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 * *
“그래서 이민아. 너는 기말고사 준비를 안 할 거라고?”
“나는 해 봤자 크게 의미가 없거든. 어차피 학점을 관리하든 안 하든, 나는 아버지 길드에 들어가게 될 거라서.”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가 딴 일을 하고 싶다고 해도 아버지는 나를 끌고 갈 거야. 근데 솔직히 나는 헌터 말고 다른 일을 굳이 하고 싶지는 않아.”
“그렇겠지. 그리고 애초에 너는 헌터 말고는 다른 일을 못 하잖아. 때려 부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니까.”
“그,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굳이 따지자면 나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이래 보여도 나는 전류 조작은 자신 있거든. 여차하면 전기 공학 쪽으로도 갈 수 있어.”
택시 타고 놀이공원에 가는 길.
나와 이민아는 뒷좌석에서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럼 박유진, 너도 시험공부 같은 거 할 필요 없겠네?”
“따지자면 굳이 할 필요는 없지.”
학점을 개판 내도, 방금 말했듯 나는 여차하면 그냥 전기 공학 쪽으로 취직해도 됐다.
근데 이제는 그러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하세리와 약속했으니까.’
내년부터 하세리와 함께 헌터 협회에 몸담기로 했으니, 앞으로 여생을 헌터 협회에서 보낼 듯했다.
뭐, 그래도 그건 한참 뒤의 일이니까 나중에 생각해도 됐다.
당장은 내 옆의 이민아와 이야기 나누는 게 꽤 재밌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민아.”
“응? 왜?”
“다리 좀 접어라. 너 오늘 바지가 아니라 치마 입었다고.”
“어? 아아아… 아.”
이민아는 재빨리 다리를 오므렸다.
“…미안.”
“미안할 것까지는 없다. 그보다 너 치마, 평소에 진짜 안 입기는 했나 봐? 너 아까부터 되게 어색하게 있었거든.”
“그치. 평소에 거의 안 입었으니까. 으음, 그래도.”
이민아는 내 눈치를 조금씩 보며 말했다.
“네가 예쁘다니까 앞으로 자주 입게 될지도…….”
“아니, 안 맞춰 줘도 되니까, 그냥 너 편한 거 입어, 인마.”
“…으, 응, 뭐. 네가 그걸 원한다면야.”
이민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내, 그녀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래도 너는 바지보다는 치미가 취향이라는 거지?”
“옷만 보면 그렇지. 근데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그 옷을 입은 사람을 더 중요하게 본다.”
“그럼 네 눈에 나는 어떻게 보여?”
“…너?”
“응, 나.”
갈색 단발머리의 이민아가 살짝 기대를 하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이에 나는 잠시 망설이다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은 친구지.”
“히. 그치, 나만큼 좋은 친구 찾기 힘들…….”
“그리고 내가 어떻게든 행복을 선물해 주고 싶은 친구기도 하고.”
“어? 어어, 그, 그래?”
“응.”
회귀하기 전에 만났던 이민아는 항상 불행했다.
그래서 이번 생에는 이민아가 행복한 모습들을 좀 봤으면 했다.
“그리고 이야기 나온 김에 나도 묻자. 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이냐?”
“음, 재수 없어 보이고 실제로 재수 없지만, 그래도 친해지면 착한 애?”
“…딱히 할 말이 없네.”
그동안 이민아에게 한 짓들과 말들을 생각하면, 진짜 할 말이 없기는 했다.
“그래도 착한 놈으로는 봐주고 있네?”
“네가 나쁜 새끼는 아니니까?”
“…반쯤 맞는 말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대꾸했다.
그리고 그 후로, 나와 이민아는 계속 이런저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이민아의 눈꺼풀이 서서히 흔들리는 게 보였다.
“피곤하면 한숨 자. 도착하면 깨워 줄게.”
“아, 안 피구누해!”
“혀 꼬인 거부터 풀고 말해.”
나는 피식 웃었고, 이에 이민아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이런 거로 놀리지 마, 새끼야!”
“알겠어, 인마. 그래도 피곤한 건 맞지?”
“…어젯밤에 늦게 잤거든.”
“오늘 나랑 놀이공원 가는 게 많이 설렜나 봐? 아니면 무슨 옷 입고 갈지 늦게까지 고민하느라 늦게 잔 거냐?”
“어, 어떻게 알았, 아, 아니! 그런 건 절대 아니거든!”
“아니면 말고.”
나는 미소를 지은 채 이민아를 바라봤다.
“아무튼 피곤하면 한숨 자. 지금 아니면 오늘 잘 시간 없을 테니까.”
“그래도 나만 자는 건 좀…….”
“괜찮으니까 그냥 자. 어차피 하루 종일 같이 있을 텐데, 지금 잠깐 자는 게 뭐가 대수냐?”
“그치. 응, 그치.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거지.”
이민아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눈이 서서히 감기더니, 그녀는 이내 잠에 빠졌다.
“…많이 피곤하기는 했나 보네.”
나는 바로 잠든 이민아를 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얼마나 늦게 잤으면 이 달리는 차 안에서 저리 편하게 잠들 수 있는 건지 의문이…….
“여자 친구분인가 봐요?”
곤히 잠들어 버린 이민아를 바라보던 중, 운전 중이던 택시 기사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용인 가는 거 보니까 여자 친구분과 네버랜드 가는 거 맞죠?”
“네버랜드에 가는 건 맞아요. 근데 애가 제 여자 친구는 아니에요.”
“아, 여자 친구가 아니셨구나? 근데 같이 놀이공원을 단둘이 가는 거 보니까 그냥 친구 사이는 아니신 거 같은데요? 혹시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썸남썸녀? 뭐, 썸 탄다, 이런 건가요?”
“썸이라.”
나는 잠시 이민아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제가 그런 걸 겪은 적이 없어서, 이게 썸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렇군요.”
“네, 뭐. 그렇죠.”
나는 택시 기사에게 대충 대꾸한 후, 다시금 이민아 쪽을 바라봤다.
‘이러니까 옛날 생각이 나네.’
방금 말했듯, 나는 썸인지 뭔지를 겪은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지난 몇십 년 동안 나는 여자와 크게 연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건 또 아니었다.
‘이 녀석 덕이었지.’
나는 한숨과 함께 이민아를 계속 바라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문득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박유진.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나처럼 추한 여자도 괜찮다면, 제발 나를 받아들여 줘. 제발.’
‘진정하세요. 지금 이민아 씨는 이성적으로 생각을 못 하는…….’
‘제발.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싶어. 나 더 이상 혼자 있기 싫어, 제발.’
몇 년 전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아아.”
그리고 이에 나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떠올려도 그때의 일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 * *
시간이 흘러, 몇 시간 뒤.
“미안. 아까 나 너무 많이 잤지?”
“미안할 거 없다니까.”
어느새 나와 이민아는 놀이공원에 도착해, 놀이공원의 입구를 막 지나고 있었다.
“편하게 자는 거 보니까 보기는 좋더라.”
“그, 그래?”
“물론 코만 안 골았으면 더 좋았겠는데, 그건 네가 어떻게 못 하는 거니까.”
“나 코 골았어?!”
“아니, 안 골았어. 그냥 해 본 말이야.”
“이 개새끼야!”
“방금 충격받은 얼굴 볼만했네.”
우리는 평소와 같이, 그러니까 내가 일방적으로 이민아를 놀리며, 놀이공원의 입구를 막 지났다.
‘그나저나 네버랜드라. 여기도 꽤 오랜만이네.’
전에 딱 한 번 온 적이 있었다.
회귀하기 전, 헌터 일을 할 당시.
몬스터들에 의해 완전히 무너진 이 놀이공원을 방문했었다.
그때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나올 법한 분위기로, 지금 눈앞의 놀이공원과는 모습이나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뭐, 아무튼.
이제 이곳에 도착했으니, 나는 바로 내 계획을 실행에 옮길 생각이었다.
‘현재 시각 9시 15분. 그리고 9시 40분에 늑대 테이밍 체험이 있었지.’
오늘 이 놀이공원에 온 목적은 다름 아닌 이민아의 능력 각성.
그걸 위해, 나는 늑대 테이밍 체험의 시간표를 전부 외워 왔다.
‘늑대를 한두 번 만나는 것 갖고는 부족하니, 최대한 자주 접하게 해야지.’
그래서 더 자주 만나는 게 용이하게끔, 나는 언제 어떻게 할지 일정을 구체적으로 짜 왔다.
그러니 이제 바로 이민아를 데리고 동물원 쪽으로…….
“박유진, 우리 여기 갈까?”
“응?”
언제 들고 온 건지, 이민아는 놀이공원의 지도를 내 앞에 펼쳤다.
그녀가 지도에서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닌…….
“이 익스프레스 뭐시기? 이거 롤러코스터 맞지?”
“응, 나 이거 타 보고 싶었어. 그것도 친구랑 같이.”
“어어, 으음.”
안 된다.
나는 이민아의 힘을 강화시키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당장의 1분 1초가 아까웠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지금 바로 동물원 쪽으로 가는 게 맞았다.
그랬는데.
“…안 될까?”
나를 올려다보는 이민아.
그녀의 기대에 찬 눈빛을 보자,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가자. 지금 가면 줄이 그리 길지는 않을 거다.”
“응! 어서 가자!”
평소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 채, 이민아는 신난 아이처럼 내 손을 잡고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이민아의 저 행복한 모습.
강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저렇게 행복하게 웃는 모습이 훨씬 가치가 있었다.
“…오늘만 날이 아니기도 하고.”
이민아가 강해질 방법은 많았고, 그걸 시도해 볼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니 오늘 하루쯤이야 그냥…….
‘그래도 이따 늑대들을 한 번은 보러 가자.’
내가 힘들게 시간표를 다 외워 놨다.
그런 수고를 들였는데도 안 가면 뭔가 많이 아쉬울 거 같았다.
* * *
“야, 박유진. 이, 이거 올라간다.”
“롤러코스터가 일단은 올라가야지. 그럼 처음부터 내려가냐?”
잠시 뒤.
나와 이민아는 롤러코스터의 맨 앞자리에 탄 채,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야, 나 이거 X나 떨리는데? 나 롤러코스터 처음 타 보는 거란 말이야.”
“알아. 아까 줄 기다리면서 말했잖아.”
“야,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야. 이럴 때는 위로라도…….”
“나한테 너무 많은 걸 바란다.”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근데 너 전에 수학여행으로 여기 여러 번 왔었다면서? 그럼 이걸 한 번도 안 타 본…….”
“친구가 없는 찐따라서 못 탔다, 새끼야.”
“아, 하긴.”
“너무 쉽게 납득하지 말고!”
“그럼 뭐 어떻게 납득하는데.”
내 대답에 할 말이 없었는지 이민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잠시 뒤,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도 이 롤러코스터 처음 타는 거라고 했지?”
“응. 나는 처음이지.”
제대로 된 놀이공원을 오늘 처음 온 거였고, 놀이 기구도 오늘 처음 탄 것이었다.
‘근데 롤러코스터라 해 봤자, 딱히 별 것 없어 보이는데.’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거야, 질리도록 많이 겪었다.
그리고 그건 이민아도 자주 겪었을 텐데, 이 녀석은 대체 왜 아까부터 겁먹은…….
“으아아. 야, 우리 꼭대기에 도착했어! 이, 이제 떨어지는 거야?”
“그치. 떨어지겠지.”
“으, 으아아아.”
호들갑인지 아니면 진짜 겁먹은 건지, 이민아는 살짝 떨었다.
근데 그러다가, 그녀는 갑자기 내 손을 붙잡았다.
“이민아? 너 지금 내 손…….”
이에 의문을 표하려 했으나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입을 연 순간, 우리는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우와와왁!”
“으아아아아!”
뒤에서 들려오는 다른 사람들의 비명 소리.
“꺄아아악!”
그리고 옆에서 이민아의 비명도 들려왔다.
확실히, 상당히 빠른 속도라 보통 사람들은 스릴을 느낄만했다.
그래, 보통 사람들은 말이다.
‘…별것 없네.’
더한 것도 겪어 본 내 입장에서는, 그냥 시원하고 강한 바람을 느끼게 해 주는 기구였다.
덕분에 나는 이 놀이 기구보다…….
‘슬슬 손 아픈데, 언제까지 잡고 있으려나?’
이민아에 의해 매우 꽉 잡힌 내 손이나 바라봤다.