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 * *
“흐음, 챙길 건 다 챙겼나?”
뭐, 그래 봤자 내가 가져갈 물건은 별로 없었지만 말이다.
네메이아의 코트와 자바니아, 그리고 실키의 가면.
거기다 벨트에 무한와이어도 챙겼고…….
‘핸드폰 확인, 지갑도 있고. 그럼 준비는 대충 다 된 거겠지?’
시간이 흘러, 어느새 토요일.
토요일, 그러니까 이민아와 같이 놀이공원을 가기로 한 날이었다.
‘이민아와 8시까지 학교에서 만나기로 했고, 지금이 7시니까…….’
시간은 매우 여유가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준비해도 시간이 남아돌 정도로 여유가…….
“…오빠?”
“어, 유나야? 일어났어?”
“일어난 거야, 한참 전에 일어났지. 근데 오빠.”
유나는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 민아 언니랑 이트하러 가는 날 아니야?”
“일단 데이트가 아니라 목적이 있어서 놀이공원을 방문하는…….”
“아무튼 민아 언니와 가는 거잖아? 단둘이.”
“그렇지.”
“근데 옷이 이게 뭐야?”
유나는 내 검은 코트를 가리켰다.
“오빠, 솔직히 놀이공원 가는데 이렇게 입는 건 조금 아니지 않아?”
“뭐, 어때? 그리고 이게 얼마나 편하고 쾌적한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내 옷들 중에 이 코트가 제일 편했다.
착용자에게 최적의 온도를 제공해 주는 기능이 있어서, 6월이 다 되어 가는 날씨에 입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은…….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하아. 그래, 일단 코트는 그렇다 쳐도 코트 안에는? 안에는 뭐 입었어?”
“코트 안에? 그냥 늘 입던 거 입었는데?”
코트 안에 입은 건 검은색 바지와 긴팔 상의.
내가 헌터 일 등의 전투를 할 때 늘 입던 옷이었다.
‘오늘은 이민아의 각성을 도와줘야 하니까.’
놀이공원에 가, 이민아의 능력을 한 층 더 끌어올릴 계획이었다.
그리고 만약에 진짜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면, 나는 이민아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직접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바로 확인하기 위해, 그러니까 이민아와 바로 붙어 볼 수 있게 이 복장을 입은 건데…….
“오빠, 당장 옷 벗어.”
“…뭐?”
“그 옷들 벗으라고. 그리고 딴 걸로 갈아입어.”
“유나야? 갑자기 왜…….”
“오빠, 인간적으로 여자 만나러 가는데 이렇게 입는 건 아니잖아.”
유나는 내게 다가와, 내 코트를 반강제로 벗겼다.
“오빠가 뭘 입든 그건 오빠 자유기는 한데, 오늘만 그 자유를 좀 침해할게.”
유나는 거실에 있던 서랍장에 가 옷을 이것저것 다 꺼내기 시작했다.
“솔직히 단둘이 놀이공원 가는 건데, 그래도 조금은 꾸민 티 좀 내자.”
“꾸민 티를 왜 내야 해? 단둘이 놀이공원 가는 거와 그게 무슨 상관…….”
“…하아아. 나 때문에 오빠가 이렇게 됐구나.”
유나는 뭔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빠가 나만 챙기느라 연애 세포가 다 죽어서…….”
“너 아까부터 대체 뭔 소리를…….”
“어쨌든! 오빠, 일단 이렇게 입어 봐.”
유나는 내게 하얀 면바지와 초록색 셔츠를 던져 줬다.
“우선 이렇게 입어 보고, 그다음에 이 세트로도 한 번…….”
유나는 자기 일처럼 열심히 내 옷을 골라 줬다.
솔직히 왜 이러나 싶었지만, 나는 일단 유나가 원하는 대로 옷을 몇 번 갈아입었다.
그렇게 몇 차례 의상 체인지를 했고.
“으음, 이게 가장 무난하고 예쁘네.”
하얀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나를 바라보며, 유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오빠 입을만한 옷들이 왜 이렇게 없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인마. 내가 옷 사 주겠다고 하면 차라리 그 돈으로 먹을 거나 사자고 맨날 말했잖아.”
“하기야, 그랬었지.”
“그래도 내가 요즘 돈이 조금 생겼으니까, 나중에 날 잡고 옷이나 사러 가자. 특히 너는 한창 클 때라 옷을 자주 사 줘야 되거든.”
“내 것만 사지 말고 오빠 것도 좀 사.”
유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오빠도 꾸미면 꽤 잘생겼거든? 진짜 옷만 제대로 입고, 머리도 좀 손보면 여자들이 막 오빠에게…….”
“연애는 너나 실컷 해. 나는 바빠서 그런 거 할 시간 없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앞으로 미래를 대비해 계속 준비해야 했는데, 연애 같은 거 할 시간이 없었다.
“오호? 그렇게 바쁘신 분이 민아 언니와 단둘이 놀이공원을?”
“이민아와 나는 그런 연애니 뭐니, 그런 말 나오는 사이가 아니야, 인마.”
내가 이민아와 연애라니.
이민아도 웃고, 지나가던 개도 웃겠다.
“그냥 친구 사이니까, 괜한 상상하지 마라.”
“아아, 오빠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근데 민아 언니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건 또 뭔 소리냐?”
“있어. 여자의 촉이라고 해야 되나. 아무튼, 이건 오빠가 혼자서 잘 알아내 봐.”
“아니, 일단 내가 알아내야 할 게 뭔지 알아야 뭘 하든가 하지.”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내 여동생을 바라봤으나, 유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의미심장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이내 나름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나저나 오빠가 스스로 놀이공원을 가는 걸 보니까, 뭔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
“다행이라니?”
“오빠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유가 전혀 없던 모습이었거든. 맨날 일만 하고, 쉬거나 어디 놀러 갈 생각도 못 하는 거 같았는데, 이렇게 스스로 놀이공원 간다니까… 응, 다행이네.”
유나는 미소를 지은 채 나를 올려다봤다.
“맨날 나만 챙기려 하지 말고, 오빠 스스로도 챙겨. 내 행복보다, 오빠 스스로의 행복을 찾았으면 해.”
“…네 행복이 내 행복이다, 인마.”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역시 나를 이렇게까지 챙겨 주는 건 내 여동생밖에 없었다.
근데 그런 걸 다 떠나서.
“저 코트, 그냥 입으면 안 될까? 그래도 일단은 헌터로서 항상 전투를 준비…….”
“놀 때는 그냥 놀겠다는 마음으로 가. 괜히 딴생각하지 말고.”
“아, 알겠어. 그럼 잠깐만, 이 단검이랑 와이어들을…….”
“그것도 챙기지 마. 오빠, 오늘은 그냥 순수히 놀러 가겠다는 마인드로 좀 가. 헌터니 뭐니, 그런 것들은 생각하지 말고.”
유나가 매우 강하게 주장한 탓에, 나는 자바니아를 집에 놓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 군화 신지 마. 저것 말고, 어어, 아, 있네. 이 운동화 신어.”
“뭐, 상관은 없는데, 솔직히 네가 왜 이렇게까지 날 꾸며 주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꾸미고 나가 봤자 이민아가 뭐 좋아할 거도 아니고.”
“진짜 그렇게 생각해, 오빠?”
유나는 나를 바라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일단 이렇게 민아 언니 만나고, 그 언니 반응 확인해 봐. 오빠 생각과는 많이 다를걸?”
* * *
“오, 오늘 옷, 좀 다르게 입고 왔네?”
“왜 이상하냐?”
시간이 흘러 어느새 오전 8시.
나는 약속한 대로, 고연대학교 앞에서 이민아와 만났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이민아는 나를 보자마자 내 옷 스타일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 전혀. 그, 오히려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
“그렇게 보인다면 다행이다. 나도 이렇게 옷 입는 건 오랜만이거든.”
사실 오랜만이 아니라 거의 처음이었다.
회귀 전에도 이렇게 옷에 신경 쓴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 거 같더라. 나 너 그 검은 코트 말고 딴 옷 입은 거 최근에 한 번도 본 적 없거든.”
“딱히 할 말이 없네.”
“근데 그보다 너. 어어어, 호, 혹시…….”
이민아는 망설이며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혹시 나 만난다고 평소와 옷을 다르게 입고 온 거야?”
“뭐, 그렇기는 하지?”
사실 유나에 의해 반강제로 이렇게 입고 나온 거지만, 나는 설명하기 귀찮아 그냥 말을 안 했다.
“아아, 그, 그렇구나. 히힛.”
“기분 좋아 보인다? 왜? 감동했냐?”
“아, 안 했거든? 내가 이런 거에 가, 감동을 한다거나 기분 좋다거나 하지는…….”
“그래, 그래. 알겠다. 근데 그건 그렇고.”
나는 이민아를 위아래로 스윽 훑어봤다.
블라우스에 테니스 치마, 그리고 살짝 화장한 모습은, 내가 알던 평소의 이민아와는 많이 달랐다.
“너도 평소와 좀 다르게 입고 왔다? 맨날 바지만 입던데, 오늘은 치마 입었네? 게다가 화장도 좀 한 거 같고.”
“그, 어어, 따, 딱히 너 때문에 이런 거 아, 아니다? 오랜만에 놀러 가는데, 그래도 기분이나 좀 내려고…….”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인마. 왜? 찔리는 거라도 있어?”
“내, 내가 찔리는 게 왜 있어?”
“없으면 말고. 그래도 뭐.”
나는 이민아를 다시 스윽 바라봤다.
“예쁘기는 예쁘네. 너도 꾸미니까 확실히 괜찮기는 하다.”
나는 별생각 없이, 내 솔직한 감상을 이민아에게 말했다.
근데 나의 이 말을 듣자마자, 이민아의 얼굴이 확 빨개졌다.
“나, 어어, 나, 예쁘다고?”
“어, 예쁘다고. 왜?”
“나, 예, 예쁘구, 으음, 으으으. 아, 나, 나도 알아! 그, 그러니까 넌 내게 고마워하라고. 나 같은 여자랑 다니기 쉬운 줄 알아?”
“다른 여자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너는 쉬운 거 같다.”
“야, 너 매번 말을 그따구로…….”
“네, 네.”
나는 피식 웃으며 이민아에게 대꾸했다.
그리고 문득 회귀하기 전에 만났던 이민아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퀭하고, 아무런 의지도, 아무런 생기도 없던 이민아가 말이다.
‘그 모습보다, 이 모습이 훨씬 낫네.’
지금 내게 불만을 표하는, 생기 넘치는 이민아.
그녀의 이 모습이 훨씬 예쁜, 아니.
훨씬 아름다웠다.
“뭐, 됐고. 일단 네가 몸만 오라고 해서 이렇게 왔는데, 우리 용인까지 어떻게 갈 거냐? 생각해 둔 거 있어?”
“어젯밤에 택시 예약해 놨어. 이제 곧 올 거니까, 그거 타고 가면 될 거야.”
“아, 택시면 그거 타고, 어어, 뭐? 잠깐만? 택시? 택시 타고 거기까지 간다고?”
“택시비는 내가 낼 거니까 걱정 마.”
이만아는 이런 나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말했다.
“어차피 내게는 그렇게 큰돈은 아니니까.”
“그래, 너에게는 그렇겠지.”
“그치. 그리고 사실 원래는 우리 집 기사님에게 부탁해서 거기까지 우리 데려가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어. 근데…….”
“가족 눈치가 보였구나.”
“으, 응. 원래 주말마다 가족 전부가 훈련하는데, 나만 빠져서 집안 기사님까지 데려가면…….”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리고 나는 택시도 괜찮아. 버스나 지하철 타고 가는 것보다 택시가 훨씬 편하니까.”
“그, 그치. 알면 내게 고마워하라고.”
“그래. 참 고맙다, 인마.”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한 뒤, 매우 맑은 하늘을 슬쩍 올려다봤다.
‘놀러 가기 딱 좋은 날씨네.’
5월 말이었음에도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게다가 햇빛도 그리 강하지 않은 덕에, 말 그대로 밖에서 놀기 딱 좋은…….
‘아니. 아니, 정신 차리자. 오늘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이민아를 성장시키러 가는 거야.’
분위기에 취해 나도 모르게 원래 목적을 잊을 뻔했다.
아무래도 요즘 너무 평화롭게 지낸 탓에 내 긴장감이 너무 풀어진 것만 같은 느낌이…….
“그, 어어, 박유진?”
“음? 왜?”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민아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건데, 너, 으음, 혹시 치마가 좋아 바지가 좋아?”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거냐?”
“그, 그냥! 그냥 말 그대로 궁금해서. 아까 네가 나 예쁘다고 해서, 네가 치마 좋아하는지 바지를 좋아하는지…….”
“알겠어, 인마.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하지 마.”
그나저나 치마와 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여자가 큰 의미를 가진 적이 거의 없었다.
‘뭐, 아예 없던 건 아니지만.’
나는 이민아를 슬쩍 바라봤다.
여자와 아예 연이 없을 뻔한 생을 이 녀석 덕분에, 아니.
이 녀석 때문에 연을 어쩌다 보니 만들었다.
그래도 그건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간 이야기니 그렇다 치고.
“치마와 바지라.”
“으, 응. 둘 중 뭐가 더 나은 거 같아?”
“나라면, 아마 개인적으로 치마가 아닐까?”
실용성이든 뭐든, 그런 걸 다 떠나서 예쁜 것만 보면 치마가 맞았다.
근데 이건 딱히 의미가 없었다.
옷이 예쁜 게 아니라,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가 훨씬 중요했으니까.
‘그나저나 이 녀석은 이걸 갑자기 왜 물어본 거야?’
나는 의문을 품은 채 이민아를 슬쩍 바라봤다.
“으음, 치마가 더 낫구나. 그렇다면…….”
갈색 단발머리 여학생은 자신의 치마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무언가를 작게 중얼거렸다.
…전에도 말한 거지만, 여자들의 생각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 * *
“나라면, 아마 개인적으로 치마가 아닐까?”
박유진에게 그 대답을 들은 후.
이민아는 오늘 치마를 입고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친구의 취향을 맞췄어. 히, 처음으로 친구와 이런…….’
이민아는 씰룩이는 입꼬리를 최대한 진정시키며, 자신의 치마 끝자락을 매만졌다.
‘치마, 조금 더 살까?’
이민아는 치마를 집에 두 벌 정도밖에 안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박유진이 치마를 좋아한다면, 그녀는 몇 벌 더 살 의향이 있었다.
‘…친구가 좋다고 하는 거니까. 응, 그래.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이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런 후, 그녀는 옆에 있던 검은 머리 남자를 바라봤는데.
“…왜? 내 얼굴에 뭐 묻었냐?”
“히,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이민아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 잘 안 짓던, 매우 해맑은 미소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