급하게 들어가는 바람에 주하나 씨가 조금 불편했을 수도…….”
“아, 아니에요. 전혀 그런 거 없었어요. 오히려 제가 박유진 씨를 너무 세게 끌어안지 않았나 싶었는데…….”
“아니, 딱히 그런 느낌은 안 들었어요.”
사실 아까 저 좁은 사물함 안에서, 주하나는 나를 세게 끌어안기는 했다.
물론 두 사람이 들어가기에 워낙 작은 사물함이라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다, 다행이네요. 아, 아무튼, 길드장님 어서 빼내죠.”
“네, 그래야죠.”
나는 다시금 감옥 쪽으로 다가가, 잠금장치에 손을 뻗었다.
“혹시 아까처럼 시간이 걸리나요? 그럼 제가 다시 망을 보고 있으면…….”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나는 잠금장치에 전류를 흘려보내며 말했다.
“이번에는 1분이면 끝날 거예요.”
아까 5분 넘게 걸린 건, 이 장치의 구조를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구조 파악을 다 했으니, 잠금을 푸는 건 금방이었다.
파지직―
나는 잠금장치 안으로 전류를 조금씩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던 주하나는 이내 의문이 생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박유진 씨, 원래 전류 관련 능력을 지녔었나요?”
“네. 그랬죠. 왜요?”
“박유진 씨가 전류를 쓰는 건 처음 봐서요.”
“하긴, 그렇겠군요.”
지난번 칠보산 게이트 토벌 당시에 전류를 한 번도 안 썼으니 말이다.
“근데 박유진 씨의 능력은 이능력 흡수라거나, 그런 쪽 아니었나요?”
“…네?”
이건 또 뭔 소리지?
“칠보산 게이트를 토벌할 때, 박유진 씨께서 그 늑대가 날린 불덩이를 흡수했잖아요.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박유진 씨가 이능력이나 에너지를 흡수하는 능력을 지닌 줄 알았어요.”
“아, 그러고 보니…….”
헬하운드를 잡을 당시에 자바니아의 힘을 대놓고 썼었다.
주하나는 자바니아의 능력을 내 능력이라 착각했던 것 같다.
“그때는 아이템을 쓴 거예요.”
“아이템이요?”
“네. 불덩이를 흡수한 건 제 능력이 아니라 아이템의 능력이었죠. 그리고 제 능력은 보시다시피…….”
파지직―
나는 잠금장치 안으로 전류를 약간 더 흘려보냈다.
“이런 식으로 전류를 다루는 것이죠.”
그나저나 이 잠금장치.
이 정도 했으면 열릴 법도 한데, 왜 안 열리는…….
철컥―
“…됐다.”
감옥 문이 열리는 걸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었어요. 어서 들어가죠.”
“네.”
나는 주하나와 함께 작은 감옥 안쪽으로 들어갔다.
“김민호 씨. 괜찮으세요? 김민호 씨.”
나는 감옥 안에 쓰러져 있던 김민호를 흔들었으나, 그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죽은 건 확실히 아닌데, 도저히 눈 뜰 기미가…….
“이번에 제가 해 볼게요.”
하얀 머리의 힐러는 김민호 곁에 앉아, 그의 목에 손을 가져갔다.
“근데 저도 시간이 조금 필요할 거예요. 그래서 박유진 씨, 괜찮다면 저 대신을 망을 봐 줄 수 있을까요?”
“당연히 가능하죠.”
“네, 그럼…….”
주하나는 한 손을 김민호의 목, 그리고 반대 손을 김민호의 가슴에 올린 채 마법을 발동했다.
그러자 김민호 주위로 하얀빛이 나기 시작했다.
“물과 흙은 살과 피가 되고, 생명력은 이 안에 있으니. 이 모든 것으로…….”
주하나는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마법을 계속해서 발동했다.
그렇게 약 1, 2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으윽. 쿨럭!”
“길드장님!”
“으으, 하, 하나 씨?”
김민호는 눈을 뜨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 여기는 대체…….”
“괜찮으신가요?”
“…바, 박유진 씨? 박유진 씨는 왜…….”
김민호는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그는 이내 점차 상황을 파악하는 듯했다.
“정수민. 그 개새끼가 나를…….”
“기억이 나시나요?”
나는 김민호 곁에 몸을 낮추며 물었고, 이에 카시아의 길드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따로 할 이야기가 있다며 제 집에 찾아오더니, 제 목에 냅다 주사기를 꽂았죠. 그리고 눈을 다시 떠 보니까, 이 감옥 안이었어요.”
“다음부터는 사람을 함부로 집에 들이지 마세요.”
나는 주변에 누가 없는지 빠르게 확인한 후, 다시금 입을 열었다.
“걸을 수 있겠어요?”
“네. 일주일 동안 제대로 못 먹기는 했지만, 걷는 것 정도는, 으윽? 어엇?”
“길드장님!”
김민호가 휘청거리며 쓰러지려고 하자, 주하나가 재빨리 그를 부축해 줬다.
“뭐, 뭐지? 내가 분명 제대로 치료를…….”
“주하나 씨는 치료를 제대로 했을 거예요.”
나는 김민호의 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목에 주사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치료를 해도 해결이 안 되는 것도 있는 법이죠.”
정수민이 썼다는 그 주사기.
하윤경에게서 받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하윤경은 평범한 약물을 제공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김민호 씨. 주하나 씨의 부축을 받으며 걸을 수는 있나요?”
“아, 아마 가능할 거 같아요. 그보다 여기가 어디죠?”
김민호는 주위를 둘러보며 의문을 표했다.
자기가 끌려온 이곳이 어디인지 감도 못 잡는 듯했다.
“저 말고도 여기에 사람들이 엄청 많이 갇혀 있는데, 무슨 일종의 감옥 같은…….”
“대림동에 위치한 암시장이에요.”
“…대림동에 암시장이 있었어요?”
“네, 있어요. 보통은 그 사실을 잘 모르지만요.”
나는 대충 대꾸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다가오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후, 나는 재빨리 탈출 계획을 세웠다.
지금으로서 가장 좋은 방법은… 아마 이거 하나였다.
“주하나 씨. 김민호 씨를 데리고 저쪽 방향으로 먼저 가세요.”
“네?”
“쭉 가다 보면 갈림길이 나올 텐데, 왼쪽으로 가도록 하세요. 그 방향으로 가다 보면 엘리베이터가 하나 나올 텐데, 그 엘리베이터 타고 지상으로 먼저 올라가세요.”
“엘리베이터요? 여기에 엘리베이터가 있었어요?”
“네, 뭐. 하나 있죠.”
“그걸 박유진 씨가 어떻게 알고 계신…….”
“설명하자면 길어요. 나중에 설명해 드릴 테니 어서 가세요.”
회귀하기 전에 이곳을 자주 들려서 알게 됐다고 말하기 참 곤란했으니 말이다.
‘아마 지금 시간에 엘리베이터를 쓰는 사람이 없겠지.’
내가 방금 말한 그 엘리베이터는 이 암시장을 관리하는 간부들이 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다른 시간대였으면 간부에게 걸릴 가능성이 높아 절대 이용 안 했겠으나, 지금은 암시장에 한창 손님이 많을 시간대였다.
즉, 암시장을 관리하기 바쁜 간부들은 엘리베이터를 안 탈 가능성이 높았다.
“박유진 씨는요?”
이번에는 김민호가 내게 의문을 표했다.
“왜 저희 보고 먼저 가라는 거죠?”
“김민호 씨가 탈출했다는 걸 알면, 분명 쫓아올 거예요.”
나는 이 암시장에 대해 나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지하 3층에서 도망친 자들이 결국 어떻게 되는지도 잘 알았다.
“제가 시선과 시간을 끌게요. 그러는 동안 먼저 올라가고, 여기서 최대한 멀리 도망가세요.”
“안 돼요, 박유진 씨.”
주하나가 고개를 저으며 내게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박유진 씨를 두고 갈 생각 없어요. 게다가 너무 위험해요. 아무리 박유진 씨라도 혼자서 모든 시선을 끌면…….”
“주하나 씨.”
“네?”
“저 믿으시죠?”
“네, 그야 당연히 믿죠.”
“그럼 이번에도 저를 믿어 주세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이에 주하나는 잠시 나를 말 없이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다치지 마세요.”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 마요. 게다가 애초에 제가 직접적으로 뭘 할 거는 아니거든요.”
“네? 그게 무슨 뜻이죠?”
“뭐, 그런 게 있어요.”
나는 고개를 돌려, 다른 감옥들 쪽을 바라봤다.
수백의 사람들이 갇혀 있는 감옥 문들의 잠금장치.
방금 내가 열었던 김민호의 감옥과 같은 것이었다.
파지직―
나는 혹시나 해서 근처의 잠금장치들에 전류를 날렸고…….
‘역시 전부 똑같은 구조야.’
동일한 구조임을 파악했다.
이렇게 되면, 일이 매우 쉬워졌다.
“아무튼, 주하나 씨, 김민호 씨. 엘리베이터 타고 먼저 올라가세요. 그리고 지상에 도착하면, 제게 문자 하나만 주세요. 알겠죠?”
* * *
그렇게 주하나와 김민호가 먼저 떠난 지 약 5분 정도가 지난 후.
[박유진 씨. 지상에 도착했어요.]
주하나에게서 문자가 왔다.
“생각보다 빨리 빠져나갔네.”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같았으면, 김민호가 탈출했다는 걸 들키자마자 바로 추격조가 쫓아갔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그럴 일이 없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이 약을 먹으면 효과를 바로 볼 수 있다는 거죠?”
“네, 정수민 씨. 맞아요. 하지만 여기서는 드시지 마시고 이따 혼자서 드세요. 그리고 돈은 전부 확인됐죠? 그럼 앞으로 딴말하지 마세요, 알겠죠?”
“네,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 멀리서 들려오는 정수민과 하윤경의 말소리.
목소리 크기로 봤을 때 그리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엄청 먼 거리 또한 아니었다.
즉, 나는 이제 슬슬 움직여야 했다.
“흐음.”
나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살려 줘!”
“제발! 집에, 집에 보내 줘!”
“나 죽기 싫다고!”
수많은 감옥에 갇힌 수많은 사람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전부 살려 드릴게요. 그러니.”
파지지직―!
내 양손에서 뿜어져 나온 엄청난 양의 전류.
그 전류들은 근처의 수많은 잠금장치들을 향해 날아갔다.
철컥―!
철컥―!
철컥―!
그러자 굳게 잠겨 있던 감옥의 문이 순식간에 열렸다.
그것도 하나만 열린 게 아닌, 근처에 있던 모든 게 열린 것이었다.
“그러니 저 대신, 시간과 시선 좀 끌어 주세요.”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어어? 가, 감옥이 열렸어?”
“문, 문이 갑자기…….”
수십 개의 감옥들이 갑자기 동시에 열리자, 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을 뿐.
“와아아아아!”
“나가자! 이 X 같은 곳을 탈출하자!”
감옥에 갇혔던 사람들은 전부 밖으로 우르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