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다들 도망치자!”
“이쪽이야! 이쪽에 계단이 있어!”
“어서 여길 나가자!”
지하 3층에 갇혀 있던 수백의 사람들.
내가 그들을 풀어 주자,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난장판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근처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슬쩍 돌리자, 키 작은 남자가 보였다.
아까 하윤경과 같이 있던 그 남자였다.
“잠금장치들이 왜… 대체 어떻게 열린…….”
남자는 당황한, 그리고 동시에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정황상, 이 지하 3층은 저 남자가 관리하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만약 이 일이 암시장의 주인, 그러니까 김진철의 귀에 들어간다면…….
‘곱게 끝나지는 않겠지.’
김진철, 그 인간의 성격상 실수한 부하에게 자비를 안 베풀 터였으니 말이다.
근데 그건 그렇고, 저 남자는 저렇게 멍때릴 틈이 없을 거다.
“야! 저 새끼! 저 키 작은 새끼!”
“저 새끼 잡아!”
“우리를 전기 충격기로 갖고 놀던 놈이야! 잡아 족쳐!”
그도 그럴 게, 감옥에 갇혔던 사람들이 저 남자에게 좋은 감정을 품은 거 같지가 않았으니 말이다.
“으, 으아아! 경비! 지금 지하 3층의 감옥들이 전부 열려, 이곳에 지금 난동이… 크악!”
“이 새끼 밟아!”
“카아악! 경비! 경비!”
키 작은 남자는 무전기에 소리치며 발버둥 쳤지만, 그 발버둥은 오래 가지 않았다.
감옥에 갇혔던 사람들의 원한이 상당했던 탓에, 그 남자는 얼마 못 가 정신을 잃었다.
“계단! 계단 어디야? 어서 여기를 빠져나가자!”
“이쪽이야, 이쪽!”
지하 3층을 가득 채운 사람들.
이곳은 감옥에 갇혔던 사람들만이 있던 게 아니었다.
“내 지갑! 야, 이거 돌려, 크윽?!”
“너희들! 가만히 있어! 당장 감옥에 안 돌아가면 쏴 버릴… 으억?!”
“총 얻었다! 이 새끼들 다 쏴 죽여!”
구매자들은 예상치 못한 봉변을 당했고, 이곳을 지키던 경비들은 무기를 탈취당하는 등.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난장판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빨리 빠져나가자.’
나는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움직였다.
‘중앙 통로의 계단은… 못 쓰겠네.’
내가 주하나와 같이 이곳에 내려왔을 때 썼던 중앙 통로의 계단.
이 암시장에서 사람들이 주로 쓰던 계단이었지만, 지금 난장판이 된 덕에 그 계단은 지금 경비들이 지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도 아마 막아 놨을 테고, 그럼 남은 건 비상계단인가?’
이 암시장의 간부들만 쓰는 비상계단이 하나 있었다.
지하 3층과 지하 2층만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계단이었지만, 당장은 그거면 됐다.
‘당장은 지하 2층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빠르게 결론을 내린 후, 나는 복도의 구석 쪽으로 갔다.
얼핏 보면 평범한 벽이었지만 그 벽을 살짝 밀자, 벽은 문처럼 열렸다.
“이거 놔! 나는 가족에게 돌아가야 된다고!”
“시끄러워! 다들 들어가! 총 맞아 뒤지 싫으면…….”
“우리도 총 있어, 개새끼들아!”
“우와와와와!”
난장판이 일어난 지하 3층을 뒤로한 채, 나는 빠르게 비상계단 안으로 향했다.
* * *
‘좋아. 지하 2층에 도착했고.’
몇 분 뒤, 나는 조용히 비상계단에서 빠져나왔다.
‘일단 아무도 날 못 봤네.’
주위를 재빠르게 둘러보며, 나는 벽으로 보이는 문을 닫았다.
이 비상계단은 간부들만 아는 거라, 혹시라도 걸리면 여러모로 곤란했으니 말이다.
“얼른 움직여!”
“김진철 님의 명령이야! 30분 안에 노예 새끼들 제압 못 하면 우리가 죽는다고!”
구석진 곳에서 천천히 나오자, 중앙 계단을 향해 뛰어가는 암시장의 간부들과 경비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 나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전부 계획대로 됐네.’
만약 김민호를 데리고 그냥 탈출했다면, 김민호가 사라졌다는 걸 금방 들켰을 거다.
하지만 감옥의 모든 사람들을 풀어 버리면, 김민호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 오래 걸릴 터였다.
‘뭐, 빨리 알아차린다 해도 바로 쫓아오지는 못하겠지.’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이 암시장의 경비 숫자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즉, 저 지하 3층의 난리를 제압하기 전까지 손이 남는 인원은 없을 예정이었다.
‘됐고, 나도 빨리 여기를 나가야지.’
이곳에 오래 있어 봤자 좋을 거 하나 없으니, 어서…….
“…어?”
조용히 계단으로 향해 지상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내 눈에 익숙한 물건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저 가면은…….’
눈 밑부터 목까지 가리는, 복면에 가까운 형태를 한 가면.
내가 회귀하기 전에 썼던 ‘실키의 가면’이었다.
그리고 그 가면은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정확히는 한 여자가 그 가면을 얼굴에 쓰고 있었다.
‘이 가면이 왜 여기에…….’
나는 의문을 가졌으나, 이내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바로 알아냈다.
‘그 가면은 나를 죽이려던 암살자에게서 가져온 것이었지.’
회귀하기 전에, 나를 죽이려던 암살자가 있었다.
실키의 가면을 쓰고 있던 암살자였다.
실력이 나쁘지 않았으나, 당시의 내 실력이 훨씬 위였다.
그래서 그 암살자를 역으로 죽이고, 쓰고 있던 가면을 내가 가져갔다.
‘그래, 암살자였지.’
암살자, 그리고 이곳은 대림동 암시장의 지하 2층.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거래, 아니.
이곳은 거래라기보다는 의뢰를 하는 곳이었다.
밀수 의뢰, 해킹 의뢰, 뒷조사 의뢰, 그리고 암살 의뢰 등, 뒤가 구린 일들을 의뢰하는 곳이 바로 이곳 지하 2층이었다.
나를 죽이려던 암살자가 이곳에 있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애초에 나도 암살자 일을, 이 암시장의 지하 2층에서 처음 시작했었으니까.
‘으음, 맞네. 나를 죽이려던 녀석이 맞아.’
가면을 쓰고 있어 눈밖에 안 보였지만,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근데 여자였구나. 머리가 짧아서 그동안 남자인 줄 알았는데.’
나를 죽이러 왔던 당시에 머리가 짧아서 당연히 남자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저 암살자의 머리카락은 길었고, 무엇보다 체형 자체가 누가 봐도 여자였다.
하지만 뭐, 그건 어찌 되어도 좋았다.
‘마침 잘 됐어. 가면을 어떻게 다시 가져오나 고민했는데, 이렇게 눈앞에 나타나 주네.’
내 마지막 주요 장비인 저 가면을 어떻게 손에 넣을지 빠르게 계획을 세웠다.
* * *
신예진.
그녀는 최근 암살을 시작한 여자였다.
그리고 오늘, 다섯 번째 암살을 마친 그녀는 다음 의뢰를 받기 위해 암시장을 방문했다.
최소한의 무기와 비싼 돈을 들여 구한 실키의 가면을 쓴 채로 말이다.
‘이번에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암살을 해 볼까? 처음 하는 거지만, 보수는 많이 주니까.’
그녀는 의뢰 목록을 보며 턱을 매만졌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다섯 번의 암살을 마친 그녀는 이제 의뢰를 받는 데 익숙해졌다.
물론 지하 3층에서 일이 터지는 등, 평소와는 살짝 분위기가 다른 암시장이었지만, 그녀와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의뢰인과 연락을 하고, 의뢰를 받고, 보수 금액을 논하면 30분이 훨씬 넘는 시간이 필요할 터였으니까.
“…음?”
게시판에 달린 의뢰 목록들을 보던 중, 신예진은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서 옆을 슬쩍 바라봤는데, 그녀의 옆에 한 남자가 있었다.
신예진이 그를 바라보자 남자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신예진은 무언가를 느꼈다.
‘…나를 미행하는 건가?’
그녀는 시험 삼아 자리를 옮겼는데, 그 남자가 따라오자 이내 확신했다.
‘미행이라.’
아직 초보 암살자였지만, 신예진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사람 없는 쪽으로 유인하자. 그리고 숨어 있다가 기습하는 거야.’
계획을 세운 뒤, 그녀는 그걸 실천에 옮겼다.
지하 2층의 천막으로 가려진 작은 구석.
신예진은 사람이 없는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구석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천막 뒤로 몸을 숨겼다.
이제 미행하는 남자가 들어서면 바로 기습을…….
“다 좋은데 말이야.”
“…헛?!”
“사람 없는 곳으로 유인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야. 그 사람이 얼마나 강할지 모르잖아.”
신예진의 어깨에 올려진 손.
이에 신예진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앞으로 미행당하면 사람 많은 곳으로 바로 가도록 해. 그 편이 훨씬 안전할 테니까.”
“대체 어떻게… 언제 내 뒤에…….”
신예진은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분명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자신의 뒤로 오는 걸 전혀 못 느꼈다.
“짬 차이라고 생각해.”
“너 누구…….”
신예진은 몸을 돌리려고 했다.
적어도 남자의 얼굴이라도 제대로 볼 목적이었으나…….
파지직―!
“꺄악!”
박유진이 더 빨랐다.
그는 전류를 흘려보내, 신예진을 단번에 기절시켰다.
* * *
“나쁘지 않네.”
나는 신예진이 쓰고 있던 가면을 챙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던 것과 똑같아.”
운이 좋았다.
설마 했는데, 이 가면의 주인을 오늘 여기서 만날 줄이야.
뭐, 일단 가면을 손에 넣은 건 좋다만…….
‘이 녀석은 어떻게 하지?’
나는 감전당해 기절한 여자를 바라봤다.
깔끔하게 처리하려면, 이 자리에서 죽이는 게 맞았다.
게다가 죽이기에도 적합한 장소였다.
아무도 안 오는 구석진 곳, 그리고 애초에 이 암시장에는 살인사건이 심심찮게 일어나는 편이었다.
나중에 이 여자의 시신이 발견되어도, 이 암시장의 주인인 김진철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을 터였다.
‘근데 죽이기에는 영…….’
회귀하기 전에는 그냥 죽였다.
그도 그럴 게, 나를 죽이려 했던 암살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 여자는 내가 누군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기절당하고, 가면을 빼앗겼다.
거기다 이제 살해까지 당하는 건…….
‘내 얼굴을 봤으려나?’
만약 내 얼굴을 봤다면 죽이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 내 얼굴을 못 봤더라면, 그렇다면 차라리 안 죽이는 편이…….
“으아아아! 으아악!”
“음?”
갑자기 들려오는 비명 소리.
그것도 묘하게 익숙한 비명이었다.
뭔가 싶어서 고개를 돌렸는데, 그 순간 천막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허억! 으아아아! 허억. X발, 개새끼들. 그냥 좀 곱게 보내 주지, 왜 나까지 노리는 거냐고? 왜? 내가 뭘 그리 잘못을…….”
무언가에 쫓기듯 천막 안쪽으로 몸을 숨긴 남자.
“…정수민 씨?”
이번 일의 만악의 근원인 정수민이었다.
“뭐, 뭐야? 바, 박유진? 너, 네, 네가 왜 여기 있어?”
“…그 이유는 정수민 씨가 더 잘 알지 않나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정수민 씨가 김민호 씨를 납치했다는 거 알아요. 그리고 제가 여기 온 건, 김민호 씨를 구하기 위해서고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 필요 없고, 저랑 같이 경찰서에나 천천히 가시죠?”
사실 경찰서에 가 봤자 큰 의미는 없을 터였다.
이 암시장과 연관된 일이라는 걸 알게 되면, 경찰들은 바로 손을 뗄 테니까.
하지만 적어도 김민호를 납치한 것에 대한 대가 정도는 치르게 할 수 있었다.
“겨, 경찰서? 내가 순순히 따라가 줄 거 같아?!”
“그럼 순순히 가지 뭐 어떻게 할 거죠? 애초에 정수민 씨, 저를 이길 수는 있나요?”
“이 개새끼가…….”
정수민은 증오 가득한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나와의 실력 차이를 본인도 잘 아는 듯했다.
‘일단 정수민은 가볍게 제압하고, 그다음에 이 여자를 어떻게 할지 조금 더 생각을…….’
속으로 어떻게 할지 머릿속으로 빠르게 정리했다.
근데 그러던 중.
“하하하하하!”
갑자기 정수민이 웃기 시작했다.
“흐흐, 내가 너를 이길 수 있냐고? 그래. 원래라면 못 이기겠지, 이 개새끼야.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이번에는 다를 테니까!”
이 말과 함께 정수민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비닐봉지였는데, 그 안에 알약들이…….
‘잠깐, 알약?’
그러고 보니 아까 하윤경이 정수민에게 약을 준다고…….
“이 약을 바로 시험해 보고 싶었는데, 마침 잘 됐어. 첫 상대를 너로 해 주마!”
“정수민 씨. 잠깐만요. 그 STX―4387은 그냥 먹으면 안 되는…….”
“STX, 뭐? 뭐라 지껄이는 거야?”
아니, X발.
자기가 먹는 약 이름조차 모르면 어쩌라는 건데?
하지만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정수민은 알약들을 전부 입에 털어 넣었다.
“하아아.”
나는 한숨을 쉬며 방금 얻은 가면을 얼굴에 쓰고, 허리에서 자바니아를 꺼내 들었다.
정수민이 저 약들을 먹은 순간, 고생길이 환하게 열리는 게 확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